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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피 Mar 02. 2023

순덕이 누나의 사백 원짜리 라면

라면과 국수의 경계 지점에 누나가 있다

                                                                




쉬는 시간 딱 10분.


10분 안에 라면을 먹고 와야 한다. 

진주에 가장 오래된 고등학교의 매점. 엄마와 딸이 함께 일하던 곳. 엄마는 중년의 여성. 딸은 스무 살 내외로 유난히 뚱뚱했는데 순덕이 누나로 불렸다. 본명이 순덕이인지는 모르겠다. 이름보다 뚱뚱한 점이 기억 속 선순위로 남은 분. 학생들 중 누군가가 장난 섞인 투로 불렀는데 다들 따라 불렀다. "순덕이 누나~ 라면 두 그릇요. 계란도 넣고요." "응 라면 두 개에 계란 두 개면 천 원이야." "순덕이 누나 라면 빨리 좀 줘요. 쉬는 시간 끝나면 누나가 책임질 거예요?" "응 책임질게." "누나 저도 책임져 주세요." "응 닥쳐." "순덕이 누나 지금 3분 남았는데 시켜도 될까요?" "괜찮아, 3분이면 라면 두 그릇도 뚝딱할 수 있는 시간이야." "그럼 라면 하나요." "응 사백 원!" "여기 백 원짜리 네 개요." "어디 보자 국물에 면발을 넣고 여기 받아~" "헉 이렇게나 바로요?" "응 다음!" 대접에 면을 담고 국물만 부으면 끝. 그런 순덕이 누나의 라면...



라면을 먹을 때마다 놀라곤 했다. 

쉬는 시간 종이 울리면 매점 창구 앞에 기다랗게 줄부터 섰다. 내 차례가 되면 계란을 넣을 건지 말건지 물어보았다. 계란을 요구하면 생계란을 깨어 국물을 두어 번 번갈아 부어 반숙을 만들어 주었다. 계란을 넣지 않으면 면발에 국물을 부어 곧장 내주었다. 분명 라면인데 국수 같은 비법. 그것은 면을 미리 삶는 것이 포인트다. 마치 국수처럼 면을 미리 삶아 커다란 소쿠리에 담아 놓는다. 그러면 면이 식는다. 식어서 더 불지 않는다. 국물은 따로 펄펄 끓인다. 쉬는 시간이 임박하면 불을 붙인다. 학생들이 달려온다. 줄 서고 주문을 받으면, 대접에 면발을 한 움큼 넣고 국물을 붓는다. 그게 전부다. 그러면 학생들은 대접을 들고서 아무 데나 앉아 후루룩 먹는다. 고등학생의 먹성. 돌아서면 배고파. 폭발적인 흡입력. 세 젓가락이면 라면 한 그릇 뚝딱. 그러니 그 짧은 시간 속에 몇 백명의 식사가 가능해진 것이다. 주문하고 바로 받아먹는 라면의 맛이란 어딘가 국수 같은데 분명 라면의 맛이 나는 게 특유의 중독성이 있었다. 당시 컵라면도 유행했지만 컵라면은 외려 3분이라는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어서, 쉬는 시간이 아니라 점심이나 저녁 시간에만 팔렸다. 쉬는 시간은 10분이지만 점심 저녁시간은 한 시간 반 정도 여유가 있었다. 쉬는 시간에만 먹던 순덕이 누나의 라면.



어느 휴일. 

나는 집에서 그 라면을 해 먹으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 미리 면만 삶고 스프는 따로 물에 넣어 끓였다. 그리고 둘을 합쳐 보았다. 후루룩 먹으니 그 맛이 아니었다. 뭐가 잘못된 거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없었다. 분명 똑같이 만든 건데 왜 맛이 다르지? 궁금했다. 단지 학교가 아니어서? 그 짧은 틈새 쉬는 시간이 아니어서? 긴 줄을 기다려 받아 든 게 아니라서? 이상했다. 왜 그때 그 맛이 안 날까? 젓가락을 놓았다. 고등학생이 아니어서? 결국 라면 하나를 버리게 되었다. 



이후 그 라면을 먹어본 적이 없다. 

내 손으로 만들지도 못한다. 그런데 그때 라면의 맛은 특유의 중독성이 있었다. 라면을 생각하면 순덕이 누나가 떠오른다. 누나는 정말이지 너무나 뚱뚱했다. "누나 라면 좀 그만 먹어요. 라면을 너무 많이 먹으니 그렇게 살이 찌지요." 학생들은 줄 서 있는 동안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놀려댔다. 순덕이 누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연신 라면에 국물을 부었다. "누나 이 팔 두께 좀 봐. 우리 아빠보다 더 두꺼워요. 이거 전부 라면살이죠?" "순덕이 누나~ 우리 수업시간에 혼자 라면 먹고 있었죠? 다 알아요. 어휴, 오늘은 어제보다 더 쪘어~" 나는 누나의 얼굴을 살폈다. 누나의 눈썹 가장자리가 언뜻 씰룩이는 게 보였다.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옛다, 계란은 서비스야"라고 대접을 내밀었다. 더 이상 선을 넘지 말라는 신호였다. "누나 오늘따라 너무 예뻐요. 저도 계란 서비스 주세요." "안돼. 계란 넣으면 오백 원이야." "누나 삼백 원밖에 없는데 어떻게 안될까요?" "안될 것 없지. 오늘만 봐줄게. 자~ 여기 삼백 원어치 라면 받아라." 남고에 몇 없던 여성. 전교생이 1500여 명이 넘던 시절.



학생들은 줄 서 있다가 자기 차례가 대여섯 번째쯤 되면 미리 주문했다. 

"순덕이 누나 저는 라면만요. 계란은 넣지 마세요." "누나 저는 계란 두 개요. 배가 고파서요." "누나 저는 라면 곱빼기요." "누나 저는 누나 손이요." "내가 선 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아, 죄송해요. 라면 하나요. 저는 진심인데." "이게 콱 죽을라꼬." "누나 저도 누나 손 한번 만져봐도 돼요?" "아, 내 손은 자꾸 왜?" "너무 포동포동해서 먹고 싶어요." 순덕이 누나가 국자를 들고서 "엄마 오늘 장사 접어요" 그러면 학생들은 일제히 "순덕이 누나 죄송해요. 라면 먹고 싶어요. 한 번만 봐주세요"라고 외쳤다. "순덕이 누나 사랑해요." "순덕이 누나 계란 반숙이요." "순덕이 누나 살 좀 빼주세요." "순덕이 누나 사랑이 담긴 라면 한 그릇요." 



국수 같은 라면. 

라면은 라면인데 국수맛이 담긴 라면. 순덕이 누나가 부어주던 라면 국물. 면은 면대로 익어서 아직 스프를 만나지 못했다. 그저 하얗게 부푼 밀가루 면발일 뿐. 그래서 멸치육수를 부으면 국수가 되고 라면스프 국물을 부으면 라면이 될 터. 그 태생적 조리법이 다른데도 같은 조리로 탄생한다. 하얀 면발은 대접에서 국물을 만나 그제야 라면이 된다. 아아~내가 라면이었구나. 국수인 줄 알았건만. 그래 라면이 될 운명이었어. 국물과 만났으나 더 이상의 가열은 없다. 끓지도 못한다. 부어져서 자리에 앉기 전까지 그 틈새가 다다. 그 짧은 시간 속에서 면발은 라면스프와 한 몸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너무 짧은 시간. 채 하나가 되지 못한 맛. 학생들은 후루룩 면발을 입에 넣고 대접을 들어 국물 한 모금 마시고서야 비로소 라면임을 체감한다. 아아~내가 지금 라면을 먹는 거구나. 국수인 줄 알았잖아요. 면발에 라면맛이 담기지 못해 비릿하지만 국물을 먹고서야 라면임을 깨닫는 시간. 딱 10분이다. 종 치고 달려가 줄 서고 순덕이 누나랑 인사하고 자리에 앉아 후루룩 삼키고 교실로 돌아올 때까지의 시간. 그 속에 순덕이 누나 특유의 중독성 있는 맛을 보고 온다. 


나는 라면 먹을 때마다 그리고 국수 먹을 때마다 그리워한다. 

주머니에 오백 원짜리가 있어도 이제는 사 먹을 곳이 없다. 순덕이 누나도 잊고 산지 오래다. 이따금 비봉산 등산을 하다가 고등학교 옆을 지날 때면 떠오르는 맛. 생각나는 사람. 먹고 싶은 라면. 어린 시절이 단박에 다가온다. 쉬는 시간 종소리가 울리면 달려가 줄 서고 싶은 저곳. 


아아~순덕이 누나 잘 지내고 있나요? 저, 라면 하나 주세요. 계란 하나 넣어서요. 계란은 반만 익혀 주세요. 여기 오백 원요...






순덕이 누나의 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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