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명산을 가다] 금강산 내금강을 둘러보며
남측출입사무소를 나선 버스가 북쪽으로 기수를 틀자 창문틈 사이로 불어대는 건조한 바람엔 도라지 냄새가 묻어났다. ‘벌써 도라지꽃이 피는 계절인가?’ 아직 철이 일러 보라색 그 꽃을 보려면야 한 달 남짓이나 기다려야 할 테지만, 줄곧 그 쌉싸래하고도 은근히 달착지근한 냄새가 맴도는 것이었다. 마치 금강산 바위 봉우리 사이로 꽉 들어찬 그 보랏빛들이 향연이라도 벌이는 듯.
버스에 오르기 전 담배나 한 대 태우려 서성이던 기자에게 “내금강에 가냐”며 말을 걸어온 사람은 고성에 살고 있다며 자신을 소개한 이범규(70세)씨였다. 그의 고향은 내금강 장안사 부근, 떠나온 지는 꼭 60년이 되었다고 했다. 여행사에서 미리 나눠준 내금강 안내도를 보여주자 그는 열 살 때 기억을 꼭꼭 짚어내며 여기가 나의 집, 그 앞에 흐르던 실개천 소리까지 또렷이 들린다고 말했다.
“가보고 싶어서….”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다 듣기도 전에 출발시간이 촉박한 북쪽행 버스에 올라야 했고, 여전히 도라지 냄새 같은 것이 옷깃을 적시는 사이 채 십여 분도 되지 않아 비무장지대를 지나 북측출입사무소에 도착한 것이었다.
“남측과 북측을 구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가로등입니다. 남측은 파란색, 그럼 북측은 무슨 색으로 되어있을까요?”
‘붉은색?’
“은색입니다. 많은 분들이 붉은색이라고 생각을 하죠. 통일의 길목에서 먼저 그런 편견을 없애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관광조장의 설명에 가슴이 섬뜩했던 건 금강산이 초행인 나만의 생각이었을까. 남과 북을 가르는 군사분계선 표지판은 작년 태풍에 날아가 버렸고, 정전위원회 소속의 군인들이 한차례 다시 일으켜 세웠지만 바닷바람에 또 사라져 버렸다고 했다. 버스로 내달리면 그저 30분이면 충분한 길, 이범규 씨는 60년간 그 길을 걷지 못한 것이다.
온정령 넘어 금강의 속살에 안기다
2박 3일 일정의 내금강 탐방은 이튿날 본격적인 산행에 나서게 된다. 첫날 외금강 숙소에 도착하게 되면 다음날 산행채비를 해놓고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 보통이다. 함께 동석하게 된 일행은 모두 셋이었다. 금강산 여행을 전문으로 하는 이성원 아이컴퍼니 대표와 정용일 <민족 21> 편집장, 정표채 나의문화유산답사 동호회
회장이 그들이었다.
셋은 각기 이번 내금강 답사의 목적이 달랐지만 설레는 것은 매 한 가지였을 터. 금강산 관광길이 열린 지 9년 만에, 분단 이후 처음으로 금강의 속살을 들여다보게 된 것이니 어찌 설레지 않으랴. 그동안 책과 글, 빛바랜 흑백사진으로만 보아왔던 그곳을 직접 두 발로 딛는다는 것만으로도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우리는 북측 접대원 동무가 접시에 내온 도라지 무침을 안주삼아 들쭉술 한잔을 기울였다. 산바람 휘몰아치는 온정리의 밤은 제법 서늘했다. 금강내기, 쉴 새 없이 머리칼을 흩뜨리는 건조한 그 바람은 어떤 감상의 틈을 남기지도 않고 마음을 계속 채찍질하고 있었다.
해방 이전만 해도 “금강산에 간다”는 말은 곧 내금강에 간다는 것을 의미했다고 한다. 그만큼 그곳에 금강산의 진수가 담겨있다는 말이다. 단순히 열거해 봐도 장안사, 표훈사, 보덕암, 삼불암, 묘길상 등 수많은 문화유산이 몰려있고 정선의 <금강전도> 등에 한 폭 산수화로 표현된 진경이 있는 곳이 바로 내금강이다.
백두대간이 그렇듯 금강산도 동해 쪽 외금강은 가파르고 내륙 쪽 내금강은 완만한 지세를 이루고 있다. 이런 지형적 특성 탓에 해방 전 내금강까지는 철도가 놓였다. 개성역에서 출발하는 경원선을 타고 철원에 내려 금강산전철을 갈아타며 사람들은 그곳을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금강산 가는 철도는 흔적만 남았고, 외금강에서 접근하려면 온정령(858m)을 넘어야 한다. 외금강과 내금강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인 온정령은 마을사람들이나 넘나들던 오솔길 고갯마루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차가 다닐만한 길로 넓히는 공사를 10여 년이나 끌어오다 김일성의 교시에 따라 전쟁 중인 1951년, 두 달 만에 완공됐다.
버스는 오전 7시 40분 온정각을 출발했다. 만물상 코스로 가는 한하계를 굽이굽이 올라 온정령 정상의 터널을 지나면 비포장도로가 시작된다. 내금강까지는 46km, 1시간 40분을 가야 하는 거리다. 조명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자 뿌연 흙먼지가 확 몰아쳤다. 한참이나 소용돌이치던 먼지가 잦아들자 비로소 지지직거리던 텔레비전 화면이 선명히 켜지듯 북쪽 풍경이 펼쳐졌다. 그곳은 사람이 사는 마을이었다. 강원도 금강군 단풍마을. 완만한 산비탈을 일군 다랑이 논에는 한창 쟁기를 끄는 누렁소와 모내기하러 나온 마을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고 작은 시골학교의 운동장에는 아이들이 뛰어놀았다.
버스에는 남측 관광객 말고도 북측 해설원 2명과 안내원 1명이 함께 탑승했다. 가는 내내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금강산의 역사와 전설에 대해 설명하는 그들의 이야기는 한마디로 ‘금강예찬’이었다.
“옛날 용왕님이 금강을 모두 8개 만들었는데, 유독 우리 조선에만 주었답니다. 우리 민족이 제일이라서 아닙네까? 금강산 10경 중 첫째가 비로봉 해돋이입니다. 저는 통일이 되면 가보려고 아직까지 아껴두고 있습네다.”
하지만 그 어떤 금강예찬도 60여 년 만에 두 눈으로 마주하는 생생한 그 풍경을 대신하지는 못했다. 사람들은 창밖을 보며 손을 흔들곤 했지만 화답은 없었다. 길목마다 앳돼 보이는 군인들이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내금강에서 발원하는 금강천은 북한강과 한강으로 흘러든다. 그들이 마시는 물을 우리도 마시는 것이다.
물줄기를 따라 금강읍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신작로를 지나면 야트막한 초리고개를 넘어야 한다. 철이령(鐵伊領)이라고도 하는 고갯마루는 고려 태조 왕건이 금강산을 찾으며 ‘천리고개’라고 한 것이 그리 전해졌다는 설명이다.
고갯마루에 서자 비로소 산의 향기와 빛깔, 그 진한 기운이 확 번져오는 듯했다. 내금강의 첫 마을인 내강리에 접어든 것이다.
진짜 산길을 밟으려든 내금강으로 가라
금강의 속살은 처연했다. 기운차고 쓸쓸했으며 애달프고 구슬펐다. 천하명승 금강산으로 가는 길은 남한의 여느 유흥지처럼 식당과 숙박시설하나 찾아볼 수 없는, 옛길을 가는 정갈함이 있어 ‘금강’ 그대로 기운찼으며, 사각으로 줄지어 선 똑같은 문화주택과 기울어가는 허름한 블록담장은 오늘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 같아 입안에 묻어나는 흙먼지처럼 텁텁하고 쓸쓸했다. 내강리를 지나 얼마 큼을 더 가자 오른쪽 마을 사이로 돌탑 하나가 지나쳐갔다.
“장연사터입네다.”
안내원의 설명에 고개를 더 빼어보지만 키 낮은 3층석탑은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장연사 터는 답사일정에 포함되지 않은 곳이다. 금강산에는 일찍이 108개의 암자가 융성했다지만 현재는 표훈사와 정양사를 제외하고 남아있는 곳이 없다. 대부분 한국전쟁 중에 불타 없어진 탓이다. 북측 안내원들은 “미제의 폭격에 의해” 그리되었다고 강조했다. 애달프고 구슬픈 일이다.
만천교를 지나면 울창한 전나무숲이 길게 이어진다. 지금은 콘크리트 다리지만, 만천교의 옛 이름은 향선교(向仙橋), 신선계로 향하는 다리라는 뜻이다. 그리고 곧바로 왼쪽 너른 잡초밭이 장안사 터다. 장안사터는 내려오는 길에 들러보기로 하고, 버스는 울소를 지나 표훈사 앞 주차장까지 울퉁불퉁한 길을 계속 나아갔다.
도로 폭을 넓히기 위해 포클레인을 동원한 공사가 계속되고 있었다. 올 6월부터 일반에 개방한 내금강은 아직까지 별다른 편의시설이 갖추어있지 않다. 고작 위생실(화장실) 정도가 전부, 철다리도 계단길도 아직 그곳엔 없다. 길은 닦아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발이 지나며 자연스레 난 것이다. 옛 선조들이 걸었던 ‘진짜’ 산길을 따르는 내금강 탐방은 표훈사부터 묘길상까지만 개방되어 있다. 왕복 약 9km 거리지만 고빗사위 없이 완만해 땀 흘리지 않고도 다녀올 수 있는 코스다.
버스는 표훈사 주차장에 정차했다. 금강산 4대 사찰 중 하나로 꼽히는 표훈사는 신라 문무왕 10년(670) 창건됐다. 능파루를 지나면 탑을 중심으로 반야보전, 명부전 등 7개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다. 단청 빛이 조금 바래고 기와지붕에 풀이 돋기는 했지만 남쪽에서 보던 화려한 절집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정갈한 모습이다.
지난날 표훈사가 금강산에서 어떤 위치였는지는 능파루 왼쪽에 있는 판도방(判道房)을 보면 알 수 있다. 판도방이란 절을 찾는 손님들이 하룻밤을 묵는, 요즘으로 치면 템플스테이를 하는 곳이다. 보통 판도방 현판은 주변 경치에 어울리게 운치를 살려 당호를 붙이지만, 유독 표훈사에는 그대로 ‘판도방’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요즘말로 치면 여관에 ‘여관’이라는 간판을 내건 셈. 금강산을 찾은 유람객들이 얼마나 많이 표훈사에서 묵어갔기에 입구에서부터 대놓고 광고를 하는 것일까.
표훈사뿐 아니라 내금강 대부분의 절집은 옛 산장이자, 숙박시설의 역할까지 했다. 이런 배경으로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시대에는 금강산 사찰들이 날로 번창했다. 사찰은 나라의 보호를 받아 금강산 일대의 대지주가 되었지만, 소작을 하던 마을사람들은 불교행사 때마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공물을 바쳐야 했다. 고려말 문장가 졸옹 최해는 금강산을 두고 “저 산은 어찌하여 다른데 있지 않고 여기에 있어 우리를 이렇게 고생시키는가!”라며 한탄했다고 한다.
역사는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조선조 들어 억불정책이 펼쳐지며 금강산에 살던 스님들은 양반들의 산 유람에 길안내를 하고 가마를 메는 ‘가마 중’이 되어야 했으니, 과거의 영화도 한낮 스치는 바람과 같은 것인가.
금강문으로 가기 전 왼쪽으로 난 오솔길은 내금강 절집 중 가장 볕이 잘 든다는 정양사 가는 길이지만, 1km 남짓해 왕복 1시간여를 걸어야 하는 탓에 탐방코스에서는 제외됐다. 제한된 시간에 구석구석을 다 둘러보기에 내금강은 너무 웅장하고 섬세하며, ‘금강’스럽다.
커다란 바위 두 개가 고개를 맞대고 선 금강문을 지나면 육당 최남선이 <금강예찬>에서 이야기했듯 ‘거물의 목구멍처럼 사람을 금강산으로 집어삼키는’ 풍광이 펼쳐진다. 그는 덧붙여 이렇게 말했다.
‘금강산의 특유라 할 미(美)의 떼거리가 부쩍부쩍 사람에게로 달려들 적에는 도리어 어떻게 주체해야 옳을지를 모릅니다.’
‘현실 그대로의 이상, 생시 그대로의 꿈’
여름의 금강산은 봉래산(蓬萊山)이다. 조선의 명필 봉래 양사언은 금강산을 너무나 아낀 나머지 자신의 이름을 그렇게 불렀다. 만폭동 금강대 앞 너럭바위에는 그가 새긴 ‘봉래풍악 원화동천(蓬萊楓嶽 元化洞天)’이라는 글이 쓰여 있다. ‘금강산의 아름다움이 다 들어있는 으뜸가는 골짜기’라는 말답게 마음을 울리는 풍경이다. 후일 양사언의 후손들은 그의 글이 물길에 닳아 없어지지 않도록 수백 년 간이나 조금씩 글자의 모서리를 다듬었다고 한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출렁다리를 건너면 보덕암이다. 굵은 와이어에 나무판자를 대어놓은 출렁다리는 곧잘 삐거덕거려 5명 이상 동시에 건너지 말라는 경고판이 붙어있다. 만폭동의 유일한 인공조형물인 출렁다리는 주 계곡에만 4개가 있는데, 오히려 낡고 바랜 것이 정감 있다.
보덕암은 절벽에 난 자연굴에 누각을 덧댄 작은 암자다. 북한 국보급 유적 제98호로 지정되어 있는 그것은 인간이 자연과 어떻게 더불어 살 수 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높이 7.3m 되는 나무 기둥 하나에 17마디의 구리판을 감아 마루를 지지하고 3단으로 지붕을 얹었다. 고구려 때 창건하고, 1675년 다시 세운 보덕암을 두고, 선현들의 조화 앞에 육당은 다시 이렇게 외쳤다.
‘진실로 진실로 현실 그대로의 이상, 생시 그대로의 꿈같은 광경입니다.’
분설담, 구담, 화룡담을 지나면 마하연터와 묘길상으로 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마하연은 절집이면서도 스님들의 학교와 같은 곳이었다고 전해진다. 53칸이나 되는 큰 규모로,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다리 쉼을 하거나 묵어갔을 것이다. 련화대를 거쳐 백운대 가는 길과, 묘길상을 거쳐 비로봉 가는 금강산 탐방의 갈림목이 되기 때문이다. 이 또한 한국전쟁 때 불타 주춧돌과 계단만 발길에 채일뿐, 절 뒤편의 칠성각만 남아 쓸쓸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묘길상까지는 10여분 남짓, 절벽과 계곡 귀퉁이로 아슬아슬하게 난 길을 따라야 한다. 높이 15m로 동양최대규모인 묘길상 마애불은 고려 초 새긴 것이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이 마애불을 두고 ‘고려 불상의 자존심’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여정의 반환점에서 사람들은 앞으로 난 길을 더 오르지 못함에 아쉬운 눈길을 보내며 마애불 앞에서 한참을 쉬었다. 아쉽기는 매 한 가지인지, 함께 산길을 오르며 말을 튼 북측 구급봉사대원은 “이 길로 계속 가면 금사다리, 은사다리를 넘어 비로봉”이라고 귀띔해 주었다.
하산길은 표훈사에서 버스를 타지 않고, 백화암 부도와 삼불암, 장안사터 등지를 걸어 내려가며 둘러보는 일정이었다. 1914년 불타 터만 남은 백화암 위쪽에는 거대한 서산대사비가 가운데 솟아있고, 주변으로 제자들의 비석과 부도가 깔끔하게 정리돼 있었다. 기단이 되는 돌거북이는 군데군데 깨져나가 상처를 입었지만, 웅장한 규모에서 한눈에도 귀한 문화재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전나무숲길을 따라 조금 내려오면 문바위다. 장안사와 표훈사의 경계지점을 표시해 놓은 문바위에는 장안사의 나옹화상과 표훈사의 김동거사가 겨루며 새겼다는 삼불암과 60불이 조각되어 있다.
구구절절한 전설보다 손에 잡히는 폐허가 애처롭다면, 아! 장안사터로 발길을 옮기라. ‘장하던 금전벽우 찬 재 되고 남은 터에…’ 이은상의 시 ‘장안사’는 전쟁 전 30여 채의 법당과 건물이 솟아 금강제일가람이었던 온건한 그 모습을 보고 지은 것인데도 마치 눈앞의 폐허를 사진으로 찍어놓은 듯 구구절절 가슴에 와 박힌다. 내금강 답사의 여정은 이 처절한 빈터에서 끝난다. 허리춤까지 무성한 풀밭엔 깨진 기와조각들이 숱하게 발길에 차이고, 그곳에선 누구라도 돌아온 길을 올려다본다. 어디선가 네잎클로버를 찾았다고 웅성이는 사이, 북측 안내원들은 무성한 그것들을 뜯어 비닐봉지에 담기 시작했다.
“그걸 뜯어 무얼 하려고요?”
“토끼풀 모르십네까? 토끼에게 주려고 하지요.”
“북측에선 토끼고기를 잘 먹나 보죠?”
“아닙네다. 열심히 키워서 선생님들 다음번에 오시면 맛있게 대접하려고 합네다.”
그들의 대답이 폐허에 울리는 전설 같은 메아리와 같지만은 않았던 건 무슨 이유일까. 버스가 다시 온정령을 넘어서자, 그 산에서만 부는 바람 금강내기는 여전히 건조하게 창을 두들겼다. 질긴 도라지 뿌리를 씹는 듯, 바람에 묻어온 금강의 향기가 천천히 온몸에 퍼져갔다.
2007.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