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아 Jan 23. 2018

출근을 받아들인 서른 하나

외쿡 나이 서른

차라투스트라는 30세에 고향을 떠났다. 싯다르타도 30세에 왕궁 밖을 처음 보고는 출가를 했다. 예수는 30세가 되자 전도를 시작했다.


어른들은 20대의 노래를 치기처럼 여기는 것 같지만, 서른이 들어간 노래들부터는 진지하게 듣는 것 같다. 어른들은 20대가 아닌 30대를 부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다. 젊고 생기 넘치지만 진로에 대해 치이며 고민하는 날들은 너무나 혼란스럽다. 흔들리지 않고 단단해진 지금이 싫지 않다.


치여보니 자신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고,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못하는지, 주제 파악을 할 줄 알게 되고, 시간 낭비를 덜 한다고 해야 할까. 그 안정이 잡혀가는 비교적 젊음이 남은 30대 초중반까지가 좋지 않을까. 20대 초반으로는 돌아가고 싶지만 20대 중반 이후으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어린 나이로 돌아간들 그간의 혼란을 반복하기엔 너무나도 끔찍하다. 20대 초반까지는 마냥 까불거리고 진로에 대한 게 닥쳐오면 마냥 회피했던, 그럼에도 부모님의 안전망 안에서 살 수 있었던. 사실 그럴 수 있는, 그래도 되는 마지막 시기이기는 하지만.


20대 중반이 되면 나이를 먹었다며 반오십 거리며 20대 초반을 부러워한다. 하지만 그리 불안하지 않다. 외적으로 성숙해지는 듯한 느낌도 나쁘지 않고 여전히 20대 중반이니까. 학교를 다니고, 선후배와 엮여있으면 자신이 어른스럽지 않아도 사회로 나가는 일이 크게 두렵지 않다. 주변에서 다들 비슷한 시기에 하는 행동이고, 이끌어 주는 사람도 있고, 소개도 해주기도 하니까.


의외로 20대 중반에서 후반까지는 생각보다 별생각 없었고, 더뎠다. 나는 사회일도 남들만큼 한다고 생각했는데, 학교와 선후배, 지인의 울타리를 박차고 나오니 나는 누구보다 어린아이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혼자 힘으로, 아니면 어느 기관이나 학원이라도 찾아가서 노력으로 증명해 보이고, 사정을 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내가 잘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능력들이 생기기도 한다. 싸바싸바라든가. 살살 웃는 거라든가.


서른에 진입하면 그런 능력들이 더 생겨난다. 자기 주제를 받아들이게 된다. 마냥 이상만 꿈꾸기보다 할 수 있는 것들을 그저 한다. 절실함이 없던 사람도 생긴다. 그러니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는 분야면 힘들어도 열심히 하게 된다. 자존심을 버릴 줄 알아야 관심 가는 걸 시작할 수 있다. 관심 가는 걸 찾아도 나이가 많다는 평가로 머뭇거리면 무엇 하나도 시작할 수 없다.


어린 사람들이 많아도 그들에게는 대체로 그 분야에 대해 신념이 적다. 확신에 차서 분야로 뛰어들었다기보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찾는다는 자세로 임하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라는 퇴로가 있으니 안 되면 다른 거 하지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이런저런 시도가, 자신을 되돌아보고, 과거의 실패를 통해 수정할 준비가 지금이라도 되었다면, 신념을 찾을 수 있다. 사실 무엇을 하느냐보다 어떤 일이라도 어떤 신념으로 하는가, 어떤 철학을 가지고 해나가는가가 중요하지 않을까.


20대에 출근의 이유를 모르고 떠밀려 나온 것과 30대에 스스로 출근의 이유를 받아들이고 나온 것은 많이 달랐다. 환상보다는 눈앞에서 꿈을 꾸게 되었다. 내게 없는 것보다는 주변에 있는 것으로부터 해나갔다.


20대 중반에 대학을 졸업하고 교수의 추천을 받은 회사에 들어가서 쭉 생활을 했다면, 내 출근의 이유를 늘 의심하며 다녔을 것 같다. 나를 고민하고 의심하고 부딪혔다가 부서졌다가 절벽으로 끝내 다다랐더니, 그곳에서 내게 출근의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삶은 고통이라고. 하지만 지금 이후 늘 어떤 감정이 찾아올지 모르니 고통 안에서 춤을 추어보라고. 삶을 즐긴다는 건 그런 거라고. 휴양지는 잠깐이고 파도가 대부분의 진실이라고. 그걸 탈 줄 알아야 삶에 자유가 주어진다고.

매거진의 이전글 우울할 틈이 없던 어린날 모래성을 되찾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