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영준 Jun 15. 2024

조선의 높이는 백두산의 높이다

   

‘조선의 높이는 백두산의 높이다.’ 이 말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100만 년 전 화산폭발로 생겨난 백두산을 두고 예로부터 우리의 선조들은 이 나라의 모든 산줄기가 그곳으로부터 생겨났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산중의 왕, 민족의 근원 백두산. 1796년 우리 산줄기와 그 이름을 체계화한 <산경표>에서는 백두대간을 조선반도의 기본 산줄기로 규정하고 모든 정맥을 이 줄기에서 뻗어 나온 것으로 보았다. 

이는 현재 북측에서도 통용되고 있는 사실로, 북한은 백두대간을 일러 ‘백두대산줄기’라 부른다. 북한은 ‘우리 민족은 하나의 지맥으로 이어진 한 강토에서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창조하며 살아온 민족이며 백두산은 우리나라 조종(祖宗)의 산’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북 민요 <달구소리>에는 ‘천하강산 구경하고 만학천봉 돌아보니 함경도라 백두산은 일국의 조종산이요’라는 구절이 나온다. 일제강점기 항일무장투쟁이 백두산을 기점으로 일어나 현재 북한체재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는 그들의 정치적 해석은 차치하더라도 이는 충분히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가 단지 백두산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민족의 영산을 그리워하고, 만주 벌판까지 뻗어나갔던 조상의 기개에 가슴이 터질 듯한 것만 보아도 그렇다. 백두산 그곳은 영원한 정신의 고향이요, 빛나는 역사의 현장이다. 이제 북한의 산들 중 유일하게 가볼 수 있는 곳으로 남은 백두산. 우리의 땅에 가기 위해 남의 나라를 거쳐야만 하는, 그래서 ‘장백산’을 올라야 하는 웃지 못 할 현실이 더욱 가슴 아프다. 


 

1. 백두산 향도봉(2712m)에서 장엄한 일출이 솟아오르고 있다. 북한의 산중 현재 유일하게 중국을 통해서 올라볼 수 있는 백두산은 역사와 현실의 문제를 떠나 오래도록 우리 민족의 정신 한 가운데 있어왔다. 김용남作

2. 백두산 최고봉 백두봉(장군봉)의 기상. 백두봉은 연평균기온이 영하 8.3도, 최저기온이 영하 47.5도를 기록했을 정도로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곳이다. 8월 상순 첫 서리가 내리기 시작해 이듬해 7월 상순이 되어서 끝난다. 최경국作

3. 백두산의 북한쪽 영지에는 일제강점기 항일무장투쟁을 했던 역사와 관련 있는 지명들이 많다. 해방 이후 북한 건국과정에서 김일성의 교시로 이름 붙은 곳들이다. 북한은 백두산 일대 량강도 삼지연군 거의 전지역을 백두산혁명전적지특별보호구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사진은 압록강 상류 협곡의 천군바위-천금철作

4. 천지를 둘러싼 외륜산 능선은 높고 험한 칼벼랑들이다. 그중에서도 분화구의 동쪽에 자리잡은 비루봉 일대는 가장 험한 바위벼랑으로 되어있다. 비루봉은 백두산 분화구의 산악미를 대표하는 하나의 독특한 산체로서 뚜렷한 줄기를 이루고 있다. 김용남作

5. 가을 붉어진 들쭉나무들이 백두고원을 한가득 메우고 있다. 들쭉나무는 전남과 강원도 등 남한의 산들에도 자라지만 북한에서는 특별히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열매를 채취해 술을 담그거나 약으로 사용한다. 백두산의 들쭉밭-김용남作

    



두만강과 압록강을 끼고 있는 량강도와 백두용암대지  

백두산은 량강도 삼지연군 북부, 중국과의 경계에 있다. 량강도는 1954년 북한에서 행정구역 개편과 함께 함경남북도 일부를 분리해 만든 지역으로 압록강과 두만강, 두개의 강이 흐른다 하여 그렇게 이름 붙었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본래 고구려와 발해의 중심에 있었던 백두산은 조선시대에 들어서야 중국과의 자연스런 국경선이 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고려와 조선초기의 북방정벌을 통해 현재의 한반도 지도보다도 훨씬 북쪽, 중국의 길림성과 흑룡강성 일대까지 길게 조선의 국경을 이루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 경계가 백두산을 중심으로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토문강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기록에 나와 있는 토문강은 두만강이 아닌 송화강의 지류로,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하는 물줄기다. 1770년 백두산의 분수령에 세운, 중국과의 국경을 표시한 정계비에 남아있는 이 기록과 함께 <조선왕조실록>에도 1597년, 1668년, 1702년에 백두산이 폭발해 용암이 흘러내렸다고 쓰여 있는데, 이는 곧 이 지역이 조선의 영토였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청나라는 뒤늦게 이 문제를 파악하고 줄곧 우리를 괴롭혀왔다. 길림성 당국에서는 조선 관리를 불러 토문강을 도문강, 곧 두만강으로 해석하라는 억지를 부려왔으며, 급기야 1908년 백두산 훨씬 남쪽, 지금의 삼지연 호수 바로 위쪽까지를 국경으로 긋는 간도신협약을 일본과 맺었다. 일본은 백두산을 중국에 넘겨주는 대가로 남만주철도 부설권과 무순탄광 개발권을 받아 챙겼지만, 거기에 조선민족의 항변은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달리 보면, 현재 우리의 영토와 한국사의 영역을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 한반도로만 규정하는 건 식민사대주의 사관이라고 밖엔 볼 수 없다. 아직까지도 백두산의 높이가 2744m라고 교육받은 세대들이 많은 현실에서, 그 높이가 왜 어느 날부터 2750m로 높아지게 되었는지 궁금해 해본 적 있을까. 일제강점기인 1944년 일본 도쿄만 해수면을 기준으로 측량했던 백두산의 높이는 1983년 북한에서 다시 원산앞바다를 기준으로 측량해 현재의 높이로 공표했으나, 아직까지도 백두산은 중국측이 주장하는 높이 2749.2m와 함께 세 가지로 불리고 있다.      


량강도는 가히 ‘한반도의 지붕’이라고 할 만큼 고산준령들로 이루어져있다. 도의 평균 해발고도가 1338m에 달해 우리나라 평균 고도인 440m에 비해 3배나 높으며 1000m 이상 지대가 면적의 85%를 차지한다. 우리가 잘 아는 한반도 최대의 고원 개마고원을 비롯해 백두고원, 백무고원, 무산고원, 장진고원, 황수원고원 등 숱한 고원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백두산 폭발 당시 흘러내린 용암이 굳어 생겨 ‘백두용암대지’로 불리며, 한라산에서와 같이 현무암 지대가 평탄하고 광활하게 뻗어있다. 백두산이 만들어낸 고원지대에는 압록강과 두만강의 지류인 허천강, 장진강, 부전강과 서두수, 연면수, 성천수라고 하는 하천이 흐르며, 하천이 만들어 낸 협곡들에는 당연히 풍부한 생태계가 자리하게 되었다.      


백두산 정상부근은 풀 한포기 돋아나지 않을 정도로 마치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은 황량한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그곳에 살고 있는 생명체는 현재 확인된 바로 식물 2700여 종, 조류 204종, 육상동물 16종, 곤충 191종에 달한다. 1950년대 말부터 해온 북측의 조사에 따르면 백두산에서는 호랑이, 표범, 사향노루, 사슴, 불곰, 산양, 수달, 검은독수리 등 세계적으로 특별히 보호할만한 동물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천지산천어나 ‘누렁이’라고 이름 붙은 사슴 등 토종 동물들의 서식도 확인돼 그 보존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 역사에 기록된 백두산의 마지막 폭발이 300여 년 전에 일어났던 것을 보면 짧은 시간동안 엄청나게 많은 생태계가 백두산을 중심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찌 반으로 갈렸는가… 어머니의 눈물과 채찍

천지를 중심으로 병풍처럼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는 백두산의 봉우리들은 2750m의 최고봉 백두봉(장군봉)을 비롯해 2500m가 넘는 것만 20여 개에 달하며 그 위성봉들은 173개에 이른다. 천지를 둘러싼 봉우리들을 외륜산이라고도 하는데, 이중 중국 쪽에서 오를 수 있는 봉우리는 청석봉(2664m) 백운봉(2691m) 녹명봉(2603m) 차일봉(2535m) 중문봉(2595m) 천활봉(2620m) 철벽봉(2560m) 천문봉(2670m) 백암봉(2640m) 등이다. 하지만 북한 쪽에도 백두산의 주요 봉우리들이 산재해 있다. 백두봉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해발봉(2719m) 제비봉(2549m) 와호봉(2566m) 제운봉(2603m) 등이 있으며 동쪽으로는 비류봉(2580m) 향도봉(2712m) 망천후(2719m) 쌍무지개봉(2626m) 등이 우람차게 솟아있는 것이다.      


내륙성 기후의 영향을 받는 백두산은 북한에서 가장 추운 곳으로 꼽혀 천지의 연평균 기온이 영하 8.3도에 불과하다. 최저기온은 영하 47.5도, 최고기온도 18도밖에 되지 않아 가히 히말라야 저리가라 할 만한 추위인 것이다. 백두산에는 연평균 274일 동안 폭풍이 치며, 207일간 비가 오고 242일간은 안개가 낀다. 백두산에 오를 수 있는 계절이 불과 여름철 100여일인 것을 생각하면, 화창한 천지를 보는 것은 그야 말로 운이 좋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백두산은 지대가 높고 주변지형이 평탄한 현무암 대지로 되어있어 다른 지역에 비해 바람도 매우 세게 불고 복잡하게 변한다. 특히 천지 부근은 주변의 높은 벼랑들로 인해 수면과 기온 차이가 커 바람이 매우 세게 불며, 강한 돌개바람의 한 형태인 ‘룡권’이 자주 일어난다. 이른바 주먹 같은 돌이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천지에 물기둥이 솟아오르는 ‘천지풍파’가 그것이다. 천치풍파를 겪으며 80여 년전 그곳에 올랐던 육당 최남선은 이렇게 적었다.        


‘바람이 냅다 분다. 모래와 돌이 날아와 때려서 얼굴을 내어놓을 수가 없다. 비마저 온다. 대번에 퍼부어서 눈코를 뜨지 못하게 한다. 눈보다 차고 우박보다 아픈 비가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오는 것이 아니라 내리쏟는 것이다. 비는 뭇매질을 하고 바람은 칼부림을 한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그저 풍우는 아니다. 분명히 너희의 소행을 생각해 보라 하시는 백두산 어머니의 눈물의 채찍이다.’     


백두산은 1962년 북한과 중국이 맺은 조중변계조약에 따라 다시 반으로 갈렸다. 천지 면적의 45.5%는 이제 한반도의 영토에서 제외된 것이다. 김일성과 주은래가 비밀리에 맺었다는 협약은 그것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공에 대한 보답이었다는 둥 무수한 설을 낳았지만 하나, 사실은 이제 다시는 그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올 수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남의 땅으로 들어가서 나마 만날 수 있는, 장백산이라 불리는 백두산을 보며 다행스러워할는지 모르지만, 그곳을 오를 때마다 백두산 어머니의 눈물의 채찍을 맞아야 하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한다. 백두산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저미고 또 눈물이 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2012.02   



하나의 백두산 두 개의 애국가 

우리나라의 애국가는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시작한다. 그 가락은 안익태가 작곡한 <한국 환상곡>의 한 구절이지만, 아직까지 작사가는 미상으로 남아있다. 그중 학자들에게 가장 유력시 되는 것이 구한말 정치가 윤치호 작사설이다. 윤치호는 서재필, 이상재 등과 독립협회를 이끌고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을 조직해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1911년 일본경찰에 검거돼 옥살이를 한 이후 조선총독부 일간지인 <매일신보> 주필을 지내며 친일파로 변절해 일본제국의회 귀족원의원을 지내고 그의 부친은 남작 작위를 받는 등 역사에 오점을 남겼다. 안익태 역시 친일인물로 거론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씁쓸하기까지 하다.   

북한의 애국가에도 백두산은 등장한다. 북한의 국가 또한 애국가이며 ‘아침은 빛나라’라는 제목으로 불리기도 한다. 북한 애국가는 광산노동자 출신 음악가 김원균이 작곡하고 월북시인 박세영이 작사했으며, 2절이 ‘백두산 기상을 다 안고 근로의 정신은 깃들어’로 시작한다. 곡을 지은 박세영은 일제시대 카프(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에서 활동하던 항일시인으로 1946년 월북 후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애국가 창작에 참여해 1947년 6월 곡을 내놓았다. 

두 개의 애국가는 하나의 백두산을 다루지만 분단의 세월만큼이나 먼 간극을 지니고 있다. 지난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서 북한 대표선수로 뛰었던 재일동포 정대세는 북한의 애국가가 울려 퍼질 때 굵은 눈물을 흘렸지만 우리는 그 내용을 알 수 없었다. 독점중계권을 가진 SBS에서 참가국 중 유일하게 일본과 북한 국가의 가사를 자막처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진 : 방송화면 캡처     

이전 11화 청한 산 위로 저 부는 바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