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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피 Aug 08. 2022

벗어놓은 신발 모양 그대로

어쩌면 벗어놓은 신발에 아직 신고 있는 것처럼 제어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파랑 신은 가지런하지만 주황 신과 핑크 신은 짝이 뒤집혀 있다




주황 신과 핑크 신을 주섬주섬 바로 놓는다




벗어놓은 신발에 그대로 사람이 들어가 있는 형국. 

신발이 가지런하면 가지런한 모양새 그대로 서 있으면 되니 괜찮다. 한데 신발 한 짝이 반대로 놓여 있으면 그 반대로 놓인 모양 따라 사람 다리도 반대로 뒤틀려 들어가게 되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이뤄질 수 없는 자세가 된다. 이뤄질 수 없는 자세의 향연. 이뤄질 수 없는 모양새로 덩그러니 놓인 시간. 그러니 뒤틀리는 만큼 뭔가 어긋난 형태의 기가 흐를 것이고 어그러진 영향을 받아 신발을 벗고 맨발이든 양말이든 집안에서 편히 쉬고 있다 할지라도 그 영향을 아니 받는다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방금 전까지 신던 신발. 

그 신발은 생각한다. 주인님께서는 늘 바른 자세로 저를 신고 다니잖아요. 앞코는 앞쪽에 뒷 코는 뒤꿈치에, 앞코는 당연 앞을 향하고 뒷 코는 뒤를 박차며 가잖아요. 그런데 신발을 벗을 때 후다닥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고 가시면 저는 벗어던진 그 형태 그대로 마냥 기다리게 된답니다. 기다리는 동안에 주인님을 생각하지요. 아아 주인님은 언제 오실까? 주인님은 왜 안 오시나? 주인님은 무얼 하길래? 내가 맘에 안 드시나? 그러다 깜빡 잠들었다가 앗! 주인님과 내가 함께인가? 벌써 함께 걷는 건가? 헷갈릴 때가 있답니다. 언제 어느 때 주인님이 제게 돌아올지 모르니까요. 항상 비상 대기한답니다. 대기할 때도 제 얼굴에는 늘 주인님의 발 냄새, 체온, 땀이 배어있지요. 그런데 그것만 있을까요? 더 있답니다. 주인님이 걸을 때의 의지, 생각, 자세, 고뇌, 인생이 모두 담겨있답니다. 저를 신을 때 주인님께서 어떤 길을 가는지,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지가 다 보인답니다. 모르셨지요? 저는 주인님의 전부를 느낀답니다. 제가 운동화면 운동화를 신어도 되는 인생이고요. 제가 컨버스화면 컨버스화를 신어도 되는 때고, 구두면 구두를 신어야 하는 신분이고, 슬리퍼면 슬리퍼를 신어도 되는 삶이지요. 각기 다른 인생이지만 지금 당신의 여정, 생사를 나타내는 게 바로 저 신발이라고 이연사 감히 단정 지어 말할 수 있답니다. 그런 저이기에 하물며 당신이 저를 벗어놓았다고 해도, 잠시 떨어져 있다 해도 우리가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랍니다. 단순히 벗은 것만으로 설마 저의 속박에서 벗어났다 여기시는 건가요? 물론 아니죠, 아니랍니다. 제가 현관에 존재하는 한, 신발장 어디 한 구석에 처 박히지 않는 한, 당신은 언제든 저를 찾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저는 당신이 잠시간 저를 벗어난 시간에도 여전히 당신을 생각하며 당신의 일부로써 당신의 길을 기다린답니다. 


나는 벗어놓은 신발에 그대로 서 있는 또 다른 자아를 상상하곤 한다. 

하늘에서 형벌을 내리길 "네 놈이 벗어놓은 신발 모양새 그대로 발만 쏙 집어넣어 서 있도록 할 테다!"라고 말할 것 같다. 내가 벗어놓은 신발에 너무 큰 의미를 두는 게 아니냐고 항변하면 "아니 이 놈이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고!"라는 호통이 이어질 것 같다. 그렇게 보자면 벗어놓은 옷이나 모자나 허리띠에도 구속됩니까? 하는 질문이 형평상 나올 수도 있지만, 일단 옷은 세탁기에 들어가 버리면 나름 주인님과 '다음에 또 만나요'라는 의식을 치른 것이고, 모자는 아무 데나 걸어도 형태가 크게 변하지 않고, 허리띠도 뭐 요새는 스판바지를 자주 입어서 그런지 잘 차지 않으니 터부시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문제는 신발이다. 현관에서 기다리는 신발. 벗어놓은 신발에 그대로 들어가기. 신발을 인위적으로 움직이면 반칙이다. 벗어놓은 위치 그대로 어떻게든 발을 맞춰 넣어야 한다. 한쪽 신발이 저 멀리 나가떨어져 있으면 다리를 쫙 찢어서 발을 넣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힘이 들 것이다. 한쪽 신발이 앞뒤가 반대로 있으면 다리를 앞뒤로 비틀어 발을 넣어야 한다. 한쪽이 만일 위아래가 뒤집혀 있다면 정말이지 난감하다. 아무리 비틀어도 발은 들어가지 못한다. 땅을 파 들어가 거꾸로 지하에서 지상으로 발을 내밀어 신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가랑이가 온전히 남아날까? 두려운 형벌이 아닐 수 없다. 


신발이 놓인 형태가 어쩌면 그 이의 평안을 좌우하는지도 모른다. 어느새 그런 생각이 자리 잡았다. 그래서 나는 현관에 들어설 때마다 아내의 신발을 가지런히 놓고 딸아이의 신발을 바로 놓는다. 이따금 귀차니즘이 발동할 때면 발로 툭툭 이 정도면 다리가 아프지 않게 바로 설 수 있겠지, 가랑이가 붙어있을 수 있겠지 하는 정도로 맞춰 놓는다. 벗어놓은 신발의 빈 공간에는 보이지 않는 육체가 들어가 서 있다. 보이지 않는 육체는 그 사람의 잔상이다. 잔상은 신발과 함께 자리에서 기다린다. 기다리며 주인의 안위를 보존한다. 아직 주인이 살아있음이오. 주인이 살아있으니 내가 현관에 존재함이오. 그러니 주인이 곧 나요, 내가 곧 주인이로다. 보이지 않는 육체는 진짜 육체가 들어와 신을 때 비로소 완전체가 된다. 마침내 완전체가 된 신발이 주인과 함께 신나는 일상을 같이 하니, 어째 주인을 모를 것이며, 어째 주인의 입맛을 모를 것인가. 세상 그 어떤 개체보다 주인과 혼연일체 하는 비중이 높지 않겠는가. 주인님의 냄새, 체온, 땀은 신발을 살아있게 한다.


운전할 때도 주인의 의식을 전달받아 그대로 액셀과 브레이크를 조정한다. 이만큼 가고 저만큼 선다. 가고 서고를 전부 자신이 맡아하니, 그만큼 주인의 의식을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 


밤새 신발이 가지런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놓인 시간이 길면, 아침에 그 신발을 집어다 바로 신는다 하더라도 간밤의 뒤틀림은 어떻게든 나타나기 마련이다. 잘 걷다가 앗! 헛디뎌 넘어지거나 미끄러질 수도 있다. 혹은 액셀을 잘못 밟아 큰 사고가 날지도 모른다. 어긋난 시간이 오래도록 이어지면 어긋난 기운이 가득 배여 신발에 악영향을 미친다. 잘못된 형태를 잔상으로 기억하여 마치 형상기억 합금처럼 잘못을 재연하게 될지도 모른다. 앞뒤로 위아래로 벗어놓은 신발. 잘못 벗어놓은 모양대로 주인을 신겨서 달리려는 신발. 아아 이놈의 강박, 퇴폐로운 망령이여. 


그러함에 나는 오늘도 현관에서 천근만근 몸을 수그려 신발 모양새를 가지런히 잡는다. 쪼그려 앉아 말한다. 신발이여, 잠시나마 쉬도록 하라. 오늘도 고생 많았노라. 편히 쉬다가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그리고 신발아~ 여름이고 하니 쉿! 내 야박하다고 그러지 않으마. 저기 주인님의 냄새를 너무 오래 머금고 있지는 말거라.  







내가 아내와 딸아이의 신발을 내려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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