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 평소보다 일찍 눈떴다. 아이는 처가에 있고 아내는 안방에서 자는 중이다. 나는 거실 소파에 널브러져 핸드폰을 보았다. 마스크도 사지 못한 죄수의 심정으로, 다른 이들은 어떠한가 궁금했다. 핸드폰을 이리저리 보다가 무심코 네이버 지도 앱을 열었다. 보는데 전에 없던 약국 표시가 눈에 띄었다. 대부분 빨간색으로 마스크가 부족하다고 안내되어 있는데 딱 한 곳, 집에서 2킬로 거리의 약국에 불과 십 분 전 입고되었다는 표시가 떴다. 표시는 색깔도 예쁜 초록색이다. 두근거렸다. 십 분이라. 십 분이면 어떤 풍경일까. 가늠해야 했다.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간 준비성 좋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던가. 어쩌면 미리 줄 서 있던 인파가 벌써 해치웠을지도 모른다. 평일 해당일 내내 동분서주했지만, 아내와 나는 마스크 구매에 실패, 실패의 연속이었다. 이 약국 저 약국에 갔다가 ‘마스크 없습니다’라는 문구에 문전박대만 당했다. 모처럼 찾아간 약국에서 당하는 거절. 이 얼마 만에 당하는 거절인지. 거절 자체에도 모멸감이 기어올랐다. (미리미리 알아보고 찾아올 것이지, 네까짓 게 뭔데 아무 때나 찾아와서 금쪽같은 마스크를 요구해? 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럴 리 없겠지만 약국에서 사람 취급도 못 받는 듯하여 기분이 나빴다. (약국이든 약국 앞에 줄 선 사람이든) 한편 사람 취급을 해드리지 못하는 약국에서는 또 얼마나 힘들 것인가, 그들의 노고가 안쓰럽지만 어쨌거나 계속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마스크는 이제 아이의 것은 다소 여유가 있지만, 아내의 것인 대형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여담으로 슬프지만, 애당초 내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나는 면 마스크 혹은 두건을 사용하거나 사람 많은 곳은 되도록 피하고 숨어 다니게 되었다. 나의 눈빛은 코로나가 시작되고부터 뭔가 굴욕적으로 변했다. 걷다가 사람들을 마주칠 때면 일단 시선을 피하고 보는 습성이 생겨났다. 그것은 단지 내가 쓴 마스크가 KF94가 아니어서라기보다는 며칠째 재탕하는 것을 들킬까 봐 지레 겁을 집어먹어 그러함이겠지.
승부수를 띄웠다. 나는 곤히 자는 아내를 깨웠다. 평소의 주말 아침이라면, 자신을 깨운 남편을 절대 용서하지 않았을 터였지만 나의 “근처 약국에 방금 마스크가 입고되었대”라는 말에 아내는 순순히 외투를 걸치고 따라나섰다. 만일 이번에도 문전박대를 당한다면 나는 모욕감에다 아침잠을 뺏은 대가까지 치러야 할 터였다. 초조했다. 후다닥 시동을 걸고 차를 몰았다.
약국에 가까워지자 거리에는 전에 없던 주차 대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곳에 주차해도 돼? 라고 할 만큼 도로는 아수라장이었다. 수많은 부부가 조깅하듯 파워 워킹으로 바삐 걸었다. 남편들은 저마다 금방 일어났는지 뒷머리에 새집을 지었고 아내들은 그런 남편을 어서 가자며 재촉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누군가 뛰기 시작하자 너도나도 따라 뛰었다. 나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아내와 함께 뛰었다. 세수도 못하고 아침부터 뛴다. 별안간 신이 났다. 주변에 수많은 사람이 약국을 꼭짓점으로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문은 하나다. 커다란 약국에 들어서니 줄은 갈지자로 꼬여 마치 뱀이 똬리를 튼 것처럼 이쪽저쪽으로 길게 아주 길게 이어져 있었다. 우리는 얼른 꼬리를 찾아 줄을 섰다. 뒤에서 새집 머리의 남자들과 아내들이 정신없이 줄을 이었다. 문득 이게 얼마 만에 서 보는 줄이는가 싶었다. 군대서 수없이 줄을 서고 제대 후 예비군 훈련을 하러 가서 줄을 섰지. 그 뒤로 처음 줄을 서 보는 것 같은데 어언 이십오 년은 더 지났구나, 하고 아침잠을 설친 덕에 줄 서 있는 내내 망각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렸다. 가만 더듬어보니 지지난달 초밥 뷔페 가게 앞에서 점심 특선을 먹으려고도 줄을 섰구나! 하고 기억을 떠올렸다. 맛있는 초밥 뷔페. 더 먹을 수 있었는데. 그런데 이건 뭔가. 고작 일회용 마스크 따위를 사려고 줄을 서다니, 그것도 꼴랑 두 장. 도대체 뭘까? 내가 줄 서 있는 이유는. 아마 이상한 군중심리가 발동되었을 터이다. 타인이 줄을 서면 일단 줄을 서고 보는 심리. 너도나도 마스크를 끼면 따라 껴야 한다는 압박감. 인내하여 줄을 설 만큼 가치 있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보상심리. 내가 서서 기다리는 이 줄은 언제고 줄어들 테고 마침내 1인당 2매인 마스크를 사면 비단 마스크 2매뿐이 아니라 코로나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것만 같은 기대심리가 아닐까. 최선을 다하다 걸리면 그나마 후회도 덜하지 않을까, 하는 안전장치. 남들이 쿨쿨 잘 때 맨 처음 눈을 떠 어렴풋이 보이는 보석. 벌떡 일어나 주섬주섬 옷 입고 달려가, 진득하게 줄을 서서 얻는 선물. 뭐 그런 따위의 생각으로 나는 꼿꼿이 줄 한쪽에 서서 여기저기 둘러보는 이들과 시선을 마주치며 차례를 기다렸다.
약국이라는 공간에서 처음 서보는 줄이었다. 줄에 선 사람들을 가만히 보니 대체로 중년과 노부부가 많았다. 아침이라서 아침잠이 없는 연령대가 주류를 이룬 걸지도 몰랐다. 마스크를 나눠주는 약사는 두 사람이다. 앞쪽 사람은 마스크를 미리 꺼내고 뒤쪽 사람은 신분증을 받아 일일이 조회했다. 얼핏 들으니 카드는 안 돼요, 같이 사는 분만 대리 구매가 돼요, 등본이나 가족관계 증명서가 있어야 해요, 라는 실랑이가 들렸다. 그런 말을 듣자니, 그냥 조용히 당신 것만 사지 뭔 질문인가, 하여간 사람들이란, 하는 불만이 퍼뜩 솟구쳐 올랐다. (마스크를 사지 못한 모든 분노가 갈 곳을 찾아 눈을 희번덕거린다) 그리고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 내가 본 구매 정보가 확실한가 의구심이 들어 막상 내 차례가 되었는데 뭐가 안되어 못 드리겠네요, 할까 봐 불안했다. 거기다 약국에는 연신 전화가 걸려왔는데 앞쪽 약사가 전화를 받는 동안 미리 마스크가 꺼내지지 않고 조회 또한 느려지게 되니까, 아 글쎄 이놈의 인간들이 그냥 뛰어오면 될 것이지 뭔 놈의 전화질을 하고 난리람, 하고 얼굴도 모르는 이를 원망하게 되었다. 약사는 전화에 대고, 지금 줄이 길어서 모자랄 거 같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이내 대답을 듣는 이가 가여워지는 게 아닌가. 저 사람은 불과 어제의 내 모습이다. 마스크도 사지 못하는 무능력자. 왜 진작 가타부타 정보나 줄을 캐치하여 쟁취하지 못하였나, 하는 안타까움이 들었다. 그것은 가장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상실감 이리라. 처자식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지 않겠나, 하는... 별의별 생각을 다 하면서 한참 후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면허증과 등본을 내밀고는 부부 4장에 아이 것까지 모두 6장의 마스크를 받았다. 소형이 다 떨어져서 아이 것도 대형으로 드릴게요, 라는 말에 어찌나 설레던지. (소형은 다소 여유가 있었다) 소위 득템 했다는 만족감. 만 원을 내고 천 원을 거슬러 받았다. 아아, 소중한 마스크 6장. 너무나 소중했다. 무려 일주일이나 기다려 구한 터였다. 이제 코로나로부터 안전하겠구나, 하는 생각에 아내를 보니 역시 기뻐하는 표정이다. 마스크 6장을 서랍에 고이 넣어두는 아내의 표정이 평화롭게 보였다. 나 역시 무언가 오랜만에 가장의 역할을 한듯한 뿌듯함에 보무가 당당해졌다. 그러나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관계로 나는 평소보다 오랫동안 아침 청소를 하게 되었다. 쓱싹쓱싹 칭찬받으려고 열심히도 문질렀다. 평소 아침을 먹지 않는 가정이다 보니 점심때가 되려면 아직 멀었는데 이거 큰일이다. 가장의 역할은 끝이 없구나.
아점을 먹으려고 식당 가는 길. 어느 약국 앞 길게 선 줄이 보였다. 줄 선 이들은 하나같이 초조한 눈빛이다. 수량이 내 앞에서 뚝 끊길까 봐, 다른 곳처럼 번호표를 미리 나눠주지 않아서 불안하다. 대뜸 줄을 서긴 했는데 지갑에 신분증이 있는지 몇 번을 확인한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렸는데 마스크가 떨어졌어요, 다음에 오세요, 하고 거절당할까 두렵다. 뭔가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죄수가 될까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