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육 불안을 잠재운, 아이와 함께한 영어 책 읽기의 모든 것
"옆집 아이는 벌써 영어로 대화한대."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특히 대한민국에 산다면 이와 비슷한 종류의 불안감을 한 번쯤 느껴보셨을 겁니다. 저 또한 그랬습니다. 아이가 한글을 떼고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폭발할 무렵, 제 마음속에서는 영어에 대한 조바심이 뭉게뭉게 피어올랐습니다.
수많은 영어 학원의 레벨 테스트와 화려한 커리큘럼, 고가의 전집과 스마트 기기들이 저를 유혹했습니다.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뒤처진다'는 세상의 속삭임은 꽤나 설득력이 있었죠. 하지만 그 길 위에서 잠시 멈춰 생각했습니다. 아이가 앞으로 수십 년간 마주해야 할 영어를, 시작부터 '공부'와 '숙제'로 가득 채우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때 제가 선택한 것은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위대한 방법, 바로 '영어 책'이었습니다. 학원 가방 대신 아이 손에 쥐여준 영어 책 한 권이 아이의 세상에, 그리고 저의 교육관에 어떤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는지, 저의 길고 내밀했던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합니다.
이 긴 글을 읽고 계신 당신이라면,
이미 아이에게 최고의 선물을 줄 준비가 되신 분입니다.
모든 언어의 시작은 '즐거움'이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아이가 처음 영어와 만나는 순간이 시험지 위가 아닌, 엄마 무릎 위이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저희의 첫 영어는 알록달록한 보드북과 입체적인 팝업북이었습니다. 단어의 뜻을 알려주기보다, 책장을 넘기며 까르르 웃는 아이의 웃음소리에 집중했습니다.
아이가 조금 더 자라자, 저희 책장에는 그림책이 늘어났습니다. 저는 영어 실력보다 아이의 취향을 존중했습니다. 공룡을 좋아하면 공룡 책을, 엉뚱한 이야기를 좋아하면 'I Need a New Butt!' 같은 유머러스한 책을 함께 읽었습니다. 글자를 몰라도 괜찮았습니다. 그림만 봐도 이야기가 충분히 전달되었고, 아이는 자연스럽게 영어 소리와 이야기가 주는 즐거움에 빠져들었습니다.
어느 날, 아이가 더듬더듬 아는 단어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스스로 해내고 싶다는 신호였죠. 그때부터 저는 읽기 독립을 위해 만들어진 리더스북을 한두 권씩 아이 책상에 놓아주었습니다.
물론, 이 과정이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아이의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 AR 지수를 참고했지만, 그 숫자에 아이를 가두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지수가 조금 높아도 아이가 흥미를 보이면 과감히 도전했고, 지수가 낮아도 아이가 재미없어하면 깨끗하게 물러섰습니다.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아이의 '읽고 싶다'는 마음이었으니까요.
작은 성공의 경험을 선물하는 것. 그것이 이 시기 제 역할의 전부였습니다. 아이가 한 권을 스스로 다 읽었을 때, 저는 세상 가장 큰 칭찬으로 아이의 성취를 축하해 주었습니다.
아이가 읽기에 자신감이 붙었을 무렵, 저는 '영어 청독'이라는 마법 같은 방법을 꺼내 들었습니다. 청독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책의 오디오 음원을 들으며 눈으로 글자를 따라 읽는 것입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원어민의 정확한 발음과 억양이 아이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었고, 오디오 속도에 맞춰 읽다 보니 건성으로 읽는 습관이 사라졌습니다. 무엇보다 아이의 집중력이 눈에 띄게 좋아졌죠. 책상에 앉아 30분이고 1시간이고 오롯이 책의 세계에 빠져드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저는 영어 실력 이상의 것을 선물하고 있음을 직감했습니다.
청독은 아이에게 '듣는 귀'와 '읽는 눈',
그리고 '집중하는 힘'을 동시에 길러주는 최고의 훈련이었습니다.
물론 항상 평탄했던 것은 아닙니다. 아이가 슬럼프를 겪기도 했고, 저 역시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며 불안감에 휩싸인 날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기본으로 돌아갔습니다. 재미있는 책 한 권을 골라 함께 소리 내어 읽으며, 우리가 왜 영어 책을 읽기 시작했는지 되새겼습니다.
이제 저희 아이는 제법 두꺼운 챕터북을 스스로 읽어냅니다. 영어를 잘하는 아이가 되었다기보다, '책 읽는 즐거움을 아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아이의 영어 교육 문제로 고민하는 부모님들께, 저의 경험이 작은 위로와 용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가장 좋은 영어 학원은 어쩌면 가장 가까운 곳에 있을지 모릅니다. 바로, 부모의 관심과 애정으로 채워진 우리 집 책장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