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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피 Nov 30. 2021

내내 저녁 같아 비 내리는 거리

아침이어도 저녁처럼 보인다. 한낮이라도 저녁처럼 보인다. 저녁이 되면



비 내린다.


이제 봄이 아니고 여름이 아니고 가을이 아니고 겨울이라고 해야 하나. 11월의 마지막 날 가을 겨울이 섞인 비가 내린다. 오늘 비는 마치 여름 비처럼 제법 많이 내린다. 우산 쓰고 걷는데 길 곳곳에 물 웅덩이가 가로막는다. 어딜 밟아야 할지 아래를 내려다보기 바쁘다. 여기 여기 골라 걷는데 그만 철벅! 웅덩이에 운동화가 들어가 버렸다. 웅덩이는 작다. 작아도 웅덩이다. 운동화가 놀라 퍼뜩 발을 떼었다. 물이 튀어 운동화 머리까지 젖었다. 지금껏 내려다본 보람이 없네. 이제 고개 들어 앞을 보며 걷는다. 상쾌하다. 수많은 웅덩이에 빠진다. 차츰 운동화 안쪽이 젖어오기 시작한다. 아아 얼마큼 젖었을까. 양말까지 침투했을까. 혹시나 싶어 운동화를 벗어 만지니 엄지발가락이 젖었다. 간당간당한 타이밍. 이이상 물기가 들어오면 되돌릴 수 없다. 냄새가 베일 터다. 한번 젖은 운동화는 자연 건조가 되더라도 특유의 냄새를 피할 수 없다. 비 온 날 신은 운동화는 반드시 세탁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집은 운동화 빨 사람이 없다. 몇 켤레를 모아 동네 세탁소에 맡기는 게 관례다. 운동화 하나가 젖었다고 해서 하나만 달랑 들고 가 맡기지 않는다. 최소 두 켤레 이상은 되어야 한다. 한 켤레는 이미 강을 건너버렸다. 나머지 한 켤레가 젖을 때까지 지금 운동화는 신발장 저 위쪽이라든지 차 트렁크에서 기다려야 한다. 어쩌면 다음번 비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기다리는 운동화를 볼 때마다 대체 어느 정도의 냄새를 배출하고 있을까 하고 상상해본다. 얼른 세탁소에 가져다줘야 하는데 하면서 묵은 마음으로 지켜보고 참고 지켜본다. 아무렴 오래 기다리기 힘들다. 비만 오면 그러한 고행이 뒤따른다. 되도록 운동화가 젖지 않게 걸으려 애쓰지만 지금처럼 이미 젖었고 길거 한복판이라면 그리고 에라 모르겠다 하면 비로소 앞을 보고 걸을 수 있게 된다. 세상을 보며 걸을 수 있다. 나는 비 오는 거리를 보지만 빗물 너머 저쪽 사람들은 나를 보지 못한다. 내가 잘 보이지 않으니 그들도 잘 보이지 않을 거라 여긴다. 그러면 마음이 편하다. 편한 시선으로 그제야 당신을 본다. 그동안 너무 눈부셔서 바라보지 못했어요 하는 생각이 든다. 왜 이제야 고개 들어 당신을 보나 하는 자책도 든다.   



비 내리는 거리는 대개 어둡다.


아침이어도 저녁처럼 보인다. 한낮이라도 저녁처럼 보인다. 저녁이 되면 꿈결처럼 보인다.

밝은 아침, 밝은 오후, 환상 같은 저녁. 이제 곧 해질 거야. 어두워지겠지. 어둠이 내리기 전 어두컴컴한 색상. 짙은 파랑, 짙은 바닷속. 하루 종일 그 색상이 지속된다. 잠깐만 볼 수 있는 짙은 명도 채도를 온종일 보는 것이다. 그래서 비 내리는 날은 아침도 저녁, 낮에도 저녁, 저녁도 보다 저녁다운 저녁처럼 보인다. 아침을 먹어도 저녁 같은 맛이고 점심을 먹어도 저녁 같은 맛이 난다. 저녁에 저녁을 먹으면 역시 저녁다운 저녁밥 맛이 난다. 하루 종일 저녁을 보고 저녁을 먹고 저녁을 걸으니 비 내리는 날은 곧 저녁이라 할 수 있다. 온전히 저녁을 누리는 하루다.


운동 뒤 땀을 잔뜩 흘려 얇은 티에 반바지가 꿉꿉하다. 가을 겨울이잖아. 급한 대로 패딩을 걸치고 엘리베이터를 내려 거리로 나가보니 어라? 비가 많이 안 오네? 싶어 우산도 없이 자박자박 걸어서 집으로 간다. 비를 맞고 간다. 이슬비니까 괜찮아. 밤이니까 괜찮아. 가까우니 괜찮아. 어차피 땀도 흘렸고 집에 가자마자 샤워할 거잖아. 입은 옷은 전부 벗어내 세탁기에 넣을 거고, 그러니 걸어가자. 비 맞는 청량감도 느낄 겸 해서 나는 걸어가기로 하고 걸어간다. 되도록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 인적이 없는 길로 돌아서 간다. 평일 밤 비 오는데 우산 없이 걸어가는 얼굴을 보이기 싫은 마음. 나는 어둠을 찾아간다. 어둠과 어둠이 연결된 길을 따라 걷는다. 그곳으로 들어가 세상에 없는 듯 걷는다. 비 맞으며 간다. 얼마만의 감촉인가. 비가 얼굴에 일직선으로 닿는 느낌. 눈꺼풀은 비를 맞을 때마다 감기고 젖어서 손등으로 훔치게 된다.

저 앞에 우산 쓴 인파가 보인다. 우산 쓴 인파힐끔 쳐다본다. 시선이 마주친다. 이상해요? 바로 저기가 우리 집이라고 속으로 말해본다. 그래도 이상한 사람이 된다. 우산 없는 사람이 우산 쓴 인파를 피해 걷는다.


마침내 집에 도착했다. 운동화를 신발장 저 위칸에 올려다 둔다. 훌러덩 껍질을 벗어 욕실로 들어간다. 샤워기 앞에 서서 샤워기를 튼다. 처음 몇 초간 차가운 물이 나온다. 그럴 줄 알았어. 괜찮아 이미 많이 맞아서. 이윽고 따뜻한 물이 나온다. 피부에 한기가 움츠러든다. 버틴다. 파고든다. 쏴아아 따뜻한 물이 계속 피부 속을 두드린다. 언제까지 숨을 거니? 버티던 한기는 참지 못하고 밖으로 토해져 나온다 그리고 곧장 미끄러진다. 피부를 따라 발끝으로 흘러내려 배수구로 사라진다.

주방에 가 뜨끈뜨끈 토스트를 구워 따뜻한 물과 먹는다. 그래 이 맛을 위해 비 오는 날 비 맞으러 나간지도 모르지.


어쩌면 세탁소에 맡기기 위해 나머지 한 켤레 운동화를 신고 나가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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