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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원 May 08. 2023

연애이별일기 ② 다정한 사람이랑 같이 지내고 밥 먹고

2022년 11월 14일 일기 중 발췌

있잖아, 내가 원하는 건 생각보다 단순한 것 같아. 그냥 다정한 사람이랑 같이 지내고 밥 먹고 그냥 그런 평범한 일상을 지내고 싶은 거다.


세상 온갖 것들을 공부하다가 그렇게 탐구하다가 며칠을 그리 살다가 진이 완전히 다 빠진 채 집에 돌아와 또 그저 그런 일상을 보내다가 혹여나 내 연구가 의미 없어진다고 하면 터덜터덜 걸으면서 별 수 없다는 마음으로 냉소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기쁘게 돌아갈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


세상과 싸우는 일은 쉽지 않다. 불평등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 그저 가만히 눈앞에 펼쳐진 불평등에 맞서 싸우다가 그렇게 깊은 웅덩이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다시 집에 가면 이 모든 게 별일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옆에 있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다시 사랑하고 싶어졌다. 나는 온기를 같이 맞댈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20대 초중반을 지나던 시기에 내가 애인 하나 없었던 이유는 내가 너무 바빴기 때문이다. 공부하고 종종 알바 가고 기를 쓰며 장학금 받고 토요일엔 부모님 가게에 나와 엄마랑 시간을 보내고 일요일에 또 엄마를 다른 방식으로 돌보았다.


그 루틴 속엔 애인을 만들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젠 혼자서도 잘 살아가니깐, 잘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중이니깐, 내가 가끔 벚꽃같이 하얀색 띤 분홍색의 즐거움도 추구했으면 좋겠다.


엄마, 나는 아빠 같은 사람이 좋아.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 젊은 아빠를 보는 것 같아.


내가 미안했던 건 뭐였을까? 그가 살아온 단단한 일상을 너무 우습게 여겼던 카르마에 대한 벌이였을까?


나는 여러 해가 지나는 동안 아빠의 마지막 생일을 축하해주지 못했던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내가 서울에서 사 온 케이크, 조각난 애정의 증표, 전해지지 않는 마음에 한탄을 거두지 못했다.


그 생일이 마지막인 줄 알았다면 나는 한번 더 참았을 것이다. 또 인내하고 다시 한 번 아빠를 마주하고 싶다. 타국에서 만난 그는 내가 또렷이 기억하는 단단했던 아빠와 너무 닮았다. 그래서 더 눈길이 갔다.


그의 생일이 가을이라는 말에 놀랬다. 내 생일은 항상 양가적인 마음과 싸운다. 아빠의 기일이 지나고 그 우울감이 가시기 전에 내 생일이 찾아온다.


뒤늦게 챙겨준 그의 생일상엔 내가 아버지 제사상에 올리는 행위들과는 무관해 보인다. 그러니깐, 나는 아빠한테,


이제 나도 어른이 다 돼서 아빠 생일상 정도는 아주 근사하게 차려줄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일부로 다시 나가서 제일 그럴싸해 보이는 곳에서 아빠 케이크를 숫자 촛불과 함께 사 왔다.


아빠, 생일 축하해, 정말. 나도 이제 좀 괜찮아진 것 같아. 나 소고기 한가득 넣은 미역국도 잘하고 그래. 아빠가 항상 구워주던 고기인데, 한 번쯤은 내가 구워줄 걸 그랬다, 미안해.


케이크를 어디서 사 왔냐는 그의 물음에 나는 우버 타고 갔다 와서 잘 모르겠다고 동문서답해 버렸다. 나의 말에 그가 웃었다. 우리는 웃어넘겼다.


나는 그가 종종 물어오는 어디 위치한 곳이었냐는 지리학적인 질문엔 영 답을 잘 못했다. 이번에도 잘 못했다. 정말 거기가 어디였는지 잘 모르겠다. 맞아, 아빠는 지도 없이 참 잘 다녔어.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이 주는 위안이 있다. 나의 일이 큰일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저 일상을 잘 견디는 사람이 필요하다. 삶은 너무나 지겨워서, 그래서 그 삶을 같이 견뎌줄 사람이 필요하다.


나는 지루함을 소중히 다루는 사람이 좋다, 나는 단단한 사람이 좋다.


대체 텍스트: 푸른 하늘, 잔뜩 파헤쳐진 땅, 그 뒤로 보이는 앙상한 나무 한 그루, 그 옆엔 트랙터가 멈춘 채 주차되어 있다.

상황 설명 : 올 가을엔 유난히 단풍이 곱게 물들었다. 잠깐 만나던 사람의 생일을 챙겨주다가 아빠 생각이 났다. 그 앞에선 그저 축하한다고 말했지만 내 속은 영 딴생각 중이었다. 그의 생일을 아주 귀하게 여기고 내가 차린 생일상은 슬쩍 감췄다. 아, 가을 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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