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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원 May 08. 2023

애도일기 ② 그리운 건 그리운 거야

2022년 11월 17일 일기 발췌

우리 부모님의 가장 좋은 점 중 하나를 뽑자면 조건부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나와 언니 중 누가 더 탁월해서 그 눈부신 재능 때문에 지원해주지 않았다. 그저 내가 낳은 자식이 원하는 걸 지원해 주는 것을 부모의 미덕으로 여기셨다. 부모의 미덕이란 덮어놓고 지원해 주는 것이라 여기는 낡은 습관에 젖어든 부모였다.


엄마와 아빠는 내가 무얼 연구하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선 뭘 배우고 어떤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지 궁금해하시지 않았다. 그저 성실하게 매 학기 받아오는 A 가득한 성적표가 우편으로 날아오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셨다.


무엇하고 다니는지 묻지 않지만 성적표는 꼬박꼬박 챙기셨다는 것이 모순된 말 같지만 그러셨다. 내가 무얼 하고 싶어 하는지는 몰라도 그저 내가 뭔가를 아주 중요한 것을 하고 있을 것이라 여기면서 나를 지원해 줬다.


나는 그동안 여성학을 배우면서 안티-가부장제를 지향했으며 낡은 유교식 사고방식의 폐단을 배우면서 동시에 내 안의 숨겨져 있었던 낡은 관습을 확인하고 신문을 읽으면서 정치에 뜻을 품었던 순간에도 나의 부모님은 전혀 개의치 않아 하셨다.


나는 많이 배우고 노력하고 곧이어 성숙해졌다. 성숙해진 나는 부모님의 뜻에 대항하고 강렬하게 부딪히고 괴로움에 휩싸이고 부모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나 자신을 조롱하고 한심해했다.


내가 경험한 대학 생활은 나에게 새로운 규칙과 환경을 선사해 주었다. 깔끔한 옷차림, 부드러운 말투, 단정한 몸가짐, 흐트러지지 않는 기세. 나는 대학을 다니면서, 그러니깐 서울깍쟁이가 되어 갔다. 나는 서울깍쟁이 놀이를 하면서도 부모님이 이것을 뒷바라지해 주신다는 자각은 크게 없었다.


그렇게 서울을 오가면서 지내다가 마주한 부모님의 죽음 앞에 나는 한없이 작아졌다. 그리고 고독해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다. 나는 어른들 싸움에 곧장 뛰어들었고 이내 패배감을 맛보았다.


두 손으로 잔뜩 미련을 움켜 들고 그 자리에서 서성이다가 문뜩 내 손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생각에 울컥했다. 내가 그리운 건 따뜻한 품이었다.


그리움과 집착에서 시작된 싸움에 휘말렸다가 정신 차리고 나니 나는 늙은 영혼을 가진 채 젊은 육체에 깃들어 깃들어 있었다. 몸이 차게 식었다.


식은 몸은 항상 모든 것을 불만족스러워했고 더, 더, 더를 외쳤고 나는 이것이 최선이라고 말하면서 자주 달래주었다. 무엇이 최선이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대학은 나에게 구원이었다.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 그러니깐 대학이 가르쳐준 지식은 온전히 나에게 남아 혼자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나는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다양한 유형의 부모상을 접할 수 있었다. 나에게 성공에 대한 심리적 부담을 잔뜩 주는 부모, 항상 나의 안위를 걱정해 주는 부모, 반사회적이고 정치적으로 트여 있어 진보적인 부모, 사회적 관습을 중시하는 가부장적인 부모 등. 내가 제일 안정감을 느끼는 부모 유형은 다른 아니라 나를 한없이 믿어주는 부모상이었다.


나는 그냥 내가 무엇이 되더라도 그저 애가 알아서 잘하겠거니 하고 지원해 주는 나의 부모가 제일 좋았다. 애가 무슨 공부를 하던, 그것이 이해가지 않더라도 그저 뭔가 이루려고 기를 쓰는 노력 자체에 만족해하면서 그저 도와주는 부모상이 좋다.


나는 한껏 다정하고 정성스러운 엄마가 되고 싶다. 다정하고 귀여운 아이를 무럭무럭 성장시켜 대단치 않아도 자기 구실을 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이에게 대단한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보다 내가 발 벗고 나서서 세상을 바꾸는 든든한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전통적인 가치를 지키면서도 항상 후퇴하여 겸손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진보적인 입장을 가진 어른이 되고 싶다. 나는 잘 우는 성격이니깐 아이의 속상을 어루만져주는 다정한 엄마가 되긴 쉬울 것 같다.


문제는 내가 아이들을 한심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아이가 나이에 걸맞지 않은 옷을 입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저 티 없이 해맑게 자라나 남들에게 애정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아이에게는 강박적이지 않아야 한다. 불안은 나의 몫이다. 그저 바라보고 믿어줘야 한다.


대체 텍스트: 번호표를 들고 있는 손, 번호표에는 'SRGM 29'라고 적혀 있다.

상황 설명: 이력서를 쓰다가 지적받았던 부분에서 또 같은 실수를 했다. 내 이력서는 텅텅 비어 있다. 자괴감이 들던 차에 마침 수업이 바람이 너무 강하게 불어서 취소되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책상에 앉았다. 오랜만에 나와 대화를 나누었다. 이력서 실수를 너무 크게 여겨서 나를 하찮게 여겼고 그래도 살아가는 나 자신은 귀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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