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어린 나를 만나러 가다
자전거를 탔다. 무심코 떠난 곳. 김시민대교를 건너 상평동 방면 남강변 자전거길을 달렸다. 머리칼이 바람에 날렸다. 초여름 저녁의 바람이란 시원하다가도 뜨뜻해지고 이따금 차갑기도 하다. 그리 빨리 달리지도 않건만 바람은 골고루 머리칼을 날려주었다. 바람을 맞으며 눈을 지그시 떠 앞을 주시하는 건 그 옛날 어린 시절과 똑같지만 이제는 속도를 많이 내지 못하는 게 다르다. 얼굴도 다르고 몸매도 다르며 생각도 다르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어린 시절을 잊어버렸다. 생각해내려 해도 생각나지 않는다. 드물게 비슷한 상황 비슷한 풍경을 보노라면 바늘로 찌르듯 언뜻 떠오르기도 하지만 다시금 곰곰이 기억을 즐기려 하면 까먹어버린다. 흡사 꿈처럼 깨어나면 잊어버리는 식. 그러면 그저 허망하다. 왜냐면 아쉽기 때문이다. 아아~ 어린 시절 그때 그 감각, 기억이 불쑥 떠오를 때의 희열이 어떤 카타르시스를 쏘아주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의 감각은 러너스하이를 느끼는 것처럼 고통 속에서 쾌감 호르몬을 준다. 고통 속의 일상. 답답한 나날. 고민은 나날이 깊어가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몸속에 힘은 점점 빠져나가고 의식이 희미해진다. 그냥 그런 건가? 이런 식인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내려놓기만 할 뿐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 누우면 끝.
중년의 컨디션이란 조금씩 가라앉기만 하는 건가. 새로운 대체 에너지란 없는 것인가. 고갈되고 고갈되어 고갈된 시간 속에서 고갈된 의식으로 고갈에 길들여져 간다.
상평교 아래를 지나 진양교를 지났다. 초등학교 시절 무던히도 오갔던 연암도서관 옆 뒤벼리 길. 버스비가 없어서 한참을 걸어갔던 길. 고등학교 시절 자전거로 신나게 다녔던 길. 강변 옆 좁다랗게 난 자전거길을 고요히 달렸다. 진주교 쪽으로 가려다 문득 돌아본 곳. 동방호텔 뒤편으로 보이는 옥봉동. 고등학교 시절 친구네 집이 있어서 자주 갔던 동네. 옥봉동을 떠올릴 때면 늘 햇살이 화사한 곳으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해 질 녘 어둠이 내려 다른 곳처럼 보인다. 여름날 오후 땡볕에 자전거를 타고 운동장에서 농구를 하고 친구를 배웅하고 돌아서던 장면. 뒤돌아 올려다보면 비봉산 산골동네 옥봉동이 한눈에 들어왔다. 언제나 빛나던 동네. 그냥 그곳을 다시 보고 싶었다. 친구는 진즉 떠나고 없겠지. 나는 자전거를 타고 동방호텔을 지나 장대동을 거쳐 옥봉동으로 향했다. 옥봉동은 옛 시내 끝 변두리에 있다. 옛 시내길마저 인적이 드물고 낡았는데 하물며 옥봉동은 어떻게 변했을까 싶었다. 길거리 가게는 거의 다 문 닫았고 드문드문 영업하는 가게가 몇 남아있다. 그마저도 다니는 사람이 없어서 텅텅 비었다. 간혹 가게 안에서 사장님으로 보이는 이가 밖을 내다볼 뿐이다. 지나가는데 자꾸 눈이 마주쳐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저는 손님이 아니랍니다. 그냥 지나갈 뿐인데 이리 내다봐주시니 황송할 따름입니다. 그렇게 마음속 대답을 하다가 봉래동까지 와버렸다.
봉래동 옆 비봉산 입구 쪽으로 갔다. 오르막을 올라 잠시간 평평한 길을 가는데 차마 자전거에 오를 수 없었다. 아래로 보이는 옛 진주시내 전경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저 풍경을 보느라 나는 내려서 자전거를 끌고 갔다. 고등학교 시절 수없이 헤매던 골목. 등교하고 하교하던 길. 방황하던 시절. 그때도 나는 자전거를 타고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삼십 년이 지난 시점, 나는 그때의 나를 보려고 자전거를 타고 왔다. 내려다보면서 내가 어디를 다니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찾아보려 했다. 개발되고 달라진 곳이 있지만 내가 다니던 길은 여전하구나.
어린 시절 수없이 오른 길.
이쪽은 까만데 저쪽은 밝다.
이쪽은 저승이고 저쪽은 이승인가. 이쪽은 벌써 저물었는데 저쪽은 아직 해가 남았구나. 나는 이미 늙고 지쳤는데 저쪽은 여전하구나. 나와 다르게 풍경은 그대로다. 똑같지는 않지만 거의 비슷하게 남아있다. 나만 사라져 간다. 내가 없어도 여기 비봉산 자락과 옛 시내 풍경은 오래도록 남아있겠지. 나만 지나가는 존재. 나만 변하는 인간. 훅 불면 바스러지는 사람. 그런 내가 그 시절 자전거와 다른 자전거를 타고 여기로 왔다. 해지는 풍경 아래서 어린 시절 동네로 오면 마음 한쪽이 따뜻해지는 쾌감이 온다. 나만의 퇴폐로운 한때. 살다가 가끔 서글퍼질 때면 이곳으로 온다. 와서 그 시절 기억을 들춰본다.
꿈처럼 깨어도 금방 사라지지 않는 기억을 엿보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