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대를 읽는 마음과 예술
문화와 예술의 관계
문화는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양식’이며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는 쌓아온 것들’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추상적인 정의는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양식이라고 했는데, 이러한 삶의 양식을 지배하는 것이 이데올로기다. 시대예술을 이해하는 예술과 기술의 개념에 영향을 미치는 사상의 울타리가 문화적 이데올로기라 하는데, 그러면 우리는 지금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는가를 생각해보자.
몇 년 전, CJ Entertainment 회사의 브랜드 광고를 보면 “문화는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라고 단언한다. 어떻게 이런 말이 나올 수 있는 것인가. 단순히 회사의 브랜드를 인지시키고 격상시키기 위해 사용된 수사(修辭)는 아닐 것이다. K-culture라는 말은 이미 익숙하다. 전 세계가 BTS에 열광하고 있다. BTS 멤버가 사용한 립밤이 순식간에 날개달린 듯 팔린다. 지금 우리에게 문화는 국가의 경쟁력이며, 언제나 문화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살고 있는 것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우리 삶의 양식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살펴보자.
아침에 일어난다. 시계나 스마트폰을 통해 시간을 확인한다. 세수를 하고 이를 닦고 옷을 입고 주부는 아침을 준비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에 따라 식구들은 아침을 먹거나 혹은 혼자 자취를 하는 사람일 경우 스스로 차려먹거나 거를 수 있다. TV나 라디오를 틀어놓고 출근이나 등교를 준비할 수 있다. 준비가 끝나면 회사원들은 회사로 향하고, 학생들은 학교로 향한다. 이동수단은 대중교통이 될 수도 있고 자차, 자전거 혹은 도보가 될 수 있다. 이동하는 동안 음악을 들을 수도 있고, 책을 읽을 수도 있으며 혹은 노래를 조용히 흥얼댈 수도 있다. 스마트폰 게임을 하거나 웹서핑, 웹툰이나 드라마, 유튜브를 볼 수도 있다. 또는 소셜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하기도 한다. 흔한 아침 풍경이다. 물론 집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나 취업이나 시험을 준비 하는 사람 등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 대부분의 일상일 것이다.
자 그럼 이런 일상을 가진 오늘날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즉 어떤 이데올로기 안에서 정의되어지는가를 봐야 한다는 것인데 유명한 예술철학자 아서 단토는 《예술의 종말 이후》에서 “예술의 종말은 이제 예술이 취해야 할 특정한 역사적 방향과 같은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토가 말하는 예술의 종말은 예술이 없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예술작업이 거의 무한하게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정도로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떠해야만 예술이 된다는, 예술에 대한 통념이 무용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우리에게 예술은 이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즐기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나의 시간을 재미있게 만들어주고, 즐길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무엇일까. 위의 상황에서는 이동하는 동안 남는 시간을 채워주었던 노래, 웹툰, 드라마, 유튜브, 게임 등이라 하겠다. 물론 과거의 기준에서 보면 이들을 예술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나 예술적 지위를 얻으려면 문화적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고 했다. 우리는 우리 삶을 윤택하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을 즐기고 공유하는 것을 예술로 봐야한다는 시기에 이르렀고, 나아가 나의 시간을 위해 이 것들에 돈을 쓰기까지 한다. 실시간으로 경제적 순환까지 발생시키는 것이다.
남는 시간을 채워준다고 했는데 이 개념이 바로 여가시간이다. 여가시간의 발생은 산업혁명으로 근로자라는 개념이 생기고 퇴근 이후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으로 설명된다. 바쁜 현대인들에게 여가라는 개념은 재충전의 시간, 경제적 의무에서의 일탈 등으로 기분전환의 시간을 가지고, 짜릿한 여흥을 누리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이처럼 신분사회의 붕괴로 귀족이 몰락하고 근로자라는 개념이 발생하면서 서민의 중산층화는 새로운 문화를 낳았다. 예술가와 지식인은 종래의 후원자가 아닌 시장 경제 체제에 종속되었다. 또한 농업사회의 쇠퇴는 노동과 놀이가 구분되었다. 노동과 놀이는 분리되면서 새로운 대중의 취향에 맞는 문화가 나타났다. 이제 귀족과 유한계급만이 여가와 놀이를 즐기는 것이 아니며, 여가 놀이는 보편화되었다. 이렇게 즐기는 것이 예술이 되는 시대로 진입한 것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왜 보다 많은 사람이 즐기는 것이 예술적 지위를 얻게 된 것일까. 기술 복제 시대에 아우라 라는 말이 있다. 사진기술이 발명된 이후 동일한 작품의 복제가 너무도 쉽게 이루어진 이후 예술작품의 원본에 대한 논쟁인데, 예술작품을 실제로 마주했을 때 느껴지는 작품의 기운으로 아우라를 설명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사진기술이 발명된 이후의 삶을 살고 있고, 영화가 발명된 이후의 생활을 하고 있다. 원본에 대한 복제는 이미 만연하다. 원본이 가져다주는 아우라는 과연 어떤 것일까. 그 작품이 자리한 공간적 현장성, 함께 관람하고 있는 다른 관람객과의 공감 등이 수반되어 일어나는 감상일까. 하지만 실제 작품을 마주했을 때 그 작품이 가진 진정한 아우라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완벽한 상황이 언제나 항상 주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관광지를 예로 들어보자, 완벽하게 아름답고 절경인 순간을 포착해 사진으로 남긴 관광지의 모습을 상상하고 막상 그 곳에 갔을 때 실망했다는 일화들이 있다.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에 직접 갔던 지인이 수많은 관람객으로 둘러싸인 모나리자를 봤을 때, 작품이 점처럼 보였고 그 작품에게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사람들에게 질려서 돌아왔다는 일화를 들은 적 있다. 이런 현장성이라면 미술책에 실린 도판으로 접하는 모나리자가 더 큰 감동을 줄지도 모르겠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이제는 소수의 특권층이 향유하던 예술품이 주는 원본으로서 아우라보다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고 감동을 줄 수 있고, 소통이 가능한 예술작품이 더 의미를 가진다. 벤야민의 이야기를 더해보자. 벤야민은 영화의 시대에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회화 시대의 관조적 태도와 대비되는 대중의 진보적 태도라 했다. 끊임없이 새로운 장면들이 전환되는 영화를 보면서 대중들은 더 이상 관조적이 될 수 없게 된다. 능동적인 관객의 탄생과 같은 결과를 가져온 영화는 사실 인간의 눈을 현혹시키는 기교에서 발생되었다. 1초에 24장이라는 움직이는 그림들이 스크린에 현실의 움직임을 그대로 재현하는 기교에서 시작된 영화가 예술의 영역에서 인정을 받게 됨으로써, 사실 보다 많은 관객 즉 대중에게 접근하는 예술로서 대중 예술이 힘을 얻게 되는데도 일조한 것이 된다. 영화는 이후에 지속적인 영상기술의 발달과 함께 대중문화, 대중예술의 선두주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