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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피 Jun 04. 2021

도서관 벤치 공부하던 한때

졸업하고 나서 드나든 도서관 열람실 그 앞 소나무에게



소나무 아래서 담배 피웠다.



토요일 아침. 서둘러 17동 열람실(대학 교양동 도서관)에 들어가 빈자리에 가방을 두고 휴게실 자판기로 가 이백 원짜리 믹스커피를 내렸다. 그리고 열람실 안마당에 나가 소나무 앞 벤치에 종이컵을 내려두고 담배를 꺼내 불 붙였다. 소나무를 보면서 첫 연기를 후우 내뿜었다. 담배 맛이 어땠을까. 하얀 연기는 뽀얗게 두둥실 떠올라 소나무 가지 뒤에 이르러 투명해졌다. 하늘과 스르륵 동체가 되었다. 가슴 깊이 빨아들여서 후우 끝까지 내뱉고 연기는 하얗게 흰 것만 좇다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나는 종이컵에 달콤한 믹스커피 한 모금 쪼르륵 마시고 연달아 담배를 입에 가져가 쭉 빨고 후우 뱉었다. 연기는 사라지고 사라졌다. 이 맛이다. 이 맛이야. 이제야 잠깐 한숨 돌린다.


아침에 일어나 처자식을 향해 나 바쁘니까 오늘 하루는 자기 알아서 보내 미안해. 아빠 어디 좀 가니까 엄마 말씀 잘 듣고 놀아. 그렇게 등 뒤 처자식의 찌릿한 시선을 물리치고 열람실에 자리잡기까지의 과정. 불편한 마음. 소나무의 구부러진 가지 하나가 눈앞에서 말했다. 오늘도 일찍 나왔구나. 주말이니까 하루 종일 공부할 수 있지? 열심히 하렴. 그 말에 나는 답했다. 네 열심히 할게요. 공부할 시간이 없으니 주말에 정말 책 많이 봐야 해요. 토일이 아니면 주중에는 일하느라 시간 낼 수 없으니까요. 나는 구부러진 소나무 가지를 올려다보며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그리고 말했다. 근데 제 얼굴 정말 오래도록 지긋지긋하게 만나지요? 스무 살 적 여기 대학에 오고부터 근 이십 년. 이십 년 전 제가 다르고 이십 년 후 지금이 다른데 당신은 저의 전과 후를 다 보고 계세요. 소나무 가지는 내게 답했다. 그래 정말 징글징글 하구나. 그만 좀 오너라. 지겹다 지겨워. 넌 왜 이렇게 공부를 오래 하니? 공부 좀 그만해. 이십 년 동안 줄곧 공부했으면 박사 교수까지 되었겠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사느라 아직도 이 모양 이 꼴이니? 나는 고개 숙였다. 답 없이 담배연기만 두어 차례 내뿜었다. 믹스커피를 한 모금 홀짝이자 쓰라린 입안이 금세 부드러워졌다. 언제든 웃을 수 있는데 늘 긴장으로 뒤덮인 표정이란. 단절된 일상. 단절된 미소. 오늘따라 날씨도 좋은데. 나는 찬찬히 말했다. 그러게요. 제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정작 학생 때는 공부도 안 했으면서. 졸업하고부터 공부를 놓지 못하네요. 취업하고 회사 다니고 적성에 안 맞아 퇴사하고 사업하다 말아먹고 또 취업하고 회사 다니고 나이만 먹어 자격증이다 시험이다 뒤늦게 악다구니만 쓰고.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담배를 피웠다. 커피도 한 모금. 겨우 말을 이었다. 당장 오늘도 여유가 없어서 이렇게 푸념만 늘어놓네요. 저기 있잖아요. 소나무님. 저 한 번만 도와주세요. 나는 무작정 소나무를 향해 읍소했다. 나를 지켜봤으니 오랜 시간 지켜봤으니 그 정도 부탁은 해도 되지 않느냐 하는 마음이었다. 한 번만 도와주시면 이담에 언제라도 인사하러 올게요. 소나무님 부디 부탁합니다. 그동안 든 정을 생각해서요. 당신은 여기서 아주 오랫동안 자리한 영물 같은 존재. 제발 한 번만. 나중에 좋은 얼굴로 찾아올게요. 커피 한잔하러 잊지 않고 올게요. 담배 피우러 올게요. 잘 사는 모습 보여드릴게요.

 



대학교 교양동 열람실.


이 곳 대학교에는 큰 도서관 건물이 도서관이라는 이름으로 떡하니 가운데에 위치한다. 도서관에는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다. 가려면 뭔가를 신청하고 허가받아야 한다. 도서관에는 당장 재학생만 들어갈 수 있다. 재학생도 출입증이 있어야 들어간다. 학교에는 그 외 작은 도서관으로 열람실이 여럿 있다. 각 단과대에 열람실이 부속되어 있는데 교양동에도 열람실이 있다. 교양동은 캠퍼스 전체에서 봤을 때 남쪽 구석에 자리한다. 다른 곳과 다르게 17동 교양동 열람실은 일반인에게 개방되어 이십 대부터 사오십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출입한다. 열람실 책상에는 공인중개사 책부터 전기기사, 토목기사, 토익, 공무원, 기타 자격증까지. 때로는 공인중개사를 공부하는 아빠와 한자 급수를 준비하는 초등학생 아들이 나란히 앉아 공부한다. 대개 다른 열람실에 비해 연령층이 높다. 저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생 아닌 신분으로 캠퍼스를 찾아 늦게나마 공부에 정진하게 되었다. 17동 열람실은 그들을 위해 주야장천 불 켜주고 문 연다. 당시 열람실에는 대학생보다 일반인이 많았다. 열람실에서 공부하던 이들은 열람실 마당 앞 소나무 옆 벤치에 앉아 이야기 나누고 커피 마셨다. 가로등 켜진 밤까지 그들은 소나무 앞에서 담배 피우며 하소연하고 머리 식히곤 했다.


학생이었던 학생은 공부를 하지 않고 학생 아닌 졸업생은 재학생이 아니게 되자 그제야 공부를 한다. 졸업생. 졸업하고부터 아무도 내게 졸업생이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그러니 졸업생이라는 신분은 이 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사람과도 별 차이가 없던 게 분명하다. 이를테면 타 학교를 졸업한 이와도 같은 급. 학교와 아무 연관도 없으면서 한줄기 연관이 남은 줄로 알았다. 졸업생이 졸업했으면서도 저 혼자 나름 지분이 있다고 열람실 정도는 이용해도 된다고 주장했는지도 모른다. 대학 입장에서는 환영하지 않는 부류로 다만 막지 않을 뿐이다. 졸업생은 딱히 학교가 막지 않으니 처음엔 눈치 보다가 막상 책상 앞에 자리 잡고 공부하는 동안 어느새 공부하는 사람이 되어 학생으로서 차츰 자긍심을 가지고 당당해진다. 심지어 4년간 등록금 낸 값어치를 이제야 보상받는구나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학교는 '좌석 예약 시스템'을 들여와 외부인을 막기 시작했다. 여기서 외부인이란 학생이나 교직원 아닌 이를 가리키는데 돌연 외부인의 신분이 된 졸업생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책상 앞에서 공부하다가도 저 여기 예약했는데요, 라는 학생이 나타나면 일어나 비워줘야 했다. 이렇게 학교가 여기 오지 마라, 들어와서 공부하지 마라, 라고 말하자 비로소 현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공부하게 되었다. 공부를 하고 싶어서 찾아오게 되었다. 나는 메뚜기(자리 이동)가 되어 자리를 이동하며 공부했다. 공부를 하고자 하는 의지가 컸으나 그만큼 새로 생겨난 주변여건과 부딪치며 여러 상념도 함께 커져서 집중하는 텀이 짧았다. 회사 걱정 업무 걱정 가족 걱정 공부 걱정 미래 걱정. 상념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담배 피우러 나갔다. 담배 하나 피우고 해야지. 처자식은 집에서 나를 기다리는데 나는 집에 가지 못했다. 정작 집에 가지는 못하고 책상 앞에 버티는 시간마저 짧아져 오갈 데 없는 시간. 어떡해야 하나. 괜스레 소나무 앞에서 우리가 얼굴 익힌지도 벌써 이십여 년이지 않나 라고 혼자 말 걸어 본다.


한번 시작된 부탁은 연일 계속되었다. 나는 벤치 앞에서 담배 피우며 소나무 가지를 향해 말했다. 한 번만 도와주세요. 스무 살의 내가 당신 앞에서 패기 있게 담배를 피웠고 마흔 살의 내가 당신 앞에서 패기 없게 담배 피우잖아요. 당신의 구부러진 모습은 여전한데. 제가 안쓰럽지도 않으세요? 집중이 잘 안돼요. 한 번 만이요. 정말 간절히. 사는 게 여의치 않아서. 정말 이번이 마지막 기회가 될 것 같아서.




산에 가야지


이번 주말에는 산에 한번 가야지 라고 생각하던 차였다. 눈 떴다. 일요일 아침이다.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세수하고 등산복을 꺼내 입었다. 선크림도 바르고 모자를 썼다. 지금이 아니면 갈 수 없다고 생각되어 무작정 산에 다녀온다고 말하고 집을 나섰다. 당신 어디가? 갑자기? 아빠 어디 가요? 라는 처자식을 두고 기어이 등산화를 신었다. 모처럼 일요일 하루만이라도 산에 가고 싶다고 말하고 나왔다. 대문을 닫기 전 들으니 처자식은 각자 친구 만나러 간다며 상관없다고 했다.


차 타고 갔다. 어디로 갈까. 가까운 데로 가고 싶었다. 가깝지만 가보지 못한 곳이 떠올랐다. 대학교 정문 옆 무료주차장에 주차했다. 학교에서 곧장 이어진 등산로로 가기 위함이었다. 등산로로 향하다가 문득 17동 열람실이 떠올랐다. 선뜻 오른쪽으로 고개 돌리니 멀리 붉은 벽돌의 열람실이 보였다. 곧바로 가면 등산로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열람실이다. 열람실로 가려면 굳이 돌아가야 하는 수고가 필요하다. 가볼까? 에이 뭐 귀찮게 산에 빨리 가자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몇 걸음 가다가 한번 가보기로 했다. 오랜만이다. 나는 왜 여기 찾아 오고자 했던 것을 잊어버렸을까. 따져보니 믹스커피와 담배를 끊었기 때문이다. 믹스커피와 담배 피우기 적당한 곳인데 믹스커피와 담배를 끊었으니 가 볼 일이 없어진 것이다.


나는 17동 열람실로 다가가 자판기에서 밀키스를 뽑아 들고 마당 앞 구부러진 소나무를 찾았다. 소나무 옆 벤치를 보았다. 캔 뚜껑을 따 벤치에 놓았다. 그리고 구부러진 가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 왔어요. 오랜만이죠? 진작에 왔어야 했는데 조금 늦었어요. 제가 지금 몇 살이냐고요? 제가 스무 살 적부터 당신이 나를 보고 제가 당신을 봐 왔으니 정말 긴 세월입니다. 그냥 당신이 보고 싶어서 왔어요. 실은 산에 가는 길 도중에 들렀어요. 그렇지만 이렇게 마주 보니 가까이 보니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어요.


나는 예전에 멀찍이서 그 소나무를 향해 두 손 모아 인사를 한 적이 있다. 고맙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고개 숙였다. 감사한 마음이 들고부터 이처럼 가까이 와서 소나무 가지를 직접 마주한 적이 없었다. 담배 연기가 투명해지던 가지가 손에 닿았다. 당신을 만나 보고 있자니 그날이 생각납니다. 간절하던 나날. 힘들었던 날들. 갈팡질팡 갈등하던 기억. 정다운 느낌. 어렸을 적 지나간 시절이 떠올라 아련한 마음. 졸업하고 방황하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믹스커피와 담배가 없어도 나는 느낄 수 있다. 말할 수 있다. 대화 나눌 수 있다.


늘 그랬다. 

쉬운 날은 하루도 없었다. 지친 어느 날. 나는 일요일 아침 산에 갈 예정이다. 산에 가는 길  중간에 들러 소나무를 보고 갈 생각이다.






PS

소나무 오른쪽에도 벤치가 있었는데 없어졌다.
올려다보면 담배연기처럼 구불구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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