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연습해도 어렵다
존중하고 기다려주는 엄마가 되고 싶었지만, 늘 아이 앞에서 잡아당기고 있었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비교의 언어 속에서 자란다. 키와 몸무게는 물론 말의 속도와 성적표가 그렇다.
조금 더 자라면 능력과 재능,
어른이 되면 직업과 집의 크기,
그리고 어느새 아이의 성장마저 비교의 대상이 된다. 생물도, 무생물도 예외는 없다.
더 크고, 더 빠르고, 더 나은 쪽이 항상 정답처럼 제시되는 시대에서 나는 나로 살아가고 있는데 세상은 끊임없이 묻는다.
“그래서, 너는 어느 정도야?”
비교는 어느새 습관이 되었다.
의식하지 않아도 눈과 귀가 먼저 반응한다.
엄마가 되고 나서 '비교'는 더 조심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아이 앞에서는.
존중하고, 기다려주고, 아이의 속도를 믿어주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안 그래야지’라고 다짐하는 순간부터 나는 자꾸 아이 앞에서 먼저 잡아당기고 있었다.
아이의 걸음을 살피기보다 먼저 도착해야 할 곳을 떠올리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앞에서 손을 잡아끌고 있었다.
욕심은 분명 나의 것이었다.
아이의 것이 아닌데도 나는 그 욕심을 아이의 이름으로 불러왔다.
“지금 이 시기에는 이걸 해두는 게 좋아.”
“다른 애들은 벌써 다 하고 있어.”
“제발, 엄마 말 좀 들어봐.”
위의 말은 조언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결국은 잔소리였다.
그 잔소리가 쌓일수록 집 안에는 작은 다툼이 생겼고, 어느새 나는 아이에게 ‘엄마는 잔소리꾼’이 되어 있었다. 그 사실이 가장 아팠다. 아이를 사랑해서 하는 말들이 아이를 밀어붙이는 말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폭군처럼 멈추지 못했다. 대신 방편으로 몇 보 뒤로 물러서는 척하다가 이내 불안해서 더 재촉했다. 마치 장대높이뛰기 선수처럼 생각하는 듯했다. 비교가 가장 안 좋다는 것을 알기에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날에도 나는 비교의 언어를 너무 쉽게 꺼내고 있었다.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아이를 위해 더 존중하겠다고 다짐한 날에도 기다리기보다는 재촉했고, 한 발 물러서기보다 한 발 더 앞서 나가 아이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래서 문득 이런 질문이 생겼다.
이건 모든 엄마의 숙명일까.
아니면 유독 나의 관심이 지나친 걸까, 이러면 나의 사랑은 분명 독이 될 텐데.
이런저런 생각으로 매일같이 스스로를 괴롭힌 날도 많았다.
아이에게는 항상 잘해주고 싶어서였다고 변명해 보지만 아이에게는 이유가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엄마의 시선이 버거웠다는 사실만 남았을 테니까.
그래서 가끔은 신생아기, 유아기 때처럼 먹고 자고, 먹고 자고만을 반복할 때가 그리워진다.
아이에게 아무것도 가르치려 들지 않고
아무 기준도 들이대지 않던 시간들이다.
아이를 그저 멍하니 바라보던 날들이 언제였더라.
아이의 속도를 재지 않고, 내 마음의 조급함도 재우고, 그저 오늘의 아이를 바라보던 때가 분명 있었다.
비교를 멈추는 연습은 어쩌면 아이를 위해서라기보다 엄마인 내가 먼저 숨을 고르는 일인지도 모른다.
조금 늦어도 괜찮다고, 지금 이 모습 그대로도 충분하다고 아이에게 말해주기 전에 내가 나에게 먼저 해줘야 할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묻는다.
나는 왜 아이보다 조금 더 빨리 도착하고 싶어 질까. 그리고 이렇게 마음을 눕혀본다.
“꽃은 서두르지 않아도 제때가 되면 핀다.”
햇볕이 조금 부족해도, 바람이 더디게 불어와도 꽃은 자기 순서를 알고 있다.
아이도, 나도 각자의 시간이 있다는 걸 오늘은 조금 더 믿어보려 한다.
비교를 멈추는 연습은 아이를 놓아주는 일이 아니라 엄마인 내가 잠시 멈추는 일이라는 걸 오늘은 믿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