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삶의 주도권은 자신
삶이 불안하고 애매모호할 때 사주 책을 사서 공부해본 적이 있다. 미신이라고는 하지만 똑똑하고 성공한 정재계 인사들조차도 믿는 거 보면 '그 안에 무언가가 있구나.' 싶었다. 재밌기도 하고 많은 위로를 받았다. 바넘 효과라는 게 있다.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성격 특성을 자신의 성격과 일치한다고 믿으려는 현상이다. 사실 점을 보는 사람조차도 가장 먼저 바넘 효과에 넘어간 사람일지 모른다. 자신조차도 그걸 믿고 공부하면서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는 예외도 있다며 애매모호한 답을 얻는다.
사람 대하는 일을 오래 한 서비스업 사장님이나, 각종 드라마를 오래 본 사람이나, 고전 문학을 섭렵한 이들은 사주를 보지 못해도 어떤 한 사람의 상황에 대해 전해 들으면 "이렇겠구나. 저렇겠구나." 흐름을 얼추 맞춘다. 인간사가 다 같진 않지만 불행의 원인은 대체로 비슷비슷하기 때문이다. 나만 해도 삶과 죽음에 대해, 인간의 행동과 심리, 철학에 관심이 많아서 늘 놀이처럼 공부를 한다. TV에 나오는 문제가 있다는 사람들의 다음 행동 패턴을 미리 맞춘다. 그럴 때면 엄마는 "이거 재방송이야?" 내게 놀라 하며 묻는다. 그러다 한 번씩 틀릴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점보는 분들처럼 어물쩍 예외가 있다는 식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사주가 통계학이라고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마다 사주가 다양하고, 그 같은 사주를 최소 여러 명을 정리해야 데이터가 될 텐데, 그 옛날 중국에서 그걸 다 철저하게 했을지는 의문이다. 요즘 시대에는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논문조차 없다. 논문이 없다는 건 과학적으로 증명이 어렵다는 거니까. 서양에서 별자리 보는 사주와 굉장히 비슷한 점성술이란 게 있는데 그건 논문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는 신빙성이 없다는 것으로 밝혀졌다.
철학이라 하면 한국에선 두 가지 의미로 나뉘는 것 같다. 철학관이란 게 성행하므로 명리, 사주라는 철학. 그리고 나머지는 동양 철학, 서양 철학 같은 삶과 죽음을 왜 저리도 떠들까 하는 가까이하기 어려운 학문. 나는 후자의 철학을 이제는 더 믿게 되었다. 학문으로서가 아닌 내 삶에 녹여내서 행동하게 하는 철학은 불확실한 삶에 스스로 설 수 있게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자기 삶의 주도권은 신이나 사회적으로 성공한 타인이나 부모나 점성가가 아니다. 오직 자신뿐이다. 자신이 생각하고 행동해서 무엇이든 편견을 갖지 않고 그 누가 뭐라 해도 직접 해보는 것이다. 그래야만 알 수 있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걸 했을 때 행복해하는지. 사주를 봐서 어떤 직종으로 하라고 한들 그게 일인데 마냥 맞을 수 있을까? 당장은 맞아도 상대하는 사람에 따라, 직급에 따라 즐겁다가도 괴롭기도 하는 게 삶인데, 그렇다면 자기 힘으로 스스로 삶을 결정해야 덜 후회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