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 내보이고 싶을 때
샹송을 편곡해 다시 부른 노래. 찾아보니 80년대 수많은 가수가 돌려가며 불렀고 저마다의 매력이 있다. 나는 몇 년 전 티브이에서 예능 '불타는 청춘'을 보다가 이 노래를 처음 들었다. 음, 정말로 처음 들은 건 아니다. 어릴 적부터 들어는 봤는지 귀에 익숙한 멜로디였다. 그러나 정작 이 노래 가사가 '눈이 내리네'인지는 몰랐다. 제목을 알고 가사를 안 시점이 불타는 청춘이니 이때가 처음이 맞으리라.
'불타는 청춘'은 좋아했던 방송이다. 옛날 배우나 가수들이 단체로 나와서 아직도 싱글임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평균 나이대가 대략 오십 내외다. 너 싱글이냐? 나도 싱글이다. 싱글이니까 외롭다. 오래전 잘 나가던 시절 만났던 친구들. 너 아직도 혼자면 어떡하니? 뭐? 너도 아직 혼자잖아. 난 뭐 아직 잘났으니까 혼자라도 괜찮아. 뭐? 너 잘난 건 예전이고 지금은 늙었어. 거울 안 봐?
늙은지도 모르는 이들이 늙은 친구를 보고서 동병상련의 감정을 가진다. 나만 늙었나? 너도 늙었지. 그래서 그들은 절친이다. 서로를 의지하여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다 누군가 늦결혼이라도 하면? 축하는 하겠지만 속으로는 배신자가 된다. 아아~너마저 떠나는구나. 이제 싱글클럽에 남은 이들이 몇이지? 얼마 없구나. 외롭고 외로운 계절. 추운 겨울. 눈 내리는 풍경을 공중에서 클로즈업할 때 나오던 시그널. 김추자의 목소리.
[눈이 내리네. 당신이 가버린 지금. 눈이 내리네. 외로워지는 내 마음. 꿈에 그리던 따뜻한 미소가 흰 눈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네. 하얀 눈을 맞으며 걸어가는 그 모습. 애처로이 불러도 하얀 눈만 내리네. 라~라라 라라 라~라라 라라. 당신이 가버린 지금 흰 눈이 내리네. 하얀 눈이 내리네. 외로운 이 밤을 눈물로 지새우는 외로운 소녀. 하얀 눈을 맞으며 떠나버린 이 길에 하얀 눈만 나리네.]
여러 가수들이 부른 노래다. 그중에 개인적으로 김추자의 노래가 최고 좋았다. 힘 있게 외치며 전진하는 기상이 느껴져서다. 외로움을 노래하는데 힘찬 목소리로 외치니 둘 사이 엇갈리는 점이 매력적으로 들린다. 오묘한 느낌. 가사와 목소리가 매치되지 않는다. 가사는 후퇴하는데 노래는 앞서간다. 나는 외롭다며 우는데 외롭다는 외침이 결코 가냘프지 않다. 외려 힘차다. 힘차게 눈 내리는 풍경을 노래한다. 눈이 내리는 지금. 당신이 가버린 지금. 외로워지는 내 마음. 꿈에 그리던 미소가 흰 눈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네. 울먹이며 걷는 이 심정. 안 그래도 울고 싶은데 너무 아파서 꿈에서조차 그리워하는데 노래하는 목소리는 내내 당당하기만 하다. 그래서 김추자가 최고다. 오묘한 엇갈림이 더더욱 외로이 들려서 외로움이 잘 들리게 된다.
그렇다고 외로운 이 마음이 괜찮다는 얘기도 아니다. 괜찮지 아니한데 너 마침 눈이 내리고 있네? 참 나 어이가 없다? 우는 아이 뺨 때려주네? 어쭈구리 지금 눈이 내릴 때야? 눈이 내리면 내 마음 더 외로워지는데 딱 맞춰서 눈이 내려? 이거 진짜야? 진짜구나. 눈이 내리고 있구나. 그것도 하얀 눈이 내리네. 그래, 진짜 눈이 내리는구나. 그러면 나도 진짜 내 마음을 들려주리라. 외로운 이 밤을 눈물로 지새우는 외로운 소녀. 그것이 바로 솔직한 나. 너무나 외로워서 잠 못 이루는 밤. 눈물로 밤을 보내는 소녀. 밖에 나오니 눈이 내리네. 그래서 순백의 풍경에 내 마음 감추지 않게 그대로 드러내버리련다. 눈이 내리니까.
꾸미지 않은 고백에 눈이 있어서 위로가 된다. 눈이 내리네. 눈이 내려서 내 마음 솔직히 울 수가 있다. 편안히 울어버리겠다. 이렇게 한번 울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그러니 눈 내리는 지금 나는 다 털어놓으련다.
김추자의 눈이 내리네를 들을 때마다 그 가사에 담긴 풍경이 떠오른다. 그리고 불타는 청춘에서 중년의 청춘들을 비추는 풍경도 떠오른다. 얼굴에 화장을 진하게 하고 머리를 꾸민다. 꾸미지 않은 모습을 화면에 비출수 없다. 원초적 내 얼굴을 보여줄 수는 없어. 감춰진 겉모습으로 젊은 날의 대화를 한다. 우리는 어렸을 적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 처음 만난 그때로 돌아가 어린 대화를 나누고 어린 그날을 연기한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풍경은 조금 다르다. 아무리 꾸미고 꾸며도 보이는 틈새. 카메라는 달라진 그들의 얼굴 주름을 순백의 눈 속에서 리얼하게 비춰버린다. 눈이 내리네. 그래 눈이 내리니 나도 솔직하게 말하겠다. 나는 늙었습니다. 늙었지만 뭐 어떻습니까. 늙어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가슴 설렐 수 있습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눈 내리는 이 세상 이 풍경 속에서 진솔하게 말합니다.
눈이 내리네. 오묘한 엇갈림. 어쩌면 슬픈 현실. 그래서 더 매력적인 노래. 슬프지만 내 전부를 고스란히 드러낼 수 있는 장면. 그래서 더 아름다운 노래. 꾸미지 않고 편안히 드러내고 싶을 때, 나만의 퇴폐로운 행복을 느끼고 싶을 때 다시금 김추자의 '눈이 내리네'를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