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타산 1353m 청옥산 1404m 종주산행
5월은 늦봄이다. 평탄한 강가에서 시작한 계절 ‘늦봄’은 비가 개는 날이면 청명한 하늘을 따라 깊은 산정까지 스멀거리며 올라가 계절 ‘여름’이 된다. 믿어도 된다. 늦봄이 갑자기 변심해서 겨울로 돌아가 얼어버린다거나 늦봄을 따라 함께 산을 오르던 연초록 새순들이 하룻밤 새 가을 낙엽이 되어 떨어질 일은 없을 테니까. 자연이 하는 일은 깊은 골짜기에서 시작한 한 방울 물이 산의 경사를 따라 자연스레 큰 물이 되어 흘러가듯 늘 순방향이다. 그래서 여름이 다가와 뙤약볕이 능선에 작렬한다고 해도 우리는 산이 불탈까 걱정하지 않는다. 으레 당연한 것, 하지만 티끌만 한 억지도 불평도 찾을 수 없는 그것이 대자연이 사는 법이다.
계절 ‘늦봄’에는 생각나는 사람이 하나 있다. 이름이 ‘늦봄’이던 그 사람도 골짜기에 졸졸 흐르는 물줄기처럼 요란 없이 바다를 향해 흘러갔다. 그것이 계절 ‘늦봄’과 인간 ‘늦봄’의 공통점이다. 하지만 계절 ‘늦봄’이 대지를 품었다면 인간 ‘늦봄’은 사람을 품었다. 그래서 늦봄 문익환 목사는 이 땅에 어색한 사람의 사계절을 자연의 그것처럼 순리대로 풀어가기 위해 평생토록 맨발로 걷고 또 걸었었다. 그는 동토의 계절을 견디고도 사람의 늦봄을 보지 못하고 그가 떠나온 곳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가 염원하던 계절은 이제 초여름쯤이 되었는지 올 6월은 ‘늦봄’ 같은 사람들에게 조금 특별하다. 지난 2000년 우리 겨레가 반세기 만에 처음 손을 잡은 지 다섯 해를 맞이하기 때문이다.(주: 이 글은 2005년 5월 쓰였다.)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는 조항을 첫째로 삼는 ‘남북공동선언’ 5주년을 맞아 민에서는 축제 준비가 한창이다. 이제 6월은 땀과 눈물이 범벅이 된 끈끈하고 매캐한 계절로 기억될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 ‘통일’이라는 가을의 결실이 오는 날까지 절대 잊지 말아야 할 보람된 계절일 것이다.
산도 하나요, 사람도 하나라
그래서 이 늦봄의 계절에 땀 흘려 산에 오르는 것은 조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오르는 산이 백두대간의 한 줄기라면 더욱 그렇다. 백두에서 지리까지 한반도의 척추를 이루는 백두대간은 ‘산은 물을 가르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는 아주 단순한 원리로부터 출발한다. 높이 솟은 것은 봉(峯)이요, 움푹 들어간 것은 령(嶺)이라. 언뜻 보면 백두대간의 마루금이란 무수한 봉과 령의 집합일 뿐이지만 그곳에는 쉽게 버릴 수 없는 내 뿌리가 고고히 스며들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여느 산에 오르는 것과는 다르게 백두대간의 줄기에 서면 뺨을 스치는 바람조차 특별하게 여겨진다. 백두대간의 한 토막이라도 밟을 기회가 생기면 은근히 가슴이 벅차오르고 알 수 없는 현기증까지 몰려오는 것이다.
어느 방향이건 이 줄기를 따르다 보면 막연한 ‘통일’이 있을 것 같다. 그 ‘통일’이란 현실 세계의 치열하고도 각박한 짜 맞춤이 아니라 그저 ‘늦봄’일지라도 여름의 뙤약볕을 두려워하지 않고 가을이 되면 으레 풍성한 결실을 품에 안을 수 있을 것 같은 견고한 믿음이다.
두타에서 청옥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줄기 역시 은근하고 거짓 없이 제 갈 길을 가고 있다. 남한 백두대간의 중추를 이루는 강원도 고산준령은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돌쇠’ 같지만 한편으로 든든하고 믿음직스러운 전형적 민의 모습이다. 두타와 청옥은 불과 4㎞를 이웃하고 있지만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산도 육산이고 특별히 서로를 가르는 특이점도 없기에 뭉뚱그려 하나의 산으로 불러도 될 것 같지만 각각의 이름이 있다. 한 때 서로의 이름이 바뀌었다거나 일제의 왜곡에 의해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나왔었다. 만일 정말로 산의 이름이 바뀌었다면 보다 유래가 깊은 두타산을 형으로 두거나, 아니면 보다 높은 청옥산을 위에 두고 동생뻘 되는 산에게는 봉이라는 이름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별 대거리 없이 이웃한 두 산이 묵묵히 잘 지내는 것을 보면 앞서 말한 산자분수령의 원리처럼 그 산 덩어리는 결국 둘이 아니라 백두대간의 품에서 수억 년 하나로 지내온 형제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두타 또는 청옥을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지만 동고서저의 지형인 한반도를 생각해 보면 어느 방향에서 출발하는 것이 다리품을 덜 파는 것인지 해답은 쉽게 나온다. 두타산은 불교의 두타행(頭陀行)에서 비롯된 ‘속세의 번뇌와 티끌을 버린다’는 뜻이다. 하지만 동해시 삼화동에서 시작하는 무릉계곡 기점은 수직고도 1000m 이상의 급경사를 올라 쳐야 하기에 등산인들에게는 ‘골 때리는 산’이라는 두타(頭打)로 불리곤 한다. 서쪽 기슭인 삼척시 하장면에서 시작하는 발걸음은 한결 가볍다. 계곡 깊은 곳까지 들어와 있는 오랜 삶의 흔적 때문에 높은 곳까지 길이 잘 나있고 완만한 경사 덕분에 부담 없이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지도를 펴놓고 산행을 계획할 때 기본은 ‘능선으로 올라가 계곡으로 하산하라’는 것이다. 특별한 등반 목적이나 학술적 탐구가 아닌 경우 그렇게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산길을 따르고 그 산의 면면을 두루 살펴보는 데에도 가장 쉽다. 능선으로 올라 계곡으로 내려오는 것은 산자분수령의 원리를 파악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다. 나뭇잎 모양처럼 갈라진 능선은 어느 쪽에서 오르더라도 정상에서 하나로 만나고, 반대로 어느 작은 계곡으로 하산한다 해도 결국 큰 물줄기와 합쳐지기 때문에 길을 잃을 염려도 없기 때문이다.
종주산행의 기점이 된 해발 810m의 댓재는 예부터 삼척사람들이 내륙으로 넘나들던 보행로로 산죽이 많이 자라 죽치(竹峙)로 불렸다. 호랑이가 살았을 법한 깊은 산고개는 1984년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424번 지방도로가 되었지만 고개 정상의 산신각에서는 아직도 매년 산신제가 열린다.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사람들은 이곳부터 이기령까지를 하루 산행으로 계획하지만 취재팀은 청옥산 정상에서 야영하기로 했기에 서두를 일이 없다. 어느새 해도 제법 길어져 오후 7시는 되어야 저물기 때문에 느긋하게 오전 10시가 되어서야 산행을 시작했다.
산행을 함께한 사람들은 주문진 등대산악회 회원들이다. 전부 합쳐봐야 7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팀인 등대산악회는 모두 주문진에 사는 30대~50대 ‘아저씨’들의 모임이다. 인원은 적지만 회원 모두 등산뿐 아니라 스킨스쿠버, 산악자전거, 패러글라이딩 등 다른 레포츠 한 두 개씩은 능숙하게 하는 전문가들이다. 늦바람이 무서운 법, 요즘은 저녁시간마다 인공암벽을 오르내리며 전문등반까지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다. 취재산행에는 자영업을 해서 평일에도 시간이 나는 김상관, 이승언, 김철기, 박중원 씨가 함께했다.
“어느 정도 속도로 걷는 것이 좋겠습니까?”
팀의 리더이자 가장 연장자인 김상관 씨는 얼마 전 패러글라이딩을 하다 다친 무릎 때문에 혹여 젊은 기자들이 너무 빠른 걸음을 요구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나 보다. 괜한 걱정이다. 두타․청옥 종주는 내치면 하루에도 끝날 수 있는 거리지만 일부러 천천히 걸으며 산의 녹음에 흠뻑 젖고자 했기 때문이다. 댓재휴게소를 뒤로하고 산신각을 지나 본격적인 백두대간 능선에 올라붙었다.
늦봄에 만나는 꽃 능선길
햇댓등까지 완만한 경사의 흙길이 20여분 동안 이어졌다. 발아래는 짙푸른 녹음이 우거졌지만 나무 사이로 멀리 보이는 정상부는 아직 은근한 연둣빛인걸 보니 이제야 새순이 돋고 있나 보다. 햇댓등 정상에서 백두대간의 마루금은 왼편으로 꺾인다. 종주산행 중에 숲이 우거지면 방향감각을 잃기 쉬워 무조건 앞으로 가면 능선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능선이 갈라지는 지점에서는 지도를 꺼내 독도를 정확히 하는 것이 좋다. 야간산행을 하는 사람들은 햇댓등에서 길을 잘못 들어 다시 댓재로 돌아내려 오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지난겨울에도 회원들과 두타산에 왔었는데 눈이 너무 많아 중간에 내려가야 했어요.”
등대산악회 회원들은 월 1회씩 백두대간을 ‘모자이크 종주’ 중이다. 순서 없이 그 달에 가고 싶은 백두대간 구간의 산을 정해 능선을 걷는 것이다. 마침 취재산행이 그들이 지난겨울에 가보지 못한 구간을 걷는 것이라 한결 신나는 일이다.
명주목이라 불리는 작은 고개를 넘어 통골목이에 다다를 때까지 길은 줄곧 완만한 능선으로 걷는데 부담이 없다. 차를 이용해 800여 m나 공짜로 고도를 올린 것이 진짜 등산인가 하는 생각이 마음 한 편에 들기는 했지만 어찌 되었든 장쾌한 능선길에서 간간이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산림청에서는 작년부터 훼손된 백두대간 등산로를 정비 중이다. 이곳도 잦은 발길로 길이 깎여나가고 낙석과 추락 등 위험한 구간에 자연 돌계단과 안전 로프, 표지판 등의 시설을 정비해 놓았다. 지난달부터 시작한 노인봉 산장지기 성량수씨의 ‘백두대간 청소등반대’ 흔적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마대자루에 담아 능선 곳곳의 눈에 잘 뜨이는 곳에 둔 쓰레기들은 가지고 하산할 수 없을 만큼 덩치가 커서 ‘이것을 보거든 관계기관 홈페이지에 위치를 알려달라’는 메모만 적혀있었다. 쓰레기 더미의 간격은 30여 분만 가면 하나씩 있어 지금까지 백두대간이 얼마나 사람들의 손에 오염되어 있었는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통골목이 삼거리에서 길은 왼편 통골 하산로와 만난다. 통골은 산 깊은 곳까지 들어와 있는 임도 덕분에 30여 분만 완만한 경사를 내려가면 도로와 만나지만 비가 많이 올 경우 하산하지 말 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다. 시간은 점심때가 되어 일행은 배낭을 깔고 주저앉아 준비한 김밥을 먹었다. 다들 1박 2일분의 살림살이 치고는 꽤 큰 배낭을 메고 왔는데, 다름 아닌 ‘안락한 하룻밤’에 대한 기대가 그만큼 커서일까.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김철기, 이승언 씨의 배낭에는 먹거리가 잔뜩 들었고 정육점 주인인 박중원 씨는 고기가, 산행 경력이 가장 긴 김상관 씨에게는 텐트와 코헬 등 장비가 몰려있다.
“오랜만에 하는 야영인데 힘들어도 지고 가야지. 저는 27년 만에 산에서 자보는 거예요.”
줄곧 앞장서 걷던 이승언 씨의 말이다. 산에서 취사․야영이 금지되면서 사람들의 야외생활도 달라졌다. 텐트보다는 콘도가, 코헬에 지은 설은 밥보다는 간편한 도시락이 자리 잡았다. 그래서 산은 깨끗해지고 사람들은 행복해졌는가. 백두대간을 온전히 걷자면 1000여만 원이 넘는 벌금을 내야 된다고 한다. 그래서 백두대간을 종주한 사람은 달리 말하자면 법을 어긴 범법자이다. 제 땅을 밟는 일이 죄가 되는 일이 좁은 국토에 넘치는 사람이 살아가자니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일까. 어차피 이들의 ‘모자이크 종주’가 끝나 하나의 굵은 선이 그려진다고 해도 그 백두대간에 ‘백두’는 없을 터, 숨차게 달려가다 휴전선이라는 거대한 철문에 가로막힌 대간처럼 ‘갈 수 없는 길’은 곧 인간이 만든 것은 아닌가. 동쪽 발아래 펼쳐진 시멘트 공장의 잿빛 상처가 우리 자화상을 조각한 모자이크처럼 내려다보인다.
통골목이부터 두타산 정상까지 한 시간 남짓 등고선 간격이 좁혀진다. 모두들 제 체력에 맞추어 걸음을 조절해 가며 오르기로 했다. 고도가 1000m를 넘어서는 곳부터는 야생화가 천지다. 영국 등반가 프랭크 스마이드가 인도 가르왈 히말라야를 탐험하며 ‘꽃들의 계곡’을 발견했다면 우리는 두타산에서 ‘꽃들의 능선’을 발견한 셈이었다. 얼레지, 할미꽃, 양지꽃, 피나물…. 못내 아쉬운 것은 이름을 다 알지 못하는 그 야생화들을 일일이 불러주지 못하는 답답함이다. 혹여 사람이 다니는 길에도 꽃이 피었을 세라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할 수밖에 없었다.
두타산 정상에는 무덤이 있다. 누구의 무덤인지 알 수 없는 그것은 이제 곳곳이 파이고 잡초가 무성하다. 여간한 명당이 아니고서는 이곳까지 묏자리를 쓰는 정성이란 없었을 것 같다. 탁 트인 조망에 맑은 날이면 동해바다가 지척이다. 느긋하게 오느라 오후 3시를 넘긴 취재팀은 박달령까지 내리막을 만나 발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두타산에서 바라보는 청옥산은 바로 눈앞에 있는 듯 가깝지만 오히려 잘 보이는 탓에 은근히 지루하다. 문바위를 지나서부터는 왼쪽 길로 7부 능선을 타고 돌아가거나 곧장 올라가는 두 갈래 길이 있다. 어느 쪽으로 가도 정상까지 가는 시간은 비슷하지만 왼쪽으로 도는 길은 능선종주를 잠시 착각하게 한다.
목마름 끝에 나타난 무릉도원
청옥산 정상에는 100여 m만 내려가면 샘터가 있다. 도저히 물이 흐를만한 계곡이 아닌데도 석간수가 나온다. 봄 가뭄이 들어서인지 수량이 많이 줄어 풀잎을 받쳐놓았는데도 방울방울 떨어진다. 자리를 펴고 밥이 다 되기도 전에 술이 먼저 돌았다. 무거운 배낭을 지고 온 하루의 피로는 어느새 모두 잊고 그저 즐거운 산정의 밤이 있을 뿐이다. 은근히 불어오는 서풍이 산 아래와 다르게 서늘한 한기를 몰고 왔지만 여전히 맑은 하늘에 총총히 떠오른 별을 바라보는 일은 저잣거리에서는 느낄 수 없는 소중한 체험이다.
북쪽으로 향한 발걸음은 다음날에도 계속되었다. 청옥산 정상에서도 진행방향으로 곧장 가는 길은 중봉으로 빠지는 길이라 고적대를 가려면 ‘백두대간 등산로’ 표시를 따라 오른쪽 길로 가야 한다. 지난밤 청옥산 샘터에서 밤새 물을 받았으나 아침을 해 먹고 나니 모두 물이 바닥났다. 이제 계곡에 닿기까지는 목마른 산행을 해야 한다. 다행히 하산길이라 힘이 들지는 않지만 몇 시간은 그늘 없는 능선에서 괴로워야 할 것이다. 연칠성령까지 내리막을 지나 망군대와 고적대 구간에는 간간히 암릉구간이 나타난다. 크게 위험하지는 않지만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구간이다. 고적대는 능선의 서쪽이 잘 조망되는 전망대다. 첩첩산중이라는 말 아니고서는 달리 표현한 방법이 없는, 겹겹이 펼쳐진 산의 실루엣은 이 땅에서 사람들이 살아온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동해에서 불어오는 따스한 바람과 대륙에서 부는 차가운 바람이 섞여 계절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산정과 골짜기를 오가며 얽혀 지내온 우리의 뿌리를.
고적대에서 내려서는 1㎞구간은 철쭉가지가 옷깃을 잡는다. 이제 갓 망울을 터트리거나 어떤 것은 이르게 피어나기도 한 철쭉 군락은 6월이면 능선을 온통 붉게 물들일 것이다. 사원터와 무릉계곡으로 향하는 갈림길은 고적대에서 작은 지릉을 두 개 넘으면 나온다. 갈림길에는 표지판이 있어 헛갈릴 염려는 없다. 능선을 따라 급경사 길을 한 시간여 내려오니 계곡 물소리가 들린다. 다들 목마름이 끝에 달해 물소리를 따라 총총걸음을 하지만 소리만 커질 뿐 정작 시원한 계곡은 나타나지 않는다. 임진왜란 때 유생들이 모여 의병운동을 했다는 사원터와 무인대피소를 지나 혀를 길게 내 뺄 즈음 너른 반석사이로 콸콸 쏟아지는 시원한 계곡이 눈앞에 펼쳐졌다. 누구랄 것도 없이 주저 않아 갈증을 달래고 내친김에 이곳에서 점심식사까지 하고 가기로 했다. 계곡에 발을 담그고 배까지 든든하니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원초적 즐거움이다. 다들 앉은자리에서 벌러덩 드러누워 오침까지 즐기고 나서야 아쉬움을 달래며 일어섰다. 이제 완만한 계곡길을 따라 여유 있게 내려가도 두 시간이면 하산을 마칠 것이다. 줄곧 청명하던 하늘이 때맞추어 꾸물거리기 시작했다.
서양의 유토피아(Utopia)란 그리스어로 ‘찾을 수 없는 곳’에서 기원했다고 한다. 도연명이 그린 무릉도원도 결국 사람이 찾지 못하는, 그래서 더욱 간절한 세상이다. 백두대간을 따라 찍어나가는 모자이크가 저 백두산까지 가 닿는 날도 우리가 정말 찾을 수 없는 하룻밤 꿈일까. 깜박 잠에서 깨어나 산을 뒤로하고 내려서는 길에 어제 능선에서 보았던 야생화 무리가 떠올랐다. 봄꽃들은 계절이 지나면 곧 지게 될 것이지만 사람보다 더 오래도록 산정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룻밤 통일의 무릉도원을 찾아갔던 한 사람의 늦봄도 그러하려니.
‘꽃은 계속 피어야 아름답다/ 이제는 너무 쉽게 봄이라 하지 않고 /너무 쉽게 주눅 들지 말고/ 이제는 다시 돌아와 들꽃이 될/ 너희여’-문부식 시 ‘꽃들 9’ 중에서
2005.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