신앙, 책 그리고 아내
사람들은 흔히 특별한 친구에 대해 ‘절친’,‘찐친’이라 부른다. 진정한 친구 하나만 있어도 성공한 인생이라 하지 않던가. 친구란 서로를 이해하고 지지하며, 어려움이 닥쳤을 때 곁을 지켜주는 존재다. 그러나 내게는 선뜻 떠오르는 대상이 없다. 학창 시절 함께 웃고 울던 벗들과는 자연스레 멀어졌고, 직장에서는 이해관계를 넘어서진 못했다. 그나마 잘 맞는 동료도 있었지만 내 맘처럼 오래가진 않았다. 그렇지만 내 곁에는 늘 묵묵히 지탱해 준 버팀목 셋이 있었기에 그리 외롭지는 않았다. 보이지 않지만 든든한 신앙, 말 없는 스승인 책, 그리고 웃음과 눈물을 함께한 아내가 있었기에 나는 위기 때마다 버티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신앙은 내게 공기와 같다. 평소에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막상 호흡이 막히는 순간 그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처음엔 초등학교 때 여름 성경학교에서 선물을 받으려 다닌 게 전부였다. 대학 시절에는 여자 친구와의 교제 조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교회에 발을 들였지만, 그곳은 결국 내 삶의 울타리가 되었다. 초반 몇 해는 힘들었다. 목사님의 설교는 깊고 어려워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말씀이 삶에 스며들었다. 성경은 도덕책도, 신동의보감도 아니다. 위인전이나 성공 지침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책이라는 점이 낯설었지만 신앙의 길잡이가 되었다.
나는 오랜 시간 신앙을 생활 속에서 배우며 버텼다. 장인어른과 함께한 예배, 가정에서 드린 기도, 삶을 관통한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의 가르침은 나를 단단히 붙들어 주었다. 힘든 시기, 절망 속에서 무릎을 꿇었고, 성경의 인물들을 떠올렸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형제들에 팔려 노예가 되어 총리가 된 요셉, 목동에서 왕이 되어 끊임없는 고난을 겪은 다윗, 기독교 박해에 앞장섰으나 누구보다도 전도에 앞장선 사도 바울 등 오히려 절망의 상황에서 성장의 기회로 만든 모습이 와닿았다. 불안한 때에는 기도와 찬송을, 잠 못 이루는 새벽이면 성경을 필사하며 연약한 나와 마주했다. 그렇게 신앙은 캄캄한 터널에서 비추는 빛처럼 나를 일으켜 주었다.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에서 주인공인 박새로이가 말하듯 “신념을 지켜. 인생을 걸 만큼의 신념이 있다면 절대 흔들리지 않아.”내게 그 신념은 곧 신앙이었다. 신앙은 나를 오뚝이처럼 일으켜 세웠다.
“책은 가장 조용하고 변함없는 벗이다. 책은 가장 쉽게 다가갈 수 있고 가장 현명한 상담자이자, 가장 인내심 있는 교사이다.” - 찰스 W. 엘리엇
책은 내게 소리 없는 위로자이자 성실한 스승이었다. 공직 8년 차, 번아웃에 빠졌을 때 우연히 접한 시집 한 권, 책 속 문장들이 나를 감쌌다.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 더한 여건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구나.” 하루의 대부분 일에 파묻혀 지내며 몸을 갈아 넣듯 사는 삶에서 나의 해방구는 책 읽을 때였다. 단 몇 분이라도 책장을 넘기면, 답답했던 내 안에 작은 창문이 열렸다. 책은 또 다른 책을 불렀고, 그 책은 사람으로 이어졌다. 독서 모임을 만들고 운영하면서 비슷한 고민을 가진 이들을 만났다. 책이란 공통분모에 인생사가 더해져 이야기샘이 마르지 않았다. 과거에만 매여 있던 내가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책 읽는 공무원이 미래를 바꾼다.”이 믿음으로 매주 한 권의 책을 전하며 하루 15분 독서를 설파했다. 후배와 동료에게 맞춤형 책을 선물하며 가까워지는 기쁨도 맛봤다. 꾸준히 책을 읽으며 보석 같은 문장을 만났고, 그 문장은 내 삶의 태도를 바꿔놓았다. 책은 내게 ‘꿈친’을 넘어 ‘삶친’으로 이끌어준 말 없는 스승이었다.
20년을 함께한 아내는 나의 가장 든든한 동반자다. 8년 연애 끝에 결혼했고, 둘은 어느새 넷이 되었다. 우리의 이야기를 모아 책으로 엮는다면 몇 권은 족히 될 것이다. 아내는 엄마이자 며느리, 딸이자 직장인으로 쉼 없이 달려왔다. 아이들 건강을 위해 손끝이 닳도록 요리했고, 십 수년을 가장으로 내 몫까지 감당했다. 내가 업무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도, 지금의 위치에 있는 것도 아내의 단단한 내조였다. 가끔은 밤늦게 집에 돌아오면, 잠든 아이들 곁에서 쪼그려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은 애잔했다. 그녀는 말 못 할 어려움을 홀로 감당했다. 긴긴밤마다 눈물을 삼켰지만, 나는 그 고충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나를 대신해 삶의 무게를 온전히 짊어졌고, 기다림으로 버텨냈다. 그 헌신은 나에게 좋은 부담으로 살아갈 힘이 되었다. 아내는 종종 웃으며 말한다. “지금은 나아졌지만 당신은 고집이 세고, 새로운 걸 받아들이는 데 유독 힘들어하는 사람이야. 사실 몇 번은 반품하고 싶었다니까.”농담 같지만, 그 말속에는 함께해 온 세월과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내는 내게 세상 그 어떤 친구보다도 소중한, 웃음과 눈물을 함께 나눈 단짝이다. 서로 부족함을 채워가며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이인삼각 경기처럼 영차영차 오늘도 발을 맞춘다.
사람은 누구나 불완전하다. 그래서 부족함을 인정하고 노력할 때 조금씩 어른이 된다. 신앙은 내 삶의 중심을 잡아준 나침반이었고, 책은 내게 성찰과 지혜를 준 스승이었으며, 아내는 날마다 곁에서 배우고 의지하는 삶의 교과서였다. 돌아보면 나는 좋은 친구를 원하면서도 정작 내가 그런 노력을 게을리해 왔다. 편한 길을 찾고, 불편함을 회피하며 내공을 쌓는 데 소홀했다. 하지만 이 세 등불 덕분에 나는 조금씩 자라났고, 받기만 하던 삶에서 나누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물론 여전히 부족함이 크다. 작은 일에도 흔들리고 사소한 일에 짜증을 낸다. 피곤하거나 배가 고프면 예민해진다. 그래서 의식하지 않으면 어른아이가 된다. 마음을 살피지 않으면 금세 잡초가 자라난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정은희는 갑자기 돈 문제로 찾아온 첫사랑 친구 최한수가 선을 넘는 행동을 하려 할 때“나는 진짜 사랑할 수 있나?”라고 묻는다. 그 질문은 연애를 넘어, 내가 누군가를 얼마나 진심으로 대하고 있는가를 되돌아보게 했다. 좋은 관계는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든다. 그래서 나는‘금란지교(金蘭之交)’라는 말을 좋아한다. 금처럼 단단하고 난초처럼 향기로운 우정. 서로를 알아주고 인정해 주며 진심으로 잘되기를 바라는 관계. 나는 오늘도 묻는다.
나는 과연 누구에게 그런 친구일까.
누구에게 힘이 되는 존재인가?
오늘도 나는, 누군가에게 작은 빛과 창문, 그리고 길동무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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