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어해빗 p-느림] 잊고 있던 나의 주치의

몇 년 만에 산에 오르며 얻게 된 것들

by 모티


산이 건넨 초대


2주 전, 입사 동기 부부와의 식사 자리에서 등산 이야기가 나왔다. 동기의 남편은 산악회 활동을 오래 해온 ‘등산 마니아’였다. 최근엔 지리산을 1박 2일로 다녀왔다며 눈빛을 반짝였다. 그는 대학에 학번까지 같았다. 서로 이름을 부르지는 않지만, 묘한 동지애가 오랜 인연처럼 이어져 있었다. 그날 나는 무심코 말했다. “기회가 되면 저도 같이 가고 싶네요.” 며칠 뒤,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번 주 토요일, 괜찮으세요?” 마침 일정이 취소되어 흔쾌히 응했다.

그렇게 무등산 원효사 주차장에서 새벽 공기를 맞았다. 그는 시내버스가 잘 닿지 않아 등산객이 적은 조용한 길을 택했다. 중봉까지 2.5km, 경사가 완만한 1시간 반 코스였다. 흙길, 바윗길, 오솔길이 번갈아 나타나 지루할 틈이 없었다. 단풍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이 가을의 숨결을 전했다.

“이 길은 눈이 내릴 때 참 예뻐요. 여긴 사진이 잘 나오죠.”

그는 여행 가이드처럼 계절마다 눈에 담을 풍경을 소개했다. 억새가 일렁이는 능선을 지나자, ‘가을 우체국 앞에서’가 흘러나왔다. 마치 연출한 듯 구름이 걷히며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노래를 따라 걷는 길은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듯했고, 사진 명소마다 난 포즈취하기에 바빴다. 그제야 깨달았다. 이 길은 나를 위해 선택한 코스였다. 힘은 덜 들이면서도 풍경은 충분히 아름답고, 사람의 발자국보다 바람의 소리가 더 많은 길. 그 길 위에서 산이 내게 다시 말을 걸어왔다. 그의 배려가 잊고 지냈던 추억을 소환했다. 10년 전, 점심시간 뒷산을 오르며 힘든 시기를 버텼다. 일과 사람에 치인 나를 큰 품으로 품어준 것도 산이었다.



산에서 나눈 대화


걷는 동안 우리는 오래된 친구처럼 이야기를 이어갔다.


“혼자 오기 쉽지 않은 멋진 곳을 소개해줘서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저보다 와이프랑 20년 전 같은 지역에서 시작해서 지금껏 도우며 살았잖아요.”


“동기들이 여덟 명쯤 되는데, 다 가깝진 않아요. 그래도 제게 먼저 안부를 묻고 챙겨줬던 건 근무지를 옮겨도 이어졌죠. 사람이란 게 참 신기해요. 자주 보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요즘 복잡한 일이나 답답한 마음이 생기면 산에 와요. 오르는 건 힘들지만 정상의 풍경은 그 고생을 잊게 하죠. 한 번은 구름이 발밑으로 지나가더군요. 그때 ‘살아 있음’이 감사했어요.” 그의 말에 나도 화답했다.

“고통 없이 성장은 없죠. 올라가는 과정은 힘들지만, 그 덕에 보이는 풍경이 달라지죠. 예전엔 정상만 보며 걸었는데, 함께 걷다 보니 길 자체가 좋네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누나가 외국에 살아서 3~4년에 한 번 들어와요. 부모님 돌아가시기 전에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생각해요. 그래서 만남이 더 귀하게 느껴지죠. 내년엔 아들이 군대를 가는데, 같이 있을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네요.”


“품 안에 자식이란 말도 있잖아요. 얼마 전 어떤 영상에서 봤어요. 자식은 내 소유물이 아니라 귀한 손님처럼 대해야 한다는 말이 참 와닿았어요.”

“맞아요. 저도 아이들에게서 대리만족을 느낀 적이 있어요. 그런데 사춘기를 지나면서 알겠더군요. 기다림과 믿음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걸요.”


“알면서도 쉽진 않죠. 그래도 조급하지 않으려 해요. 자기 길을 찾도록 돕는 게 부모의 몫이니까요.”

잠시 말이 멈췄다. 고요한 산속에서 바람이 대신 대화를 이었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죠. 부모의 애씀을 알아주면 좋겠지만, 그것도 욕심이겠죠.”


“우리 부모님도 그러셨을 거예요. 결국 다 사랑이었겠죠.”


그렇게 우리는 자식얘기부터 가장의 무게, 재테크, 은퇴 후 계획 등을 한 올 한 올 풀어내며 장불재에 도착했다. 새찬 바람에 몸이 움츠릴 때 그는 보온병을 꺼내 커피를 따랐다. 찬 공기 속 따뜻한 향이 피어올랐다. 목을 타고 내려가며 몸과 마음이 동시에 풀렸다. 그 짧은 순간을 만끽했다. 단순함과 느림의 조화였다.


"오길 참 잘했어요. 오감이 모두 깨어났거든요."


단순함이 깊어질 때


하산길은 왕복코스지만 낯설었다. 갈래마다 이정표가 있어서 안내해 주었다. 오를 때보다 대화는 줄었다. 단순했고 느린 시간이었다. 산행은 인생과 닮았다. 정상만 바라보면 숨이 차고, 주변의 아름다움을 놓친다. 천천히 걷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림이 오히려 삶의 균형을 지키는 일이라는 걸 배웠다.


단순하게 걷는다는 건 멈출 줄 아는 일이고, 느리게 걷는다는 건 속도보다 방향을 택하는 일이다. 그와의 몇 시간은 짧았지만, 그 안에 ‘환대’가 있었다. 단순한 대화 속에서 위로를 얻었고, 각자 가장으로서의 무게를 나눴다. 느린 걸음 속에서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며 디지털 디톡스를 실현했다.


몇 년 만에 산에 올랐다. 산길을 걸으며 오랜만에 마음속 펌프에서 잊고 있던 ‘느림’을 길어 올렸다. 나를 이끌어준 셀파 덕분에 다시 산을 오를 용기를 얻었다. 단순함은 결핍이 아니라 본질을 향한 정화이며, 느림은 뒤처짐이 아니라 삶을 되찾는 속도다. 산은 그 사실을 말없이 가르쳐주었다.


매일 만보를 걷듯 읽고 쓰며 일상을 벼린다. 그 쌓임이 삶과 이어지길 바라면서. 그리고 나는 그 언어를, 오늘 비로소 조금 이해한 듯하다. 그가 특별한 경험을 내게 준 것처럼, 내 삶이 누군가에게 그러했으면. 나는 나를 향한 길도 함께 걸었다.


#코어해빗#산길#등산#친구#느림#단순#깨달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