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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피 Aug 05. 2022

신체나이 30년 전으로

몸만 젊어지게 해 주세요





파뿌리 노부부가 어린 시절 영상을 본다




옛 사진과 영상이 담긴 하드를 찾았다. 

티브이에 연결해 젊을 적 사진과 영상을 보다가 "저 때 당신 꽤나 예뻤지"라고 말했다. "당신도 저때는 젊었었구려"라며 아내가 응답했다. "아아 저 시절로 돌아갔으면..." 하고 내가 말하니 "부질없는 소리"라는 응답이 들려왔다. 그리고 조용하다. 문득 아내가 내 옆모습과 티브이 화면을 번갈아 본다. 그러더니 이내 "쯧쯧" 하는 소리가 들린다. 순간 밀려오는 감정이란... 그저 혀만 쯧쯧 찼을 뿐인데 왠지 모를 혐오감과 패배감이 밀려온다. 이것은 말 그대로 자격지심일까? 뭔가 항변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지금 뭐하는 짓이야? 하고 소리치고 싶지만 그러지도 못한다. 그러면 인정하게 되는 거니까, 그리고 처참해지니까. 


아아 티브이 화면 속 내가 너무나 젊구나. 젊고 싱싱한 얼굴로 딸아이를 업고 있다. 젊고 싱싱한 얼굴로 딸아이 손을 잡고 있다. 그에 반해 지금은 어떤가? 아내 눈에 비친 내 얼굴은? 늙고 추레하여 볼품이라고는 없는 얼굴. 피부는 처지고 군데군데 잡티가 번져나 진해져서는 어디가 눈이고 어디가 점인지 분간되지 않는다. 어디가 입이고 어디가 주름이고 어디가 턱인지 목인지 살펴보면 살펴볼수록 애처롭기만 하다. "에구, 당신도 늙었구려." 아내가 내게 말한다. 돌아보니 애처로운 눈빛 가득 애처롭게 바라본다. 제발 애처롭게 보지 마, 라고 대꾸하고 싶지만 차마 그러지 못한다. 얼마 전까지는, 이까짓 주름! 찬물로 세수 몇 차례 깨끗하게 하면 쫙쫙 펴질 거라고! 라고 생각했었다. 찬물로 아무리 세수해도 거울 속 비친 내 얼굴 주름은 펴지지 않았다. 목욕탕 냉탕에 아무리 잠수해도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리 박박 씻어도 검은깨 잡티 기미 정체를 알 수 없는 얼룩 등은 지워지지 않았다. 어느새 나는 애처로운 얼굴이 되어버렸다. 그래, 그렇게 말하는 당신! 당신도 많이 늙었구려, 라고 나는 감히 말하지 못한다. 다만 마음속으로 피차 애처롭기는 마찬가질세, 라고 읊조릴 뿐이다. "당신 방금 날 쳐다보는 눈빛이 뭔가 불량스러워!"라고 아내가 말하기에 퍼뜩 시선을 티브이로 돌렸다. 



혼자 캠퍼스 길을 꾸역꾸역 걸을 때였다. 

세상에 싱그러운 기운은 여기다 모였구나, 하면서 초록 내음을 맡고 있었다. 그러던 중 엄청나게 큰 나무 한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나무님! 오랜만입니다 하고 속으로 인사했다. 나무님은 제가 어렸을 적부터 저를 봐오셨지요 하고 슬며시 말을 걸어보았다. 맞잖아요? 제가 스무 살에 대학에 입학했으니 저 스무 살 적 얼굴을 생생히 기억하시겠지요? 그렇죠? 그런데 있잖아요, 어느새 제가 이렇게 늙어버렸답니다. 나무님이 보시기에는 "그게 뭐 대단한 일이야?"라고 대수롭지 않게 치부하실 수 있겠지만 저에게는 큰 문제입니다. 이왕 이렇게 나무님과 대화를 트게 되었으니 소원 하나 말해도 될까요? 꼭 들어주시지 않아도 되지만 부디 저를 어여삐 여겨 들어주세요. 내가 애처로운 눈으로 나무를 올려다보니 나무님은 대뜸 그러라 했다. "나무님이 저를 처음 보았을 적 저의 얼굴, 그 얼굴로 돌아가게 해 주세요." 지금 제 말 들리시죠? 속으로 말할게요. 그러니까 지금 저의 정신상태는 그대로 둔 채 신체만 그 시절로 돌아가게 해 주세요. 분명히 해야 돼요. 제가 기억하고 생각하는 상태까지 그 시절로 바꾸시면 안 됩니다. 다시 철부지 정신으로 돌아가면 안 되거든요. 이놈의 철딱서니 때문에 고생 많이 했거든요. 딱 제 몸만 삼십여 년 전으로 돌아가게 해 주세요. 대신 원래 정해져 있는 제 수명은 그대로 두시고요. 몸이 삼십여 년 젊어졌다고 수명까지 그만큼 늘어나면 그건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제가 욕심쟁이는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수명은 그대로 두고요. 저는 젊은 얼굴로 나이 숫자만 먹다가 꼴까닥 하면 되니까요. 

아, 그런데 동사무소 직원이 나이와 얼굴이 매치가 안된다고 따지면 어떡하지? 이거 큰 문젠데? 내가 특별히 슈퍼 동안이라고 막 우길 수도 없고, 어쩐다? 주민등록증 만들 때나 가정조사를 한다거나 관공서에서 조사를 나온다면 큰일인데?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아아, 아무튼 이건 제가 알아서 숨어 산다거나 해결할 터이니 나무님은 그저 제 몸만 젊게 해 주세요. 

자, 그러면 나는 지금 다니는 직장보다는(얼굴이 젊어졌다고 놀랄 터이니) 아무래도 사업을 해야 할 텐데, 젊어졌으니까 나이에 관계없는 일 말이야. 체력도 강해서 밤새 잠을 안자도 멀쩡하지 않겠어? 1인 3역을 할 수 있는 사업이 어울리겠어. 그리고 젊어진 만큼 기운도 좋을 텐데 어쩐다? 아이를 더 낳아야 하나? 몇이나 더 나을까? 셋 정도는 나아서 기를 수 있지 않겠어? 제까짓 것들이 울어재껴 봐야 24시간 울겠어? 스무 살 창창한 기운으로 다 커버하면 되지 않겠냐 말이야. 한 살이라도 어릴 때 키워놓아야지. 근데 아내는 어떡하지? 지금 아내를 계속 만나야 할까? 아니면 다른 여자를?


퍽!!

별안간 베개가 날아와 내 가슴팍에 꽂혔다. 동시에 눈을 떴고 고개를 들었다. "빨리 설거지 안 하고 뭐해? 아까부터 하라는 말 못 들었어? 얼른 설거지하고 음식쓰레기 버리고 와! 냄새나서 못살겠어 정말!" 아내의 외마디가 들렸다. 나는 잠이 들었고 옛 교정을 헤매다 나무님과 대화했을 뿐인데, 어리둥절하는 와중에 딸아이가 저벅저벅 다가와 리모컨을 든다. 그러더니 팍!! 티브이를 끄고 말한다. "아빠! 또 옛날 영상 보고 있어요? 제가 저 있는데서 보지 말랬죠?" 옛 교정에서는 아주 잠시 딸아이와 비슷한 또래로 함께 늙어가야지 하는 바람도 있었다.


나는 엄청난 고민에서 말끔히 해방되어 룰루랄라 설거지를 한다. 설거지를 하고 음식쓰레기를 버리러 밖으로 나간다. 바람이 분다. 머리가 해맑다. 한참 고민에 빠졌었는데 이토록 평화로운 현실이라니. 참으로 감사한 아내와 딸아이다.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야지. 다음에 캠퍼스에 놀러 가더라도 그 오래된 나무님은 가급적 피해 다녀야겠다. 



가을의 밤하늘


딸아이가 그려준 그림이다.

제목을 물어보니 '가을의 밤하늘' 이란다. 

곧 가을이 오겠지?

어젯밤에는 열대야까지 있어서 눅눅한 습기에 잠도 잘 못 잔 거 같은데, 가을이라는 말을 듣고 달력을 보니 정말 얼마 남지도 않았다. 늘 광복절 아침이면 찬바람이 불었는데, 그럴 때면 벌써 가을이 왔어? 가을 준비를 아무것도 못했는데? 하며 덜컥 가슴이 내려앉고는 했는데. 무슨 준비? 월동 준비? 입대할 준비?(군입대를 가을에 함) 개학해서 학교에 얼굴 내비칠 준비?(새까매진 얼굴을 하얗게, 그리고 나름의 다이어트 같은)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기 위한 준비?(가을이면 괜스레 가슴이 뛴다는) 졸업 준비? 연말 준비? 크리스마스 준비? 생일? 근래에는 추석 준비? 보험료 납부나 각종 돈 들어갈 곳 같은 걸 떠올리니 덜컥 가슴이 내려앉고는 한다.


어쩌면 말이다. 한 삼십 년 뒤에는 또다시 삼십 년 전을 그리워하는 노인네가 옛 영상을 보면서 지금의 일상을 그리워할지도... 그러고 보니 이런 생각을 예전 어릴 적에도 한 거 같다. 돌아보고 그리워하고 돌아보고 그리워하는 지금을 다시 돌아보고 그리워하는... 그것이 바로 나의 퇴폐로운 망상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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