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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피 May 15. 2020

자전거길에서 일어난 사고

소녀 또래를 키우는 사람의 기준에서



나는 벌써 몇 사람이나 추월했다. 

새로 난 자전거도로에는 걷는 사람, 달리는 사람, 자전거 탄 사람이 뒤죽박죽 앞서거니 뒤서거니 간다. 모두 같은 길에 있지만, 방향이 다르듯 마음은 각기 다르다. 길이 좁지만 가는 노선도 모두 제각각이다. 나는 잘 피해 가다가 저 앞 같은 라인에서 달려오는 이와 선뜻 눈이 마주친다. 내가 먼저 왼쪽으로 튼다. 그러니 당신은 오른쪽으로 비껴가시오, 하는데 그이도 같은 쪽을 택했나 보다. 같은 노선에 선 우리는 어떻게 선을 그어야 할지 잠시간 갈등한다. 이런 적이 잘 없는데, 점점 가까워지면서 내가 택하니 그이도 나를 따르고 우리는 멈칫멈칫 지척에서야 겨우 각자 택한 방향을 다르게 긋는다.


산책하기 좋은 계절. 한낮의 따가운 햇볕에서 저녁의 서늘한 기운이 교차하는 시점. 강물 속을 들여다보며 낚시하던 이도 도구를 챙겨 일어선다. 일어나서 집에 돌아가는 사람, 밥 먹고 소화시키러 나온 사람, 밥 먹으러 퇴근하는 사람, 이 시간은 뉴스가 끝나고 드라마가 시작하기 전 광고가 나오는 시점이다. 정규 일과가 끝나고 비정규 일과로 넘어간다. 저마다 다른 일상으로 넘어가기 위해 분주히 움직인다.


기어를 올려 묵직하니 페달을 밟는다. 묵직한 만큼 속도가 빨라진다. 이 정도 힘으로 이 정도 속도는 가뿐하다. 나는 어느새 추월하는 사람이 되어서 요리조리 핸들을 비틀어 사뿐사뿐 나아간다. 그렇게 달리며 속도의 강자로서 추월하는 기분에 푹 젖어있던 차 돌연 냉수를 쏟아붓듯 웬 놈이 나타나 나를 추월해서 간다. 대뜸 뒷모습을 보니 프로 자전거족(내 기준에서)은 아니다. 남자인데 치렁치렁한 긴 머리에 뭔가 지저분한 옷차림, 남루한 엠티비다. 그런데도 프로의 속도를 내 앞서간다. 이른바 프로 자전거족이란 고급 자전거에 고급 장비를 착용한 사람을 가리킨다. (내 기준에서) 그들의 속도는 범접할 수 없다. 명목은 내가 아무리 기어를 올려 장딴지가 터져라 달려도 그들은 유유히 앞서가기 때문이다. 자전거에 날개를 단 듯 이를테면 장비의 차이랄까, 아마추어가 아무리 쥐어짜 봤자 프로에게는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내게는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의 몸으로써 최소한 동류에게만큼은 질 수 없다는 신념이 있다. 비록 허름한 자전거에 힘 빠진 몸뚱이지만 몇십 년 자전거 경력에 올라타 아직 낡아빠진 자존심이 남았으니. 어디 보자, 앞서가는 놈은 일단 프로가 아니다. 프로가 아닌 자에게 추월을 허용하다니. 맹목적 사고에 사로잡힌 나는 오르막에 접어들음에도 불구하고 엉덩이를 치켜들어 페달을 밟는다. 네놈이 날 추월하다니. 과연 무리수인가. 차츰 무릎이 지끈거리고 목덜미가 뻐근해 온다.


페달을 밟는다. 자전거가 간다. 촤르르 자전거 바퀴가 돈다. 바퀴는 적립해둔 것보다 더 많이 돌아서 쭉쭉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 힘들이지 않아도 자전거는 쾌적한 속도감을 맛보게 해 준다. 나는 자전거를 타다가 이따금 두 손을 놓기도 하고 발을 떼기도 한다. 목덜미가 뻐근할 때 어깻죽지를 한번 쫙 펴준다. 상체를 일직선으로 세우면 핸들이 저 멀리 아래로 멀어진다. 그러자 햇볕이 얼굴로 쏟아진다. 햇볕을 피하고자 나는 도로 숙여서 핸들을 잡는다. 저녁 해가 저물기 전 마지막 잠깐 강렬할 때 나는 선글라스가 모자를 대신하여 얼굴을 다 가려주겠지 하면서 달린다. 무릎 언저리가 뻐근할 때 먼지를 털어내듯 저릿한 통증이 떨어지도록 탈탈 다리를 턴다. 지속 가능한 속주를 위해 나는 자전거 위에서 별짓을 다 한다.


내가 속도를 내 꽁무니에 붙어 막 추월하려는데 놈이 퍼뜩 자전거를 세우더니 서서 손을 흔들어댄다. 갑자기 저게 뭐하는 짓이람. 놈의 눈길을 따라 가만히 보니 길가 어떤 아주머니의 품에 한 소녀가 안겨있다. 죄다 동(動)으로 움직이는데 정(停)으로 멈춰 선 소녀가 낯설어 흠칫 놀란다. 멈춰버린 소녀의 얼굴은 피범벅이다. 안전모를 착용하고 있지만, 안면이 피로 물들어 눈빛은 흐느적거린다. 소녀는 앳돼 보인다. 초등학생의 얼굴. 어찌 된 건지 소녀는 울지 않고 미동도 없다. 어쩌면 이미 다 울고 지쳐버렸는지도 모른다. 햇볕이 소녀를 떠받치는 아주머니의 등과 소녀의 얼굴에 내리쬔다. 아주머니는 소녀의 어머니인지 아니면 지나가던 사람인지 분간되지 않는다. 가만히 앉아서 소녀를 떠받치는 시간이 고요하다. 그래서 처참하다. 상처에 물을 붓는 것처럼 햇볕이 쏟아진다. 가슴이 아파 계속 볼 수 없을 정도다. 날 추월한 놈은 자전거도로 한가운데에 서서 두 손을 높이 쳐들어 흔든다. 대체 어딜 보고 흔드나? 아는 사람을 부르는 건가, 싶어 놈의 눈길을 따라가는데 저 멀리 구급차가 보인다. 구급차는 보도에 막혀 자전거도로에 진입하지 못하고 그저 경광등만 반짝반짝 도롯가에 머문다. 그러면 구급차와 소녀를 연결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소녀와 아주머니와 놈을 떠나 구급차로 달려가 본다. 달려가니 저 앞에서 남녀 구급대원이 걸어온다. 딱 보니 이십 대 젊은 소방관이다. 내가 지나온 곳에서는 놈이 다급하게 손 흔들지만, 남녀 구급대원은 허망하게도 마치 산책하듯이 설렁설렁 걸어온다. 아마도 마음이 급하여 그리 보였으리라. 나는 소녀의 얼굴을 본 순간부터 블랙홀에 들어갔나 보다. 시간의 흐름이 너무나 느려서 세상천지 모두 야속할 뿐이니. 현장에서 급기야 놈은 양팔을 허우적거리며 소리친다. 빨리오라고. 여기라고. 소녀가 넋이 나갔다고. 아주머니가 힘들어한다고. 그런데도 구급대원들은 뭉기적 정갈한 머리 모양을 매만지며 담소를 나눈다. 그런 대원들을 보며 놈은 손 흔들며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통증은 멈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거라서 인간의 의지로 조정할 수 없는 객체(客體)가 아닌가. 제발 어린 소녀와 아주머니가 감당하는 고통을 헤아려 달라. 한 시라도 줄여야 하지 않겠는가. 소녀의 얼굴과 아주머니의 등이 네 몸에 연결되어있어도 그리 태평할 거냐. 숨이 터져라 달려와도 시원치 않건만.


내가 보니까 남자 구급대원은 드라마 '부부의 세계' 남주인공 '이태오'를 닮았다. (내 기준에서) 나는 요즘 아내가 보는 부부의 세계를 간간이 시청한다. 앞이마를 기준으로 머리카락이 절반은 내려왔고 절반은 올라가 있다. 강력한 헤어 젤을 발랐는지 걸어오는데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다. 여자 대원은 '유해진'의 영화 '럭키'의 여주인공 '조윤희'를 닮았다. (역시 내 기준에서) 단정히 뒤로 묶은 머리에 이마에는 역시 한 올의 머리카락도 내려오지 않는다. 둘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각기 다른 상대와 연애 중인 주인공이다. 입고 있는 소방관 복장은 극 중 캐릭터일 뿐. (아무래도 구조보다는 디자인에 몰두한) 선남선녀인 대원 둘은 들것을 들고 사이좋게 웃으며 아주 천천히 걸어온다.


반대쪽에서 놈이 “여기!”라고 연달아 소리친다. 그러나 놈의 외침에 누구도 답을 하지 않는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무심코 지나갈 뿐이다. 단지 구급차만이 번쩍번쩍 소리 없이 응답한다. 그 중간에 남녀 구급대원은 자전거도로의 곡선 주로에 막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정답게 타박타박 걷는다. 아직 보이지 않기에 걷지만 보이면 뛸 거라 기대하면서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말하고 싶은 욕구. 하지만 어떻게 전해야 할지 난감하다. 원래 들것을 들고 걷는지 뛰는지, 보이면 뛰고 안 보이면 걷는지 정확한 기준과 규정을 모르기에 나는 구급대원과 구급차 사이에서 어찌할 줄을 모른다. 그리고 구급대원과 소녀 사이에서도 발을 동동 구른다. 저쪽 소녀와 아주머니의 상태를 알기에 마음은 더없이 다급하지만, 섣불리 말하지 못한다. 지금 너희가 웃을 때가 아니다. 그렇게 슬슬 걸어갈 때가 아니란 말이다. 저쪽에서 다급히 흔드는 놈의 손이 안 보인단 말이냐. 그러나 나는 여전히 뛰어들지 못한다. 곧 구급대원이 감당할 그 무게를 짐작하기 때문에. 지나가는 이에게 무게는 아주머니의 등처럼 범접할 수 없는 객체다.


시간이 멈춘 공간.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돌아가 놈과 함께 손을 흔들지 아주머니를 도와 소녀를 지킬지 구급대원을 종용하여 현장으로 이끌지 갈등한다. 그러다 문득 지나가는 이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지나가는 이들은 현장을 보며 지나가고 손 흔드는 놈을 보며 지나가고 구급차를 보면서 지나간다. 나는 지나가는 이들을 보며 더불어 지나가는 이가 되고자 하는데 놈의 손 흔드는 모습에 이끌려 차마 지나가지 못하고 아마추어리즘을 포기하지 못하고 어정쩡 구급차 앞에 서서 그들이 부디 무사히 조우하기를 겨우 바라며 기다린다. 그러다 마침내 구급대원은 소녀를 들것에 실어 구급하고 온 길을 돌아가 구급차에 올라 보이지 않는다. 안심이 된다. 결국 살려달라고 비난하면서 챙겨주시오, 어떻게 좀 해 주시오, 날 좀 봐다오, 라고 매달린 격이다. 나는 비로소 고개를 돌려 내 갈 길을 본다.


이제 놈을 추월해야 한다. 드디어 놈이 이쪽으로 와 힐끔 나를 돌아보더니 그대로 앞서간다. 그래, 기다렸다, 이놈아. 그제야 놈을 따라서 나도 페달을 밟는다. 놈은 장비로는 프로가 아니지만, 내 기준에서 그가 바로 자전거 도로를 달리는 진짜 프로 라이더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 충분히 앞서갈 자격이 있다. 나는 열심히 그 뒤를 쫓아갈 뿐이다. 핸들을 잡은 손에 뭉근히 힘이 들어간다. 정규 일과에서 비정규 일과로 넘어간 나는 비정규 일과에서 정규 일과로 들어가는 이를 보며 범접할 수 없는 경계를 느낀다. 경계를 깰 수 없는 관념이 세월에 묻어 가로막이 된다. 어쩌면 스스로 쌓은 가로막에 막혀서 내내 뉴스를 보듯 일상을 보고 티브이를 보듯 소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모두 한 곳에 있지만, 마음은 각각 다르다. 자기만의 노선을 따라 걷거나 뛰거나 자전거를 탄다.


나는 다시금 추월하고 추월당하는 주행(走行)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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