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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피 Jun 02. 2021

미용실에서 커트하는 낭만과 평화

그 미용실이 마음에 드는 이유, 머리 만져 주는 손길



사각사각


머리 깎는 소리. 찰칵찰칵 가위소리 들린다. 미용사손가락 사이 사뿐사뿐 머리칼을 잡아 찰칵찰칵 자른다. 잘릴 때 머리카락은 귓가에서 사각사각 소리를 낸다. 이어서 새 머리칼을 잡아 손가락 한마디 정도 찰칵찰칵 사각사각 소리가 난다. 정겨운 소리. 소박한 소리. 나는 눈 감은 채 미용사의 손길을 느낀다. 머리를 만져주는 손길이 참 좋다. 손길은 섬세하고 바쁘고 간들간들하다. 간들간들 간질간질한 움직임을 눈으로 보듯 촉감으로 그려본다. 나를 위해 이렇게나 부지런하게 세심하게. 그래서 고맙고 감사하고 황송하다. 리드미컬한 손가락의 움직임. 대견하고 기특한 마음마저 든다. 손길을 느끼다가 어느 순간 숨결마저 느껴본다. 정말 숨소리가 전해진다. 가만히 집중한 이의 숨결. 어쩐지 규칙적이다. 솔솔 잠이 온다. 눈을 감고서 내 머리를 내어준다. 마음대로 하세요. 나의 전부를 내어줄게요. 이미 족해요. 지금까지만이라도 벌써 너무 많이 받은 걸요. 내키는 대로 어루만져 주세요. 마치 어릴 적 엄마 무릎에 베고 누운 것처럼, 엄마가 나를 만져주는 것처럼, 귀를 만지고 머리를 만지고 평화로이 도닥거려준다. 엄마가 나를 위해. 그 느낌이 좋다. 두피에 닿는 미용사의 손 지문 감촉이 따뜻하다. 손가락 끝 지문이 두피에 닿아 멈춘 것은 움직이지 말라는 신호. 설핏 낌새로 알아챈다. 움직이지 말아야지. 지금 귀 옆에 삐죽 나온 머리칼을 깎는 거구나. 움직이면 귀를 싹둑 자를지도 몰라. 혹시 자르면 어떡하지? 그러면 아플 텐데. 피날 텐데. 아냐 아냐 준비해. 아파도 얼른 괜찮다고 말할 준비.


눈 감아 가만히 있다 보면 인지하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둘 인지되기 시작한다. 미용사의 들숨이 두피를 긴장케 하지만 날숨이 곧 두피에 닿아 괜찮다고 한다. 미용사는 어찌하여 내게 들숨을 들려주고 날숨을 불어넣을까. 어쩔 때는 내 귀에 대고 숨 쉬는 것만 같다. 후우 후우. 귀가 간지럽다.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제 귀에 대고 숨을 그렇게 불어넣으면 어떡해요. 힘들어요. 위기라고요. 간지러워서 간지럽다고 말을 해야 할 것만 같은데 차마 말하지 못하고 그냥 가만히 참고만 있다. 어떡해. 말할까? 안 돼. 어떻게 그런 말을. 너 그러면 민폐 끼치는 거야. 얼마나 당황해하시겠어? 참아. 참아야 해. 언제까지 참아? 그냥 참아. 계속 버텨.

 

그러고 있자니 간지러움이 마냥 싫은 것도 아니다. 설렌다고 해야 할까. 재밌다고 해야 할까. 미용사가 머리를 깎다가 내 구레나룻 옆에서 이리 재고 저리 재고 급기야 두 손으로 내 옆통수를 잡아 양쪽 구레나룻 길이를 비교해 보는데 그 사이 내 귀에 몇 번이나 숨을 불어넣었는지 모른다. 아아 몇 번이나 계속해서. 고마운 내 구레나룻. 그만 제발 그만. 구레나룻이 설령 짝 구레나룻이 되어도 상관없다고요. 와중에 난 왜 고맙다고 하지? 이제 제발 그만. 버티기 힘들어요. 미용사의 숨결은 한없이 따뜻하고 촉촉하고 따스하다. 가위질마다 따뜻하고 촉촉한 마음이 느껴진다. 따뜻하고 촉촉한 기운이 귓가에 전해진다. 따뜻한 기운은 귀의 어느 부분을 타고 내 전두엽으로 신호를 보낸다. 주인님 주인님 이 느낌 어찌하면 좋나요? 이런 숨결은 거의 이십 년 만에 처음인 거 같아요. 그러자 전두엽은 귀에게 답한다. 그래 그래 오래전 뜨겁고 정열적인 그녀를 만난 이후 정확히 이십삼 년 오 개월 하고도 열나흘만이구나. 내 귀에다 대고 이처럼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어 주는 사람.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배려. 그래 그것은 차라리 사랑하는 이를 위한 마음 씀씀이 같은 것. 좀 더 가까이 느껴 봐. 좀 더 숨결을 크게 들어 봐, 라는 행위. 오직 너만을 위해 내가 살아 숨 쉰다는 증거.

 

너무 좋다. 온종일 머리만 깎았으면 좋겠다. 되도록 오래오래 아주 오래오래 오래~~~~ 머리를 깎아주면 좋겠다. 내 머리가 라푼젤처럼 길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은 욕심이겠지. 아무튼 이 시간이 아주 길었으면 하는 마음. 1 센티미터를 한 번에 싹둑 자르는 게 아니라 1 밀리미터씩 열 번에 걸쳐 자르고 보고 만지고 재고 다듬어 자르고 보고 만지고 재고 다듬어서 자르는 식으로 일일이 나누어 잘라주면 안 될까요? 라고 당부하고 싶은 마음.




"어떠세요? 앞머리 이 정도면 괜찮겠어요?"


정적을 깨고 미용사가 말했다. 나는 부스스 눈을 떠 거울을 봤다. 거울을 보는데 어색한 내 얼굴과 함께 미용사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왜 내 얼굴을 먼저 보지 않고 미용사의 얼굴을 보는 걸까. 나는 어떤 생각으로 지금 여기 앉아 있는지 과거로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갔는지 들키고 싶지 않았다. 어떤 상상으로 눈을 감고 있는지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처음부터 눈을 뜨고 있었던 것처럼 나와 미용사를 번갈아 봤다. 뻔뻔해져야 했다. 얼굴을 봤다. 언뜻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오랜만에 눈을 떠 그런지 눈이 부셨다. 늦은 오후 기다란 햇빛이 미용실 문 틈새로 들어와 거울에 비쳤다. 거울에 비친 햇빛이 나와 미용사 사이로 뻗어 났다. 나는 얼른 시선을 내려 미용사의 목을 봤다. 미용사가 내 주변에서 움직일 때마다 햇빛은 미용사의 목 언저리에 스치기를 반복했다. 하얗게 빛나는 미용사의 목. 감히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고 얘기했다가는 무언가 속내를 들킬 것만 같았다.


"괜찮네요."


짧게 대답했다. 나는 머리칼을 자세히 보지 않고 말했다. 그리고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다시 만져주세요. 머리는 어떻게 되든 관계없으니 맘대로 해주시고요. 제가 눈 감을게요. 얼른 당신의 호흡을 제 두피 가까이 대고 들려주세요.


물컹! 어머!


말도 안 돼. 거짓말 같은 감촉. 미용사의 가슴이 내 어깨에 닿았다. 미용사가 이쪽 각도에서 재고 저쪽 각도에서 재다가 그만 나의 떡 벌어진 어깻죽지에 가슴 끝이 살짝 닿고 말았다. 물컹까지는 긴가민가했지만 뒤이어 어머, 가 따라 나온 것으로 봐 거의 확실하다는 결론. 이어지는 정적. 이 감촉은 정말이지 너무 부담스럽다. 접촉을 당한 쪽은 나지만 내가 외려 끝없이 미안해진다. 미안해요. 사과할게요. 제 어깨가 너무 떡 벌어졌지요? 이 놈의 어깨. 평소에는 잘도 움츠러들어 볼품없게 다니는 주제에 왜 미용실만 오면 최대치로 벌려서 앉아 있는지 원. 밖에서는 어깨 좀 펴, 남자답게, 라고 몇 번이나 잔소리 들으면서 얘가 하필 여기서만 이렇게 쫙 피고 있는지 거참 일부러 그런 건 아니겠지요. 제가 잘 일러둘게요. 그러니 너무 노여워하지 마세요. 여기까지 사과하다가 나는 두 손을 가지런히 앞으로 모아 배꼽 위에 두었다. 여기까지가 최선이에요. 더 이상 오므릴 수 없어요. 아아 그리고 당신 제발 조심해주세요. 자꾸 닿으면 어떡해요. 가슴은 계속 닿았다. 미치겠다. 자꾸 닿잖아요 건드리지 마세요, 라고 말할 수도 없고. 한 번이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쉽다고 가슴은 마구마구 스쳤다. 어깨를 더 오므릴 수도 없고. 여보세요. 당신 지금 머리 깎는 중이잖아요. 어쩜 마치 예술이라도 하듯, 세계적인 조각가가 세계적인 조각상을 다듬듯 오롯이 집중하여 제 머리를 다듬어 주시네요. 저는 세계적이지도 않는데. 집중하느라 자신의 몸 온전히 건사하지도 않으시고. 부스러기나 물감, 어깨 따위가 옷에 너저분하게 묻는지도 모르시고. 그만큼 정열적으로 내 머리를 깎고 재고 돌아보고 흘겨보았다. 다시 보니까 내 어깨에 닿은 것은 어쩌면 가슴이 아니라 뱃살일지도 모른다는 추정이 나왔다. 미용사는 배가 유독 튀어나왔다. 괜찮아. 상관없어. 닿은 게 무엇이든. 어라? 왜 눈을 떠? 어서 눈을 감자. 감고 상상하자. 아아 이 미용실은 진짜야. 앞으로 여기만 올래. 나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조금만 깎아 주세요."


그러자 미용사가 물었다. "왜요?" 나는 곧바로 "한 달 만에 오기 싫어서요. 2주 만에 오고 싶네요"라고 답했다. 미용사는 키득키득 웃었다.


"어머, 그러실 것 까지야."


나는 멋쩍어 "자주 깎고 싶어서요"라고 얼버무렸는데 어째서 자주 깎고 싶은지 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대화를 더 하다가는 생각한 바를 다 드러낼 것만 같아 입을 다물었다.


다른 미용실에 가면 "숱이 많이 없으시네요, 저희 미용실에만 있는 샴푸가 있는데 이것 한번 써보시겠어요?"라고 말을 건다든가 "흰머리가 많네요. 나이 들어 보여요. 염색하시겠어요?"라든가 "두피에 특이한 점이 있네요. 피부과로 가보세요"라고 지적을 하기에 다소 불편했던 것 같다. 이 미용실이 마음에 드는 이유는 그런 말을 일절 하지 않는다는 거다. 다시 말하지만 미용사의 숨결이나 손길과 뜨거운 가슴, 따뜻한 지압 마사지 때문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고 싶다.




"샴푸 하러 오시겠어요?"


드디어 머리 감는다. 뒤로 눕는다. 맨 얼굴을 맡긴다. 수건으로 얼굴을 덮는다. 수온을 맞춰 머리를 적신다. 처음에는 차갑다가 점점 뜨거워진다. 고루고루 뿌린다.


"목에 힘 빼세요."


그리고는 샴푸를 묻혀 두 손으로 슥삭슥삭 지압을 한다. 이른바 두피 마사지다. 손에 힘을 꽉 줘서 신나게 문지른다. 손끝은 미끌미끌 잘도 미끄러진다. 거침이 없다. 어쩌면 샴푸가 아니라 마사지를 위해 샴푸를 뿌린 것만 같다. 아아 내 머리통을 위해 누군가가 정성스레 마사지를 해준다니 그 자체로 감동이다. 그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내 머리통. 주인님은 아침이면 대충 물로만 감고 젤을 발라 모양만 내고 밤에도 대충 샴푸질 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털털 다 말리지도 않고 내버려 두었다. 그런 머리통을 주인님도 아닌 미용사님께서 아니 헤어 디자이너 님께서 소중히 만져 주신다. 만지면서 살아나라 두피야. 더 많은 머리카락 싹을 틔워라. 건강해져라. 점은 없어져라. 파뿌리는 검은 머리로 돌아와라. 전처럼 활발히 혈액 순환하거라, 하면서 화분에 물 뿌리듯 가꿔 준다. 이 화분에는 나만 물 주는 거 같네. 나 아니면 화분에 꽃들 다 시들겠다. 맞아요. 우리 주인님은 모른 척 외면하는데 디자이너님만 물을 주세요, 라고 내 머리통과 미용사가 나를 쏙 빼놓고 대화한다.

마침내 시원한 물로 헹군다. 미용사가 수건으로 꾹꾹 눌러 물기를 닦아 낸다.


"일어나 저기로 가시죠?"


나는 미용사가 가리키는 의자에 다시 앉는다. 이제 드라이로 말리고 끝이겠거니 하는데 미용사는 다시 가운을 씌우고는 가위를 잡는다. 삐져나온 곳을 찾기 위해서다. 이번에는 부분 부분만 잡아 찰칵 사각 찰칵 사각 지엽적으로 깎는다. 나는 거울에 비친 내 얼굴과 미용사의 집중하는 눈이 마주칠까 두려워 눈 감는다. 기다린다. 괜찮아요. 이렇게 어여삐 깎지 않아도요. 아무도 제 머리칼 길이를 신경 쓰지 않아요. 오직 당신만이 저를 매만져 줄 뿐, 이라며 감동한다. 어릴 적 엄마 말고 내 머리칼을 이토록 소중히 감겨준 사람은 오직 당신뿐. 미용사님뿐.  


괜찮은 미용실에 가는 날 얻는 것은,

한 달에 한번 누리는 낭만이다. 사치다. 고마움이다. 감사함이다. 따뜻함이다.

새로운 감촉. 새로운 촉감. 미용실에서 하는 커트는 종종 뭉근하고 감미로운 사랑 같은 게 될 때도 있다. 가끔 그런 순간이 있다.


방금 깎고 나왔는데 또 깎으러 가고 싶다.

어서 길어라. 머리칼아. 미용사님 보러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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