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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피 Jun 01. 2023

오래된 펜홀더와의 조우

안녕하세요



신입 회원이 나타났다.

휴게실에 덩그러니 혼자 앉아있는 신입 회원. 


탁구장에서는 혼자가 없다. 혼자서는 탁구를 칠수 없다. 탁구는 혼자하는 스포츠가 아니다. 혼자할수 있는건 로봇과 서브연습뿐. 결론적으로 탁구란, 같이 하는 운동이다.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것이 어색해도 어쩔수 없다. 내 공을 받아줄 이가 필요하다. 내게 공 날려줄 이가 있어야 한다. 


신입은, 큰 덩치에 머리칼이 짧다. 

앞머리는 위로 반듯하게 올렸다. 비교적 깨끗한 인상이다. 나이는 삼십 대 후반으로 짐작된다. 옆에 셰이크 라켓이 보인다. 눈이 초롱초롱 반짝이는데 어딘지 외로움이 짙게 깃든 눈망울 같다.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의 눈빛에 대뜸 진짜 초보구나 했다. 빨간 러버가 반들반들 빛난다. 누구라도 제게 말 걸어 주세요 하는 얼굴. 기다리고 있잖아요 하는 눈빛. 언제든 달려가 복종할게요. 충성을 다할게요. 주인으로 모실게요.   


그리고 반대편 대기석에는 낯선 부부가 나란히 앉아 담소를 나누는데 신입인 듯 신입 아닌 신입회원 같은 모습. 곱슬머리에 수더분한 인상이다. 그의 옆에 펜홀더 라켓이 있는 걸로 봐서 아마도 제법 구력이 있으리라 보인다. 구력 있는 분이 처음 등장하면 함부로 다가갈 수 없다. 어쩌면 도전자의 입장으로 왔을지도 모르기에. 도장깨기 하러 왔는데 내가 나설 수는 없다. 혹시 나보다 선배일지 몰라. 선배에게 감히 후배가 청하거나 챙겨주는 제스처를 취하면 아마도 건방지다는 소릴 듣겠지. 나는 건방진 후배가 되기 싫어. 깍듯한 탁구인 이고파. 어딜 가도 예의바르단 말 듣고 싶다고. 선배님 깍듯하게 모실게요. 어여삐 여겨 한 수 가르침을 주세요. 


나는 일단 휴게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수기 앞에서 물 마시다가 셰이크 초보에게 선뜻 말 걸어 보았다. 


"몇 부 치세요?" 


"네? 저요? 저, 아, 저는 부수라는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그는 급히 대답하려다 말 더듬는다)


"요즘 자주 본 거 같은데."(나도 모르게 반말이 나오네?)


"저 탁구 친지 3개월 됐습니다."(그는 이제 막 군대 간 신병처럼 대답한다)


그는 근래 레슨을 열심히 받는다. 언제나 출입구 쪽 끄트머리에서 연습한다. (사실 지켜보았다) 


"나랑 한 게임 칠래요?"(어딘가 반말 틱~ 하다)


"네? 넵! 넵! 좋습니다. 고맙습니다."(고맙기까지야)


나는 물 마시러 왔다가 신입과 탁구 치기로 한다. 7탁에 자리 잡고 먼저 포핸드 랠리부터 쭉쭉하다가 슬며시 드라이브를 걸어보았다. 의외로 신입은 드라이브도 잘 받아냈다. 눈빛이 초롱초롱해서는 탁구공에 잘 집중했다. 해맑은 신입의 눈동자. 어떻게든 세게 치려는 표정. 우리는 포핸드 롱을 줄기차게 치다가 쇼트 랠리로 이어갔다. 그리고는 게임. 내가 게임하자고 하니 신입이 말했다.


"저, 저는 6점 받겠습니다."


"네. 그러세요."


결과는 3대 0. 예상대로다. 게임이 끝나자 그는 연신 넙죽거렸다. 


"아, 정말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유쾌한 그의 인사를 받으며 다른 테이블로 떠났다. 뭔가 선심을 베푼듯한 느낌. 뭔가를 베풀거나 공덕을 쌓는 거 마냥 나쁘지 않은 기분. 봉사하는 쾌감. 기부하는 뿌듯함. 도와주는 마음. 적선하는 마음. 어쩌면 동정일지도. 그냥 같이 탁구 쳤을 뿐인데 이렇듯 초보자는 '을'의 입장이 되어 '갑'의 손길을 기다린다. 


나는 교빈 형과의 일전을 위해 중간 5탁 테이블로 옮겨갔다. 내가 막 교빈 형과 게임하려는데 저쪽 끄트머리에서 신입 회원은 다시 큰 눈을 끔벅거리며 탁구 치는 이들을 지켜본다. 왠지 애잔한 마음. 




교빈 형.

세종 시 출신 6부. 번쩍이는 백드라이브와 얇디얇은 포핸드 드라이브를 장착한 남자. 일구일구에 차분히 집중하는 스타일. 조용한 음성. 금요일 오후면 세종 시로 갔다가 일요일 밤에 진주로 돌아오는 남자. 반대로 일요일 밤에 진주로 떠났다가 금요일 오후에 세종으로 돌아오는 남자. 어쨌거나 그와 나는 일전을 벌인다. 어쩐 일인지 첫 경기는 싱겁게 끝났다. 내가 이겼다. 3대 0. 말 그대로 삼빵이다. 지더라도 1세트 정도 버티면서 져야 하는데 한 세트도 따내지 못하면 이른바 삼빵이 된다. 패자의 입장에서 '참 교육' 당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승자의 입장에서 '참 교육' 시켜줬다고도 한다. 패자의 입장에서 다른 말로 삼빵 당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패자의 입장에서는 죄다 굴욕이다. 교빈 형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이제 너한테 상대도 안 되네?"(교빈 형이 놀란 표정으로 말한다)


"아닙니다. 운이 좋아서 그런 겁니다."(나는 최대한 겸손히 대답한다)


"삼빵인데도 운이 좋아?"


"형이 주말에 쉬어서 그런 겁니다. 저는 주말 내내 탁구 쳤거든요. 금요일 밤에는 불금 리그도 하고요."


"리그전은 누가 우승했어?"


"영삼 형이요. 저는 2등 했어요. 그날 탁구 치고 한잔하고 1시에 들어갔어요."


"뭐? 그렇게 늦게 들어가면 집에서 뭐라고 안 해?"(놀라는 표정)


"헤헤, 평소 설거지랑 청소랑 아이 밥 챙겨주는 거랑 제가 다 하는걸요. 열심히 하잖아요."


"그건 나도 기본으로 하는 건데? 그래도 난 자유 시간을 못 받는데?"(웃음이 빵 터진다)


"아아 형, 너무 잡혀 사신다. 저도 잡혀 사는데 형은 더하네요."


"부러워. 나도 밤늦도록 맥주 마시고 싶단 말이야."


"그럼 형 금요일에 집에 가지 마세요. 리그전 하고 가요."


"그러면 쫓겨나."


"......"


나는 교빈 형에게 잠시 기다려보라 하고는 저 멀리 선수를 데리고 왔다. 선수는 대기석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펜홀더 라켓을 가진 신입이다. 아니 신입인 듯 신입 아닌 신입이다. 선수가 왜 혼자 있지? 선수는 대략 일주일 전쯤 구장에 새로이 나타났다. 부부가 같이 왔는데 듣기로 둘 다 4부라고 했다. 그것도 부산 4부. 부산 탁구는 강하다고 들었다. 남자는 펜홀더 전형이다. 마른 몸매에 안경 낀 고수. 며칠 전 나는 영삼 형과 부산 4부님과 3파전을 했다. 처음 붙어보는 사람. 그러나 쉽게 이겼다. 지금껏 내가 빠르고 강하게 치는 탁구를 했다면 부산 4부님은 만만디 느린 탁구를 했다. 왠지 느낌이 다른 탁구. 따뜻한 남쪽나라 탁구. 이국적인 탁구. 그런 느낌이었다. 그러나 한 게임으로 뭘 알겠는가. 나는 또 한 번 4부님을 모셔왔다. 모셔와서 교빈 형과 게임하시라 하고 심판석에 앉았다. 교빈 형이 차분히 치는 세종 탁구라면 4부님은 느릿느릿 치는 부산 탁구다. 세종과 부산의 한판 승부. 결론부터 말하면 세종 탁구가 이겼다. 부산 탁구는 졌지만 의외로 한점 한점 쫓아가는 끈질김이 돋보였다. 이렇게 치는 탁구도 있구나 했다. 


이번엔 내 차례. 나는 진주 탁구인이다. 진주 탁구와 부산 탁구가 격돌한다. 먼젓번은 처음이었으니 없던 걸로 하고요. 이번에는 진검승부입니다. 나는 빠르고 긴 횡회전 서브를 넣었다. 그가 쇼트로 받아내는데 생각보다 더 느리게 왔다. 느린 타이밍에 평소처럼 빠른 박자로 대응하자 내 쇼트는 오른쪽 라인 아웃되었다. 오지 않는 공에 스윙을 내미니 자꾸만 엇나갔다. 핸디 점수 지키기 실패. 어느덧 동점에 역전까지 허용. 이제 승부를 걸어야 했다. 건드려야 했다. 때려야 했다. 공격해야 했다. 공격은 실점의 리스크를 동반하지만 안정적인 경기 운용에 실패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기다렸다가 냅다 때리는 스매싱. 느릿느릿 오는 커트에 한방 드라이브. 그렇게 온몸을 던져 겨우겨우 이겼다. 힘들었다. 게임 후 우리 셋은 휴게실로 갔다. 내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기도 전에 4부님이 자판기 앞에 서서 자신이 살 거라고 말했다.


"내가 살게요."


"아, 감사합니다."


4부님이 서서 천 원짜리를 차례차례 넣었다. 나는 쪼그려 앉아 음료수를 꺼내며 슬며시 물었다.


"혹시 연배가 어찌 되시는지 여쭈어도 될까요?"


"네. 66년 생입니다."


"네? 와! 정말요? 그리 안보이시는데요. 저는 저보다 위인가 아래인가 헷갈리고 있었는데."


"흐흐 감사합니다."(다 함께 웃음 터진다)


내가 헷갈린다고 말하자 교빈 형이


"아쭈, 웃기고 있어, 정말!" 


하면서 웃었다. 가만히 보니 멀리서 볼 때만 동안이고 가까이서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엿보였다. 역시 보통 구력이 아니야. 낡은 펜홀더 라켓. 손때가 묻어 짙은 색깔. 눈가에 주름. 안경 속 삶의 지혜. 세상을 보는 시야. 


음료수를 마시고 두 번째 라운드 돌입. 우리는 한 게임씩 더하기로 했다. 제일 어린 내가 먼저 심판을 봤다. 교빈 형과 4부님의 승부. 세종 탁구와 부산 탁구의 재격돌. 이번에는 4부님이 이겼다. 부산 탁구의 승리. 4부 펜홀더 형님의 탁구. 어떤 것일까. 아주 오래된 탁구. 범접할 수 없는 세월의 탁구. 멀리 떨어져 중진에서 수비하는 탁구. 때때로 살짝살짝 드라이브로 맞받아 친다. 수비를 아주 잘한다. 롱 커트 공은 전통 드라이브를 건다. 전통 드라이브는 전형적인 펜홀더 드라이브의 아치를 그린다. 대개 동그란 호를 그리며 꽂히는데 그 속도가 대체로 느리다. 느린데 루프 드라이브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파워 드라이브도 아니다. 공이 찰싹거리는 소리도 나지 않는다. 튕겨 나가지도 않는다. 그냥 드라이브다. 90년대 쿰쿰한 지하 탁구장 같은 곳에서, 아주 어릴 적 할아버지가 걸던 드라이브. 예끼 이놈이 무릎 아파 죽겠는데 드라이브를 다 걸게 하네? 고얀 놈. 옛다 이놈아 드라이브 받아라~ 하는데 느낌상 0.9배속처럼 느리게 보인다. 느리게 보이니 수비할 때 빠른 박자로 톡 덮어주면 된다. 살짝 덮기만 한다. 힘도 안 들인다. 그러면 알아서 들어간다. 드라이브에 있어서 무척 큰 동작이나 공의 위력이 동반된다면 수비하는 입장에서 위축될 텐데 4부님의 전통 드라이브는 그런 게 없다. 그럼에도 뭔가 어렵다. 4부니까. 어쨌거나 드라이브니까. 드라이브는 드라이브다. 어떻게든 스코어를 올려 승부를 비슷하게 가져간다. 그게 고수의 구력. 4부님은 구력과 전통을 믹스한 분 같다. 예사롭게 보이면서도 예사롭지 않다. 쉽게 친다고 치는데도 다 받아낸다. 

여기서 발견. 4부님은 탁구 치면서 자꾸 웅얼거린다. 수비하다가 "늦었다" 하면 공이 네트에 걸리고 "살았다" 하면 공이 네트 위로 넘어왔다. 그는 혼잣말을 했다. "받았다" 하면 수비에 성공한 것이고 "때리자" 하면 스매싱이 날아왔다. 역시 오래된 탁구. 혼자 중얼거리는 탁구. 전형적인 할아버지 탁구. 고독한 탁구. 끊임없는 자신과의 대화. 오래 산 이의 연륜.


나는 어렵사리 이겼다. 여기서 체크사항. 아마 똑같은 탁구로 대했다면 졌을 것이다. 수비만 해서는 대적할 수 없다. 내가 걸 수 있는 공격을 걸어야 한다. 한 발이라도 더 뛰어서 받아내야 이긴다. 튀는 탁구가 살 길이다. 


앞으로 부산 4부님에게 자주 도전할 것이다. 옛날 탁구, 전통 탁구를 많이 배우고 싶다. 탁구의 연륜을 익히고 싶다. 그 속에 진리가 있으리라. 게임이 끝난 뒤 불금 리그를 알려 주었다. 고맙게도 4부님이 참가하고 싶다고 말했다.  




연승후 심판석에 앉았다. 앉아서 출입구 쪽을 보니 앞서 신입회원은 경준 형과 탁구 치는 중이다. 경준 형은 우리 구장 4부 고수다. 오십 대 중반 작달막한 키에 늘 너털웃음을 달고 산다. 헤어스타일은 삐침 머리다. 그 누구와도 거리낌 없이 스스럼없이 탁구 친다. 오, 그래, 같이 치자, 하면서 초보들의 손을 잡아준다. 4부와 초보가 탁구 치는 풍경. 그것은 마치 말년 병장이 이등병과 함께 작업하는 광경과 같을 터. 아니 장교와 이등병이 함께 어울리는 것. 그만큼 이질적으로 보였다. 중간에 일병 상병들이 수두룩한데 누구도 신입의 손을 잡아 주지 않는다. 그래서 보다 못한 병장이 장교가 이등병의 손을 잡았다. 


아마도 경준 형은 옥상에 다녀오면서 신입 회원과 눈 마주쳤을 터다. 신입 회원이 벤치에서 탁구대로 쳐다보는 눈길. 도와주세요. 그윽한 눈빛. 제발 놀아주세요. 저랑 상대해주세요. 탁구 치고 싶어요. 경준 형은 그것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 것이다. 이리 오세요. 같이 치죠, 라면서 먼저 말 걸었을 것이다. 경준 형은 그런 사람이니까. 베푸는 사람. 웃어주는 사람. 경준 형과 탁구 치는 신입 회원의 눈동자가 해맑다. 신이 난 표정으로 스매싱을 날린다. 어떡해. 상대가 어떤 분인지도 모르고 겁 없이 스매싱을 날리다니. 경준 형의 특징. 느린 볼은 느리게 넘긴다. 그러나 빠른 볼에는? 그냥 가차 없다. 본능적으로 반응한다. 경준 형의 회초리 드라이브를 맞아봐야 쓰겠니? 따악! 소리가 나자마자 나는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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