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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아 Apr 25. 2022

어린아이처럼 유희하는 삶

최승자와 니체, 그리고 성철스님


세계문학전집을 많이 읽어보진 않았지만 그중 가장 끌리는 책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다. 그 안에서 낙타와 사자, 어린아이로 삶의 단계가 나뉘는데, 가장 최상위 단계인 어린아이의 삶이 무엇인지, 감이 잘 오지 않아서 여기저기에 의미를 찾아다니곤 했다.


<고통의 시 쓰기, 사랑의 시 읽기>란 책을 읽다가 최승자 시인 부분에서 니체의 3단계에 대해서 언급이 되어서, 다시 호기심이 치솟았다. 유튜브를 검색했고, 관련된 박찬국 교수님의 강의를 클릭했는데, 댓글에 2년 전 내가 달았던 질문이 있었다.


그 당시에도 이해에 확신이 들지 않아서 질문을 달았는데, 지금은 같은 영상을 보고서 더 많은 이해를 한다. 아무리 글로 읽는다고 알 수 없던 것들이 그간 삶으로 살아가면서 몸으로 알게 된 것들과 뒤섞여 다시 본 그 영상에 어린아이의 삶은 이런 것이겠구나,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낙타는 그대로 모든 짐을 수긍하는 삶이고, 사자는 의문을 가지며 거부하지만 반항하는 삶이며, 어린아이는 유희하듯 살아가는 태도라길래 내가 처음 든 의문은 어린아이는 주어진 짐을 거부하며 마음대로 놀이하듯 살아가라는 것인가? 였지만, 좀 더 알아보니 그런 것은 역시 아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하며 놀이하듯 할 수 있는 정신력을 가지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후 두 번째 든 의문은, 낙타 또한 의문을 품지 않고 모든 걸 수긍하는 삶인데, 모든 걸 놀이하듯 긍정하는 어린아이의 삶과 무엇이 다른 거지? 의아했다.


낙타는 의문을 품을 수 없는 지적 상태로 타인들이 그렇게 하니 다수를 따라 수긍하는 것이며, 어린아이는 낙타와 사자의 단계를 거친 후의 자발적인 긍정이다. 어느 날 의문을 품었고, 반항을 했고, 그런 과정 속에서 성숙에 이르러 어찌 보면 불교의 해탈에 이르는 것이다.


성철 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말씀이 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데, 어설프게 지식을 쌓게 되면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다 좀 더 깊어지면 결국 산은 산이었고, 물은 물이었구나, 세상을 왜곡하는 건 내 마음이었구나, 겸손해진다.


결국 이런 성철스님의 말씀도 니체의 3단계와 같은 인생의 과정과 결이 같다. 누군가 확신하는 말을 자주 하거나 편견을 갖는다면 낙타나 사자의 단계에 있는 중일 것이다.


어린아이는 살아가는데 심각한 의문을 품지 않는다. 그저 눈앞의 계절을 즐길 뿐이다. 물론 고통을 즐기는 어린아이는 매우 적겠지만, 니체가 말한 어린아이는 삶에서 오는 그 어떤 것이라도 유희하는 태도를 가지자는 데서 그렇게 설명한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성철스님 말씀처럼 삶의 의미에 대해 의문을 품은 적 없이 닦아 놓은 길대로 얌전히 간다면 사자와 어린아이의 삶을 텍스트로는 이해해도 가슴으로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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