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명산을 가다] 정선 가리왕산
한차례 정선을 겪고 나면, 사람들은 쉬이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아니, 못내 발길은 떠나온 곳으로 돌아갈지라도 마음은 그곳에 꽁꽁 묶여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땅을 찾고 또 찾는다. 그런 걸음이 지난날 흘리고 온 기억의 편린을 다시 줍겠다는 것인지, 이미 궁벽한 산골에 영혼을 저당 잡혀버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나 정선으로 향하는 시간의 반복은 채탄이 끝난 폐광의 갱도처럼 가슴에 시커먼 구멍을 숭숭 뚫어놓곤 한다.
개미집처럼 성긴 가슴 이제 어느 찬란한 도시로도 갈 수가 없다면 아라리 아라리 산에 든 사람들은 목 놓아 쉰 노래를 토한다. 가 닿은 소리는 대답이 없다. 아라리 아라리 숲에 묻히고 바람에 묻히고 고랑 따라 흘러내려 이끼만 무성하다. 가리왕산은 사람 소리 다 듣는다. 속삭인다. 아라리 아라리 구불구불 산으로 찾아가는 길, 누가 그대 마음 달래주려니 생각일랑 하지 마오. 쉬이이 쉬이이 산정은 바람으로 대답한다.
진부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59번 국도로 접어드는 길은 여전히 수해복구공사 중이다.
숙암리를 지나는 오대천이 조양강을 만날 때까지 물가의 포클레인은 자글자글 자갈을 긁어낸다. 오른편으로 솟은 둔덕이 가리왕산이다. 옛날 맥국(貊國)의 갈왕이 살았던 곳이라고도 하고, 노적가리 쌓아둔 모양이라 하여 '가리'인데, 그중에서도 왕인 셈이다. 거대한 존재, 거대한 물신, 거대한 인력은 인간의 거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힘인가 보다. 겨울나무처럼 야윈 영혼들은 어느새 그 산으로 철퍼덕철퍼덕 끌려들어가니까.
헌것도 아니고 새것도 아니게, 정선은 그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고층 아파트가 곳곳에 들어서고 가로등, 안내판 하나까지 치밀하게 디자인되어 상품으로 태어나고 있었다. 지난여름의 수해는 정선이 다시 분 화장을 할 좋은 빌미였나 보다. 남한 땅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가진 군이 정선인데 그 땅에 사는 사람은 4만 5천여 명, 그런데 관광객은 연간 300만 명을 훌쩍 넘어선다. 어쩌면 정선은 잠시잠깐 들렀다 가는 외지인 없이는 너무너무 외로워 그렇게 화장을 할런지도 모른다. 왜 노래도 그렇지 않은가.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너주게/싸리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떨어진 동박은 낙엽에나 쌓이지/잠시 잠깐 님 그리워 나는 못 살겠네'
정선아리랑 가사는 지금까지 1천여 수가 넘게 '채집'됐다. 채집이라 함은 그것이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진 탓이다. 글이 아닌 소리로 전해지는 역사는 장삼이사의 삶이다. 그들은 정선땅에서, 둘러봐도 산 뿐인 겹겹의 담장 안에서 웃고 울기를 반복하다 이제는 지쳐서 아예 달관해 버렸다. 아리랑은 본래 '아니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며 '아리랑'으로 바뀌었는데, '아니리'라는 말은 누가 나의 처지와 심정을 '알리'에서 비롯됐다. 그래서 아리랑은 모두가 떠난 뒤에도 여운처럼 남아 있곤 한다.
정선의 역사는 대부분 뭍이 아닌 물을 따라 흘러왔다. 구석기 때도 사람은 살았다고 전해지나 조선 초기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던 고려의 충신들이 숨어들며 정선은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남면 선평역 부근 거칠현동(居七賢洞)은 고려의 일곱 신하들이 산나물을 뜯어먹고 살던 곳이다. 그들이 지어 부른 노래에서 아리랑의 기원을 찾고 있으니 벌써 600년이 넘는 일이다.
조양강, 동강 지나 남한강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뗏목 가득 서울로 가는 목재를 싣고 나르는 주요 교통수단으로 활용됐다. 아무리 흥성해도 뿌리내리지 못할 팔자, 떠도는 이들의 삶은 이미 그때부터 정해졌는지도 모를 일.
"정선은 텃세가 많아." 서울에 살다 이태 전부터 그곳에 정착한 누군가는 정선의 모습을 그렇게 일러주었다. 산으로 둘러싸인 지세가 사람들의 마음까지 꼭꼭 닫아둔다는 것일까. 개화가 시작되던 1889년은 '정선민란'으로 기록되는 해다. '군수 이규학의 폭정에 반해 전군직, 김주석 등이 주도해 일으킨 민란'으로 간단히 설명하기엔 부족한 게 많다. 동학농민운동과 항일의병전쟁을 겪어오며 정선은 더 이상 순박한 오지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는 정확히 서울보다 한 달 뒤인 4월 1일에야 정선에서 대한독립만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리랑으로도 다 달래지 못한 사람의 설움이 산을 넘어 느릿느릿 흐르는 물처럼 스며든 것인가.
'반달 같은 우리 오빠는 대동아전쟁 갔는데/샛별 같은 우리 올케는 독수공방 지키네'라던 아리랑은 '사발그릇 깨어지면은 세네 쪽이 나고/삼팔선이 깨어진다며는 한 덩어리로 뭉치네'로 시대에 따라 변해갔다.
"그때 군인들이 빨갱이 잡는다고 산에 대포를 쏴서 말이야, 그래서 많이…." 언젠가 눈이 허리까지 차오르는 가리왕산을 뒤로하던 이른 봄날, 회동리 버스정거장에서 햇볕을 쬐던 노인이 담배 반 개피 끝에 뱉은 말은 지금까지도 잊히지가 않는다.
1950년 3월 북으로 가던 빨치산 김달삼 부대는 국군 8사단과 한바탕 격전을 벌인다. 살육의 시간은 온 산을 불바다로 만들고, 청년이었을, 지금은 삶의 저쪽에 있을지도 모를 한 노인의 시절도 새까맣게 태워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남한 땅이다, 북한 땅이다 다시 영원히 가 닿지 못할 허공의 메아리 같던 정선은 1957년이 되어서야 뭍으로 난 길이 뚫렸다.
1948년 함백광업소가 문을 열며 시작된 남한지역의 탄광 개발은 정선선 열차길의 개통과 함께 가속화되어 1959년부터 사북읍을 중심으로 신흥탄광도시를 형성하게 된다. 1980년대까지 사북과 고한 일대 탄광촌에는 군청소재지인 정선읍보다 세배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이른바 '검은 노다지'를 찾아 전국에서 몰려든 장삼이사들은 또 다른 아리랑을 지어 불렀을까.
2004년 말 동원탄좌 사북광업소가 문을 닫으며 정선 지역의 모든 탄광은 폐광이 되었지만 27년 전인 1980년 4월 21일의 기억은 여전히 살아 막장을 두드린다. '사북사태'로 기억되고 있는, 부당한 제도권에 맞선 탄광노동자의 총파업은 부녀자와 아이들까지 합세해 검은 땅에서는 3일 동안이나 그들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백여 년 전 정선민란이 그랬던 것처럼 그 또한 흉흉한 시대의 뒤안길로 사그라져 갔지만 말이다.
검은 노다지가 묻힌 산에는 카지노와 호텔, 스키장, 골프장 같은 것이 들어섰다.
청색 보자기에 빈 도시락을 들고 귀가하던 시커먼 얼굴들과 일 나간 아버지를 기다리며 뛰놀던 아이들의 좁은 골목길은 어떻게 됐을까. 여관, 전당포, 다방, 중고자동차 매매상…. 그리고 그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아우라지도, 사북도, 화암팔경도, 아라리도 젖혀두고 가리왕산에 든다.
오후 해가 저물면 바람은 더욱 날을 세워 쉰 소리를 낼 것인데도. 눈 덮인 빈산, 나를 이끄는 무언의 힘, 웅장한 인력(引力), 둘러멘 한 보따리 배낭의 무게도 느껴지지 않는 성긴 가슴속의 폐광, 이제는 따스한 바람조차 그립지 않은 고단한 생애.
200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