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중 냄비로도 쓰이고 밥그릇으로도 쓰였던 군용 반합
소설가 김훈은 <한겨레> 기자 시절 썼던 ‘거리의 칼럼’에서 밥의 개별성과 보편성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짧게나마 옮겨보면 이런 말이다.
‘… 밥은 누구나 다 먹어야 하는 것이지만, 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밥만이 각자의 고픈 배를 채워줄 수가 있다. 밥은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 시위현장의 점심시간은 문득 고요하고 평화롭다. 황사 바람 부는 거리에서 시위군중의 밥과 전경의 밥과 기자의 밥은 다르지 않았다. 그 거리에서, 밥의 개별성과 밥의 보편성은 같은 것이었다. 아마도 세상의 모든 밥이 그러할 것이다.’
필자의 생각에 동의한다면, 그 시절의 산에서 반합에 나누어 담겼던 밥은 산악회 ‘왕고’이거나 막내이거나, 모든 사회적 계급장을 떼고 보편적이었을 것으로 믿는다. 또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밥에서는 바위 냄새와 얼음 냄새, 계곡의 냄새가 배어나는 저마다의 맛이 있었을 것으로도 생각한다. 이러한 밥의 보편성과 개별성은 여전히 산에 있기에 지금 우린 또 배낭을 꾸리고 있지 않은가.
그건 마치 “등산은 알피니스트의 수만큼 있다.”라고 한 기도레이의 말과도 같다. 산과 그 산을 오르는 사람은 늘 동산이몽(同山異夢)을 꿈꾼다. 밥으로 상징되는 건 산꾼의 삶이자, ‘그냥 사람’ 필부필부의 삶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비 온다고 밥 안 먹냐며 장마철에도 꾸역꾸역 밥 먹듯 산으로 기어 올라갔던 인간들, 다 같이 빗물에 밥 말아먹고 저마다 다른 방귀를 뀌었을 것이다.
우리에게 등산 장비로서 군용 반합의 역사는 제법 길다. 적어도 등산이 처음 도입되었던 1930년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는 사용되었으니, 40여 년간이나 롱 런한 스테디셀러였던 셈이다. 산으로 흘러들어온 군용 장비야 많지만, 반합의 입산경위를 따지자면 그건 가벼움과 편리함 때문이다. 모든 등산장비가 그러하지만 반합 역시 산업의 발달과 따로 떼어 설명할 수는 없다.
알루미늄은 19세기 초에 발견되었지만 그 대량생산은 1898년에 와서야 전기분해법이 개발되며 가능하게 되었다. 가볍고 녹이 슬지 않으며 경도와 강도를 용도에 맞게 조절할 수 있고 또 경제적인 재활용이 가능한 알루미늄은 산업에서 혁신의 소재였으며 다양한 분야에 사용됐다. 이는 군사적인 목적과도 부합했다. 알루미늄 이전까지, 그러니까 나폴레옹의 군대는 철로 된 밥그릇을 사용했고 취사병들은 무쇠로 된 솥을 끌고 다녔다. 산에서는 숟가락 하나도 손잡이를 반으로 잘라 무게를 줄여야 하는 상황에서 쇠로 된 것들의 삼분의 일밖에 되지 않았던 알루미늄은 곧 전투력의 향상을 의미했다. 그래서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야외생활의 모든 장비들이 발달한 것과 더불어 등산의 역사에서도 이는 어깨를 나란히 해왔다.
우리나라에서는 근대사가 그랬듯 사회 전반에서 일본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는 등산 장비도 마찬가지였다. 군용 반합이 한때 ‘항고(はん-ごう)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던 까닭이다. 지금도 우리 군이 사용하는 반합은 1940년대 일본군이 사용하던 것과 같은 디자인으로 되어있다. C자형으로 된 외형은 배낭 한쪽 귀퉁이에 쑤셔 넣으면 딱 알맞은 모양이었으며, 반합 하나로 두 명분의 밥을 하면 적당한 크기라 둘이서라면 하나엔 밥을, 하나엔 국을 끓여 나누어 먹었다.
족히 50년은 넘어 보이는 군용 반합이 여태껏 녹슬지 않은 까닭은 알루미늄의 특성 때문이다. 일정 기간 동안 산화가 진행되고 나면 표면에 생긴, 다이아몬드보다도 단단한 산화막이 공기와의 접촉을 차단해 더 이상 녹스는 것을 막는 알루미늄.
지금의 우리가 이 낡은 밥그릇을 보며 옛 산에서 피워 올랐던 따스한 밥 향기를 떠올리는 것도, 조금은 산화되었을지라도 그 밥의 보편성과 개별성은 여전히 우리의 산과 삶을 단단히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리라.
늘 고봉을 그리워하던, 고봉 같은 밥그릇을 그리워하던 허기진 청춘은 결국 고봉엘 다녀왔을까? 그리고 이젠 아쉬움 없이 고봉밥을 먹게 되었을까. 여전히 밥 생각나는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