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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 니체와 함께 인생을 생각한다 / 정중규

by 정중규

대우재단 시민강좌 : 제2회 인문문화축제

'쇼펜하우어, 니체와 함께 인생을 생각한다'

강의 : 박찬국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

2025.11.22. 오후2시. 대우재단빌딩 5층 대우학술라운지

- 참으로 오랜만에 내 청년 시절 마음과 영혼의 길벗들이었던 쇼펜하우어와 니체를 다시 만난 충만의 시간을 가졌다. 2030 당시는 쇼펜하우어와 니체와 더불어 키엘케고르도 나와 함께 했었다. 이들 3인방과 밤을 지새며 씨름하던 날이 얼마였던가. 하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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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함께 인생을 생각한다 / 박찬국(서울대 철학과 교수)


1. 니체는 누구인가? - 서양문명의 파괴자이자 새로운 삶의 창조자


니체는 플라톤적인 형이상학과 기독교에 의해서 지배된 2500년 동안의 서양문명을 파괴하면서 새로운 시대와 세계를 여는 문화혁명의 기폭제가 되고자 했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는 자신을 다이너마이트라고 부르고 있다. 니체가 이렇게 서양의 전통문명을 파괴하려고 한 것은 서양의 전통문명이 이른 바 이원론에 빠져서 육체와 분리된 순수영혼만을 선한 것으로 보고 육체와 결부된 자연스러운 욕망과 충동을 악으로 간주하고 억압함으로써 인간을 ‘병든 동물’로 만들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니체는 서양의 전통문명을 파괴함으로써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진정으로 건강하고 강인하게 만들 수 있는 철학을 창조하려고 한다.

2. 니체의 문제의식 - 니힐리즘의 극복


우리의 삶이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생성과 소멸, 투쟁과 혼돈, 질병과 노화의 한가운데에 처해 있다는 것은 삶의 근본적인 사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견뎌내기 위해서 우리는 온갖 상상과 허구를 만들어 낸다. 니체는 서양의 종교와 형이상학의 역사란 사실은 이러한 상상과 허구의 역사라고 본다. 그러나 니체는 상상과 허구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상상과 허구에도 인간을 건강하게 만드는 상상과 허구가 있는 반면에, 인간을 병적으로 만드는 상상과 허구도 존재한다. 인간을 건강하게 만드는 상상과 허구의 대표적인 것으로 니체는 그리스·로마 신화를 들고 있다. 이에 대해서 인간을 병적이고 허약하게 만드는 상상과 허구의 대표적인 것으로 니체는 플라톤에서부터 시작되는 서양의 형이상학과 기독교를 꼽고 있다.


서양 형이상학과 기독교를 니체는 이원론으로 규정한다. 그것들은 생성 변화하는 현실을 가상이나 타락한 세계로 보면서 영원불변의 세계를 진정한 세계로 간주한다. 그것들은 인간도 생성 변화하는 현실에 속하는 부분인 육체와 그렇지 않은 부분인 영혼으로 나눈다. 육체가 가상이고 타락한 것이라면, 영혼이야말로 영원불변한 실체이고 순수한 것이다. 이와 함께 서양형이상학과 기독교는 육체적인 욕망과 감각적인 충동은 비본질적인 것이고 타락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영혼이 이러한 욕망과 충동에 물들지 않도록 경고한다.


감각적인 욕망과 세속적인 기쁨을 금기시하는 금욕주의와 이러한 금욕주의를 철저하게 관철할 수 없는 데서 오는 죄책감이 서양형이상학과 기독교가 만들어내는 병적인 정신 상태다. 금욕주의는 영혼이 육체와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이게 하는 한편, 감각적인 욕망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영혼으로 하여금 자신을 학대하게 만든다. 이러한 자기학대는 영혼이 자신을 공격하는 죄책감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심한 경우에는 자신을 타락시키는 원인으로 간주되는 자신의 육체나 여성을 학대하는 것으로도 나타난다. 사람들은 자신의 성기를 잘라 내거나 자신의 등짝에 채찍질을 하기도 하며 여성을 유혹자로 단죄하기도 한다.


이원론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생을 건강하고 경쾌한 생으로 만들 수 있는 가치들을 창조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천상에 의해서 규정된 가치들을 짊어지도록 한다. 그 결과 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비틀거리면서 걸어가는 병자가 되고 만다.


이원론이 갖는 이상과 같은 맹점들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사람들에게 영원불변한 천상의 세계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안겨주었기 때문에, 서양의 형이상학과 기독교는 지금까지도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러한 영원불변의 세계에 대한 희망을 품고서 지상에서 겪는 고통과 불안 그리고 무상함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원론에 기댐으로써 사람들은 희망과 위안을 얻게 된 대신에 사람들의 삶은 병적인 것이 되었다.


그런데 니체에 따르면 근대는 전통적인 이원론적 세계상이 하나의 환상이자 기만으로서 드러나게 된 시대다. 형이상학이 진정한 실재의 영역으로 상정했던 피안과 정신의 영역은 사실은 인간의 상상이 만들어낸 세계라는 것이 드러난다.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을 니체는 최고의 가치들이 자신의 가치를 상실하게 되는 니힐리즘의 상황으로 파악하고 있다.


“니힐리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최고의 가치들이 자신의 가치를 상실한다는 것이다. [이에] 목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왜’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위 인용문에서 니체는 전통형이상학과 종교에서 신으로 대표되는 영원한 것들을 최고의 가치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지상의 것들이 무상하고 무가치한 반면에, 그러한 영원한 것들은 인간이 추구할만한 가장 가치 있는 것들이다. 근대에 들어와, 플라톤의 이데아의 세계와 기독교의 신과 같은 초감성적인 이념들은 우리 인간이 삶의 무상함을 견디기 위해서 만들어낸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폭로되면서 그것들은 그 동안 인간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지배력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일단 삶의 방향과 의미, 즉 내가 ‘왜’ 사느냐에 물음에 대한 답을 발견하지 못하면서 허무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니체는 이러한 상황을 니힐리즘이라고 부르고 있다.

3. 힘에의 의지와 니힐리즘의 극복


이러한 니힐리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니체는 인간의 자기강화, 생명력의 강화에서 찾는다. 인간이 자신의 생명력을 강화하는 것에 의해서만 이러한 니힐리즘의 상황은 극복될 수 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볼 때 플라톤적인 형이상학이나 기독교가 이러한 생명력의 약화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력이 약할 경우에 인간은 항상 피안세계와 같은 신기루를 만들어 그것에서 삶의 확고한 방향과 의미 그리고 구원을 찾으려고 한다.


전통적인 형이상학이 자신들의 이론은 육체로부터 분리된 순수이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 반면에, 니체는 전통형이상학을 포함하여 모든 이론 체계는 우리의 전체적인 인격의 상태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니체는 이러한 전체적인 인격의 상태를 규정하는 것을 힘에의 의지라고 보았다. 이러한 힘에의 의지가 허약할 경우 그것은 지상에서의 삶을 혐오하고 천상을 희구하면서 세계를 이원론적으로 해석하게 된다. 전통형이상학이 이러한 의지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순수이성을 모든 이론들의 원천이라고 본 반면에, 니체는 이러한 이론들을 만들어내는 이성은 사실은 힘에의 의지가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지상에서의 삶을 규정하는 무상함과 고통을 진정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은 피안세계와 같은 환상들이 아니고, 그러한 무상함과 고통을 긍정하고 오히려 그것들을 자신을 강화하고 자신의 힘을 즐길 수 있는 기회로 전환할 수 있는 강인한 생명력이다. 이러한 생명력을 니체는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라고 부르고 있다.


니체가 힘에의 의지에 대해서 말할 경우, 우리는 자신의 주위에 있는 인간들이나 사물들을 자의적(恣意的)으로 지배하고 억압하려는 의지를 연상해서는 안 된다.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는 네로나 칼리굴라 식의 자의적인 횡포에의 의지가 아니다. 네로나 칼리굴라와 같은 자들은 자신들을 지배하지 못한 자들이며 오히려 자신들의 자의적(恣意的)인 감정들에 의해서 지배된 자들이다. 그들은 무엇보다 자신의 적들에 대한 공포에 의해서 사로잡힌 자들이며, 그들의 전제적인 횡포는 이러한 공포에서 비롯된 과잉방어에 지나지 않는다.


타인들에 대한 진정한 지배는 자신에 대한 지배에 기초한다. 자신을 지배할 수 있는 자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남을 지배할 수 있다. 힘에의 의지란 이러한 의미에서 무엇보다 자신을 통제할 수 있고 자신의 주인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힘에의 의지는 그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고양하는 것, 즉 자신을 보다 높은 단계로 올리고 자신에게 보다 큰 폭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단적으로 말해서 ‘자신의 초극’이 힘에의 의지의 본질이다.


진정한 힘에의 의지란 자기강화와 자기극복에의 의지이며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하려고 하는 의지다. 이러한 진정한 힘에의 의지는 지상의 무상함과 간난(艱難)을 피안에서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서’ 극복하려고 하는 것이며, 이는 힘에의 의지 자체의 극도의 강화에 의해서 일어난다.


니체에 따르면 사람들의 궁극적인 관심사는 생존보다는 자신의 힘의 확장, 위신과 자부심의 증대, 달리 말해서 자신의 힘의 증대에 있다. 인간은 힘의 고양과 상승 이외의 어떤 다른 목적, 자신의 생존이나 도덕적 가치의 실현을 위해서 자신의 힘을 고양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의 고양 자체를 위해서 자신을 고양하고자 한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생존에 유리한 것보다는 자신의 힘이 고양되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을 더욱 중시한다.


인간이 독립적이고 강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은 플라톤이 말하는 영원한 이데아나 신과 같은 허구적인 타자에 대한 의존상태로부터 일단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맥락에서 니체는 신의 죽음에 대해서 말하면서 인간은 ‘자신이 신이 되기 위해서 신을 살해해야만 했다’고 말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인간이 자신 이외의 타자에 대한 유아(幼兒)적인 의존상태로부터 벗어나 독립적인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신을 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경우 신을 살해한다는 것은 그러한 신을 더 이상 믿지 않으며 그것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니체의 철학은 인간을 이데아나 신 등의 환상을 통해서 위로하고 달래는 값싼 위로의 철학이 아니라, 인간을 오히려 지상의 현실 자체에 직면시키면서 그를 훈련시키려고 하는 쇠망치(Hammer)가 되려고 한다.


이렇게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힘에의 의지로서 존재하고 오직 힘에의 의지만 존재하기 때문에 힘에의 의지야말로 모든 가치들의 근원이다. 힘에의 의지가 모든 가치들의 근원인 한, 힘에의 의지를 강화시키는 것만이 가치 있는 것이며 그렇지 않은 것은 무가치한 것으로 타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전통 형이상학에서 가치는 존재자 전체의 위에 그 자체로 존립하면서 인간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으로서 간주되었지만, 가치란 힘에의 의지가 자신의 유지와 고양을 위해서 그때그때마다 정립한 조건들에 지나지 않는다. 얼핏 목적 자체처럼 보이는 모든 것들(예를 들어서 정의의 구현 등)은 힘에의 의지에 의해서 정립된 목적들로서 항상 힘에의 의지의 ‘수단들’일 뿐이며, 필요에 따라서는 다른 것들에 의해 언제든지 대체될 수도 있는 것이다.


니체는 이렇게 가치를 그 자체로 존재하면서 인간의 복종을 요구하는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이며 영원불변한 것이 아니라 그때마다의 힘에의 의지에 의해서 필요에 따라서 정립되고 폐기되는 것으로 보는 것을 가치의 재평가(Umwertung der Werte)라고 부르고 있다.


형이상학적인 가치정립에서 인간은 초감성적인 가치들에 굴복하고 그것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기서 인간은 철저히 복종적이 되고 굴종할수록 찬양받았으며, 반항하는 인간은 악에 사로잡힌 자로 간주되었다. 니체는 이러한 사태야말로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자들의 본래적인 성격인 힘에의 의지에 반하는 것이며 이제 인간은 이러한 형이상학적 가치정립을 통한 자기소외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4. 영원회귀사상과 초인


그런데 근대인들은 서양형이상학과 기독교의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을 고수하면서 그것을 세속적으로 변형시키는 방식으로 니힐리즘을 극복하려고 한다. 즉 그들은 천상과 지상의 이원론을 미래와 현재의 이원론을 통해서 극복하려고 한다. 모든 우연과 불안이 사라진 천상의 세계는 이제 나치들이 지배하는 제3제국이나 공산주의에 의해서 대체된다. 사람들은 세속적인 대용종교를 만들어냄으로써, 신이 죽은 결과 자신들이 부딪히게 된 니힐리즘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속적인 이원론도 이원론인 한, 그것은 여전히 인간을 병적으로 만든다. 그것은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이분화하지는 않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미래의 찬란한 사회를 위해서 자신의 현재의 삶을 희생하게 하고 그러한 사회의 실현을 위해서 자신들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거리낌 없이 살육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천상의 이데아나 신 대신에 위대한 독일민족이나 위대한 민중을 신으로 내세우면서 이러한 신의 영광을 위해서 구체적인 개인들은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고 믿는다.


혹은 사람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는 것처럼 천상의 신 대신에 물신(物神)을 신봉한다. 사람들은 돈을 모으고 축적함으로써 자신의 삶이 보다 안전해졌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자신의 안전 확보를 위해서 밤낮으로 일을 한다. 피안의 신을 경배하기 위해서 근대 이전의 사람들이 밤낮으로 기도했다면, 현대인들은 물신을 위해서 밤낮으로 일한다.


혹은 사람들은 최대다수의 최대의 행복이 보장되는 세계처럼 영혼의 순수성 대신에 육체적인 욕구가 최대한 만족되는 세계를 구현함으로써 삶의 안정과 평안을 확보하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감각적인 욕망이 충족된다고 해서 그 인격 전체가 안정과 평안을 얻을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감각적인 욕망이 그 어느 시대보다도 잘 충족되고 있는 현대의 세계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사람들의 불만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심하다. 매순간 다양한 형태로 부침하는 감각적인 욕망들을 즉각적으로 해소하는 삶을 살 때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가장 충실한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러한 삶은 피상적이고 덧없는 것이 된다.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소외되는 이러한 다양한 삶의 형태들에서는, 지상의 삶은 천상의 피안이나 민족이나 민중 그리고 물신에 의해서 억압되거나 향락주의적인 삶에서처럼 피상적이고 덧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니체는 우리가 진정으로 목표하는 것은 피안이나 유토피아에서의 안락도 감각적인 향락도 아니고 우리 자신의 힘에의 의지를 고양시키고 강화시키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따라서 니체는 전통적인 최고의 가치들이 붕괴된 니힐리즘의 상황에서 이제 제시되어야 할 ‘궁극적인 가치’는 힘에의 의지를 최고도로 실현하고 강화하는 가치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본다. 그것은 전통적인 최고의 가치들처럼 힘에의 의지를 약화하거나 병들게 하는 게 아니라 그것으로 하여금 최고의 힘에 도달하도록 내모는 가치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가치는 피안이나 미래의 이상사회와 같은 신기루를 통해서 힘에의 의지를 단순히 위로함으로써 현재의 연약한 상태에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최대의 시련에 직면케 함으로써 단련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최대의 시련과 대결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을 통해서 힘에의 의지는 최고의 힘을 구현할 수 있다. 이는 힘에의 의지는 저항과의 대결을 통해서만 강화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니체는 근대가 직면하고 있는 니힐리즘의 상황이야말로 최대의 시련이라고 본다. 생이 아무런 확정된 목적도 갖지 않는 것으로서 드러날 때 생은 인간에게는 최대의 고통으로 나타난다. 생이 아무런 목표도 없이 자신을 반복할 뿐이라는 극단적 니힐리즘의 상태야말로 힘에의 의지에게 최대의 시련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니힐리즘의 상태를 니체는 영원회귀사상을 통해 보다 철저한 형태로 제시하고 있다. 생은 의미도 목적도 없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사상은 신의 죽음 이후에 근대인이 처한 니힐리즘의 상태를 영구화하고 이를 통해서 니힐리즘을 극단으로까지 몰고 나간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니힐리즘이 극단적인 형태를 취함으로써 니힐리즘은 인간을 하나의 궁극적인 결단의 상황에 직면케 한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는 영원회귀의 상태를 최대의 무게에 비유하고 있다. 그것은 연약한 인간은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갖는다. 그러나 영원회귀의 사상은 그것이 갖는 엄청난 무게로 우리를 분쇄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그것을 견디고 그것을 흔연히 긍정할 때에는 니힐리즘의 극복을 위한 전환점으로 나타날 수 있다. 영원회귀의 상태를 인간이 적극적으로 인수할 때 인간은 지상의 삶의 순간순간을 있는 그대로 긍정할 수 있는 힘, 즉 최고의 힘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극단적인 니힐리즘으로서의 영원회귀의 상태를 극복한다는 것은, 또 하나의 새로운 피안적인 목표를 설정함으로써 이러한 니힐리즘의 상태로부터 손쉽게 도피하려 하지 않고 그러한 니힐리즘의 상태를 철저하게 긍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러한 긍정을 통하여 그전에 니힐리즘의 상태였던 것이 이제는 니힐리즘을 진정으로 극복하는 생의 최고의 상태로 나타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힘에의 의지는 영원회귀의 사상을 자신의 최고의 고양을 위한 조건으로서 요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영원회귀사상에로 결단하는 순간 우리는 힘에의 최고의 의지로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극단적인 니힐리즘의 상태로서의 영원회귀의 상태와 니힐리즘을 극복한 상태로서의 영원회귀의 상태에서나 모든 것이 동일하게 영구히 회귀한다는 것은 실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는 양자에게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극단적인 니힐리즘의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동일하게 영원히 회귀한다는 것은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 모든 것은 실은 공허한 무라는 것, 그 아무 것도 가치를 갖지 않는 것이란 의미를 갖는 반면에, 니힐리즘을 극복한 상태로서의 영원회귀의 상태에서는 모든 것은 의미로 충만해 있으며 모든 순간이 절대적인 가치를 갖는다는 것, 그 어느 것도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절대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힘에의 의지로서의 인간의 삶은 이제 더 이상 그것 위에 존재하는 어떤 목적에 관계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여 목적 없이 흐를 뿐인 무의미한 생성도 아니다. 힘에의 의지는 이제 피안적인 유토피아든 아니면 근대의 세계관에서처럼 미래에 실현되어야 할 유토피아든 어떠한 유토피아도 지향하지 않으며 그것은 오직 그때그때마다 우리에게 주어진 순간에 철저할 뿐이다. 이와 함께 생성은 생성이면서도 전통형이상학에서는 영원한 피안에게 귀속되었던 절대적인 존재와 충만의 성격을 갖게 된다. 생성하는 것, 우연적인 것은 그 자체에 있어서 모든 순간에 절대적으로 긍정되는 것이다.


영원회귀를 흔쾌하게 긍정하는 인간이야말로 최대의 힘을 갖는 자다. 그는 세계와 대결하면서 이 세계의 고통이나 간난(艱難)을 의연히 버티는 자신의 힘을 향유하는 한편, 그 세계를 이제는 더 이상 두려운 세계로서 느끼지 않고 아름다운 세계로서 느끼게 된다. 세계를 이렇게 경험하는 자는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지상의 운명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며 사랑한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는 아모르 파티(amor fati), 즉 운명애(運命愛)를 말하고 있다.


니체는 생을 그것이 갖는 극도의 고통과 기쁨 그리고 어둠과 밝음을 갖는 그대로 긍정하기로 결단한 자를 초인이라고 부르고 있다. 초인에게는 모든 것들이 영원히 회귀하는 이 세계는 의미도 목표도 없는 어둠의 지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오의 밝음에 비견될 수 있는 밝음의 지배를 의미한다. 이 경우 밝음이란 모든 어두운 것들, 모든 간난과 장애들을 배제하고 그것들과 대립된 밝음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자신의 힘을 강화하는 필연적인 계기로서 흔쾌히 긍정하는 밝음이다.

박찬국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니체와 하이데거의 철학을 비롯한 실존철학이 주요 연구 분야이며 최근에는 불교와 서양철학을 비교하는 것을 중요한 연구과제 중의 하나로 삼고 있다. 『원효와 하이데거의 비교연구』로 2011년 제5회 청송학술상을 받았으며, 『니체와 불교』로 2014년 제5회 원효학술상을 받았다. 저서로는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 『하이데거는 나치였는가』, 『내재적 목적론』,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 읽기』,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읽기』, 『에리히 프롬 읽기』, 『니체의 초인수업』 등이 있고, 역서로는 『니체 I, II』, 『니체전집 16: 유고(1882년 7월-1883/84년 겨울)』, 『아침놀』, 『비극의 탄생』, 『안티크리스트』, 『상징형식의 철학 I, II』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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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 가상 인터뷰


행복해지고 싶은가? 그렇다면 고독해져라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세기의 철학자이자 염세주의자. 1788년 항구도시 단치히에서 태어나 1860년 72세에 프랑크푸르트에서 생을 마감했다. 헤겔 중심의 독일 관념론이 우세하던 시기에 이에 맞서 의지의 철학을 주창했다. 31세에 발표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총 4권)가 크게 주목받지 못하다가 63세에 에세이집 《소품과 부록》이 영국에서 뜨면서 재조명받았다. 이후 세계적인 철학자로 명성을 드날렸다. 훗날 실존철학, 인간학 등에 영향을 끼쳤다.


쇼펜하우어가 서점가를 강타하고 있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는 200쇄를 넘었고, 《쇼펜하우어 인생수업》 《남에게 보여주려고 인생을 낭비하지 마라-쇼펜하우어 소품집》도 베스트셀러 30위권에 올라 있다(교보문고 인문분야, 8월 중순 기준). 2023년 이후 출간된 쇼펜하우어 관련 신간만 무려 20종에 달한다.


164년 전에 작고한 독일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염세주의 철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인생은 고통이고, 고뇌는 인간의 운명이며, 삶은 추악하다고 말하는 까칠한 철학자. 누가 인생을 찬란하고 아름답다고 했나.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피가 낭자한 황야 그 자체다. “인생은 고통과 권태를 오고 가는 시계추와 같다”며 삶을 지독히도 삐딱하게 바라본 쇼펜하우어.


‘다정한 위로’ 따위와는 거리가 먼 팩폭 투척가 쇼펜하우어에게 왜 한국인은 열광하는 것일까. 쇼펜하우어 철학의 어떤 부분이 지금 이 시대 독자들의 마음에 깨달음의 종을 울리는 것일까. 그의 핵심 철학을 가상 인터뷰로 풀어본다. 쇼펜하우어의 말을 가급적 그대로 살리되, 각색 과정에서 일부 왜곡이 있을 수 있음을 양해 바란다.

“이 불확실성 가득한 세상에서

어느 정도 확신을 갖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은

오직 나 자신뿐이라네.

내가 진정한 나 자신이 되는 때는 언제인지 아는가.

바로 고독할 때라오.


최근 한국에서는 선생님의 철학을 추앙하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어요. 인생수업 교과서처럼 읽힌답니다.

“오! 반가운 소식이군요. 나는 시간이 지나야 평가를 받는 사람인 것 같네. 31세에 발표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내 나이 63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은 것도 그렇고. 책을 내고 32년이 지나서야 사람들이 그 가치를 알아본 거라오. 무려 32년!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나와 외로운 투쟁을 해야 했지.”


선생님 철학은 훗날 지성사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쳤어요. 헨리 데이비드 소로, 랄프 왈도 에머슨, 앙리 베르그송, 프로이트와 융, 레프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리하르트 바그너, 구스타프 말러가 모두 선생님 사상에서 영향을 받았답니다. 특히 프리드리히 니체는 대학 시절 우연히 고서점에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구입하고 2주 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고 이 책에 몰입했다고 해요.

“그 책은 내가 썼지만 참 대단한 저서야. 낡아빠진 관념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독창적인 사상을 담은 책이라오. 매우 성공적이지. 수미일관된 체계를 갖춘 데다가 명료하고 이해하기 쉬워. 문체도 아름답고.”


(웃음) 좀 오글거리는데요. 자화자찬에 능하군요!

“나를 알아야 행복할 수 있으니까. 내가 불행했던 건 나 자신을 착각했기 때문이었다오. 나는 나를 실제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여겼고, 그 사람 입장에서 넋두리를 했지. 교수로 진급하지 못하며, 수강생에게 외면당하는 한 사상가. 괴테의 꽉 찬 강의실을 보면서 괴롭기도 했네. 오죽하면 나의 사랑스러운 개를 ‘괴테’라고 이름 붙였을까. 나중에는 개 이름을 ‘아트만’으로 개명했지만. 여담이지만 개가 어떤 면에선 인간보다 더 나아.”


현대 한국인들이 왜 선생님의 철학에 열광한다고 보세요?

“나도 그 이유가 궁금하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이 시대가 처한 삶의 방식과 경제 상황을 감안해 생각해 봤어요. 가장 큰 원인은 ‘어른 실종 시대’에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2대, 3대가 같이 사는 가족이 드물다 보니 힘들고 고민될 때 뻔한 잔소리를 해줄 어른이 없는 거죠. 혼자 헤매는 것 같아 막막할 때는 꼰대 같은 어른의 잔소리가 그립기도 하거든요. 또래 친구한테 고민을 털어놓으면 ‘나도 그래’ 하면서 공감과 위로가 끝이에요. 그들이 원하는 건 공감이 아니라 조언이고, 위로가 아니라 지혜죠. 그런 면에서 직설적인 조언과 지혜가 담긴 선생님의 철학서가 큰 반향을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흐음, 그럴 수도 있겠군. 그런데 내 말을 너무 신봉하지 않으면 좋겠소. 철학자라는 족속은 자신과 똑같이 생각할 것을 요구하거든. 그런 면에서 시인과 다르다네. 시인은 인생의 여러 모습과 상황, 인간의 성격 등을 상상력을 동원해서 가져와 독자 스스로 생각하도록 맡기지. 하지만 철학자는 자신이 끌어낸 완성된 사상을 보여준 뒤 모든 사람이 자신과 똑같이 생각할 것을 요구한다오. 따라서 시인이 꽃 자체를 가져오는 사람이라면, 철학자는 꽃의 정수를 가져오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시는 독자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요구하지만 철학자는 독자의 사고방식을 뒤집으려 하지.”


“시인이 꽃을 가져오는 사람이라면, 철학자는 꽃의 정수를 가져오는 사람이다” 은유가 멋져요! 사람들이 선생님의 글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아요. 다른 철학자들은 대체로 건조하고 난해한 문체를 사용하지만, 선생님의 문장은 문학적 수사가 기발하고 지시문처럼 되어 있어서 명료하죠.

“생각이 정리가 되어 있으면 명료한 문장이 나온다네. 그런데 자네, 나를 너무 띄워주는 거 아닌가? 나는 다른 사람의 평가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야. 찬사를 즐기는 사람의 영혼은 비천하고 설익은 것들에 의해 지배당하지. 행복해지려면 우선 자아와 제3자의 눈에 비친 자신을 비교해 본 후, 전자의 가치를 우위에 둬야 한다네.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쓰고 타인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다른 사람의 견해에 지나치게 관심을 갖지 말게나. 타인의 의견에 연연하면서 불안과 괴로움에 시달리는 것은 일종의 전염병이야. 그것도 아주 고질적인 전염병. 타인 중심의 심리는 자존감을 떨어뜨리고, 신경과민에 시달리게 하며, 허영과 겉치레의 원천이 되고 사치와 교만의 바탕이 된다네.”

“찬사를 즐기는 사람의 영혼은

비천하고 설익은 것들에 의해 지배당하지.

행복해지려면 우선 자아와 제3자의 눈에 비친 자신을 비교해 본 후,

전자의 가치를 우위에 둬야 한다네.

사람들은 너무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쓰고

타인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집착하지.

타인의 의견에 연연하면서

불안과 괴로움에 시달리는 것은 일종의 전염병이야.

그것도 아주 고질적인 전염병.


타인 중심이 아니라 자아를 중심에 둔 삶을 꾸리라는 말씀이군요.

“인간의 운명에 차이를 가져오는 요소는 세 가지가 있다네. 참된 자아, 물질적 자아, 사회적 자아. 참된 자아는 자연에 의해 결정된 것으로 근본적이고 강력하지. 사실 인간의 행복, 더 나아가 인간의 모든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자기 자신 속에 깃들어 있다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명언을 남겼지. ‘행복은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는 사람에게만 있다’. 이 말은 아주 중요해. 두 번, 세 번 명심해 두게나. 자아가 풍부한 사람일수록 비애와 고뇌로 가득한 인간 사회에서 행복한 삶을 즐길 수 있지. 명예나 지위, 명성 같은 사회적 자아에 집착하는 사람일수록 헛된 욕망에 사로잡히기 쉽다네.”


자아가 풍부한 사람이 되려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

“그건 매우 큰 질문이야. 우선 사색가가 되어야 하지. 사색은 의지대로 쉽게 되는 것이 아니라네. 우리는 대개 사물 자체에 집중하면서 관심을 기울이기만 하면 사색가가 추구하는 목표에 쉽게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그렇지 않다네. 사색가들이 들인 노력을 안다면 깜짝 놀랄 거야. 사색은 독서와는 또 다르거든. 책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읽을 수 있지만, 사색은 임의로 불러낼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지. 그것은 마치 나무 열매가 성숙하는 것과 같다네. 사색은 단번에 이뤄지는 게 아니라 천천히, 단계적으로 이뤄지지.”


독서는 사색가에게 어떤 영향을 주나요.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쌓는 것은 철학가와 학자에게 굉장히 중요한 조건이라네. 전문 분야에만 매달리는 학자는 공장 노동자와 별반 차이가 없으니까. 그런 학자는 마치 집에만 있으면서 외출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과 같다네. 높은 수준의 학자가 되려면 박식함이 필요하고, 동서고금의 지식을 머릿속에 개괄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되지. 박식한 사람이 되기 위해 독서는 꼭 필요하다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이 있어. 아무리 뛰어난 두뇌를 가진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의 책을 너무 많이 읽는 것은 좋지 않다오. 다른 사람이 나의 생각을 대신 해주는 꼴이 되어버리거든. 즉 다른 사람이 이미 닦아놓은 길을 가는 것이 습관이 되면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잊어버린다네.”


인풋만 주구장창 있으면 위험하다?

“그렇지.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해악이 있다네. 많이 읽거나 배우면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잊게 되는 것처럼, 인풋을 안 하고 많이 쓰거나 가르치기만 하면 지식이나 이해력이 몽롱해져서 철저함이 사라질 염려가 있지. 그렇게 되면 강의를 하거나 책을 메우기 위해 미사여구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네.”


선생님 철학에서 ‘의지’와 ‘욕망’ ‘표상’이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하는데요. ‘의지’는 어떤 개념인가요.

“짧게 설명하기 쉽지 않네. 우주의 근원적 실재는 무한한 결핍에 시달리는 맹목적 의지라는 성격을 가진다오. 이 성격은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개체에 해당하지. 간단히 말하자면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라고도 할 수 있어. 이 의지가 우리 안에 깃든 욕망의 본질이라오. 그러니 인간은 끝없는 욕망에 시달릴 수밖에 없지. 이 욕망에서 벗어나야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네.”


그렇다면 ‘욕망’이란 뭔가요.

“의지와 닮은 개념이지. 욕망은 필요성과 결핍, 가난과 괴로움에서 생긴다네. 하나의 욕망을 충족하면 다른 욕망이 전개되기 때문에 우리는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오. 욕망의 충족으로 인한 쾌락은 짧고 외형적인 환상에 불과하지. 우리가 욕망의 지배와 의지의 주권 아래 놓여 있는 한, 그리고 희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한 안식이나 행복을 손에 넣을 수 없다네.”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가요?

“그게 바로 내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행복론이라네. 우리는 모든 욕망에서 벗어나야 완전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오. 욕망이 사라진 사람이 아무 기쁨도 없이 결핍뿐인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네. 온전한 내적 기쁨을 만끽할 수 있게 되지. 이 기쁨은 바다와 같이 고요해. 부동의 평화와 안식, 깊은 평정과 숭고한 명랑함이 지배하게 된다오.”


명랑함은 다분히 선천적인 기질이 아닌지요.

“선천적이기도 하지만, 그 명랑함의 수용도는 우리가 결정할 수 있다네. 명랑한 마음은 행복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아주 중요한 재보(財寶)야. 명랑함만 있으면 저절로 즐거워지니까. 우리는 명랑함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항상 문을 활짝 열어놓아야 하지.”


선생님은 “인생 자체가 고통이고, 이 세상은 지옥이나 다름없다”고 했죠. 인생이 왜 고통인가요.

“인생이 왜 고통이냐고? 근심과 고통, 고뇌 자체가 인간의 운명인데 너무 당연한 것을 묻는군. 불행과 고통이 그저 우연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는 건 맞지 않아. 이 세상은 고뇌로 가득 차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의 직접적인 존재 목적이 바로 고뇌라네. 티끌과도 같은 이 세상에는 값어치 있는 것들이 존재하지 않고, 이 세상은 단테가 묘사한 지옥 그 이상이라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존재인데,

이런 인간이 연민을 갖는 것은 참으로 신비롭고 놀라운 일이야.

연민은 고귀한 가치라네.

누군가를 위해 진심의 눈물을 흘리고,

이기심과 악의를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졌으니 말이야.


너무 극단적인 시각 아닌가 싶어요. 생에는 양면성이 있잖아요.

“낙천주의자들은 세계가 좋은 곳이라고 주장하지만, 이치에 맞지 않아요. 그들이 그토록 찬미하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보게나. 현실적이고 성실한 인간이라면 낙천주의자들의 만세 소리에 맞장구 치지 못할 거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보잘것없고, 구원의 길 또한 막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지. 쯧쯧, 인간은 얼마나 아둔하고 우매한 존재인지. 인생은 생존을 위한 괴로운 투쟁의 연속이고, 이 투쟁에서 결국 인간은 패할 수밖에 없네.”


삶이 고통이라는 걸 담담히 받아들이면, 우리는 이웃에게 좀 더 너그러워질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지. 사람들을 부를 때 ‘아무개 씨’ 또는 ‘아무개 님’이라고 하는 대신에 ‘고뇌의 벗’이라고 부르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네. 이렇게 부르는 게 좀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상대방의 실상을 드러냄으로써 관용과 인내와 형제애를 느끼게 되니 말이야.”


동정과 연민이군요.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존재인데, 이런 인간이 연민을 갖는 것은 참으로 신비롭고 놀라운 일이야. 연민은 고귀한 가치라네. 누군가를 위해 진심의 눈물을 흘리고, 이기심과 악의를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졌으니 말이야. 나는 예술적 천재성보다 연민을 더 높게 평가한다오. 횃불과 불꽃이 태양 앞에서 빛을 잃는 것처럼, 마음의 선함 앞에서는 천재성도 무색하고 어두워지지. 마음이 선한 사람이 천재보다 더 고귀하다네.”


선생님은 천재인가요?

“내가 천재인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할 수 없어. 내가 쓴 글, 나의 생각을 읽은 후대가 평가해 주겠지.”


그렇다면 천재는 어떤 사람인가요.

“천재란 근본적인 것, 보편적인 것, 영원한 것을 생각하지만, 범인은 일시적인 것, 특수한 것, 직접적인 것을 생각하지. 천재는 영원하고 비현실적인 것에 관심이 쏠려 있어서 사교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 범인은 대체로 정신이 빈약하기 때문에 혼자 있을 때 공허함과 권태를 견디지 못해 사교를 필요로 하지. 고독이야말로 천재가 겪을 수밖에 없는 숙명 같은 형벌이야. 고독을 사랑한 사람만이 자유를 사랑할 수 있어. 거의 모든 사교는 고독보다 못하다네.”


왜 그렇게 고독이 중요하죠?

“이 불확실성 가득한 세상에서 어느 정도 확신을 갖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은 오직 나 자신뿐이라네. 그렇다면 내가 진정한 나 자신이 되는 때는 언제인지 아는가. 바로 고독할 때라네. 다른 사람과의 교제나 접촉은 어떤 식으로든 손실, 위험, 혐오감, 불쾌감을 가져올 수밖에 없거든. 사교 모임은 사람들에게 으레 타협과 양보를 강요하기 마련이야. 평범한 사람들만이 사교 모임에서 만족을 얻을 수 있지. 비범한 사람이 평범한 사람과 관계를 맺으려면 자신의 4분의 3을 죽여서 그들과 동등한 위치로 내려가야 한다네.”


좀 도발적인 발언이지만, 사회성 부족한 왕따의 자기 합리화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선생님은 툭하면 주변 사람들과 갈등을 빚고, 격노하면서 신랄하게 비판해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고, 독침 같은 지적으로 많은 이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잖아요.

“뭐라고? 자네 말이 좀 심한 거 아닌가? 화가 나려 하는군. 하지만 분노는 이성적인 인간이 극복해야 할 대상이기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얘기해 보겠네. 철학자로서 내가 이룬 성취는 탁월했지만, 내가 과연 인격적으로 성숙했을까, 묻는다면 자신이 없긴 하다네. 자기변명처럼 들리지만 나의 가정환경이 나를 염세주의자로 자라게 한 측면이 있다오.”


부모님은 어떤 분이었나요.

“아버지는 무역으로 돈을 많이 버셨지. 장남인 내가 상인이 되길 원하셨어. 15세 되던 해 아버지는 내가 상인이 되겠다는 약속을 한다면 유럽여행을 하게 해주겠다고 했네. 나는 무조건 하겠다고 하고 따라나섰어. 그때 내가 본 것은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멋진 풍광과 건축물, 그곳 사람들의 수준 높은 예술감각과 친절이 아니었다오. 인간의 참상, 인생의 본질을 목도했어. 프랑스 톨롱에 흑인노예를 감금해 놓은 것을 보고 말았지. 그것은 흡사 단테가 묘사한 지옥 같았다오. 부처가 병든 사람과 노인, 죽은 사람을 보고 인생의 본질을 고통으로 표현한 것과 동일한 사건이었다네.”


그때 철학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건가요?

“그 여행은 내가 철학자의 길을 걷게 한 씨앗이 되었지. 내가 17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아마 자살일 거야. 창고 뒤 운하에서 아버지 시신이 발견됐으니까. 안 그래도 어머니를 증오했는데, 아버지의 죽음 이후 나는 어머니를 더 미워하게 됐다오. 어머니는 독일에서 꽤 유명한 작가였지. 사교를 좋아하고 자유분방한 성격이라서 스무 살 많은 데다가 고지식한 아버지와 불화가 잦았어. 아버지가 그토록 외로워하시는데 어머니는 파티를 열고 즐거워하던 모습을 보면….”


어머니를 계속 미워했나요?

“나중엔 아예 연락을 끊었으니까. 하지만 어머니는 내 개성을 존중해 주셨어. 내가 상인이 아니라 철학자의 길을 걷도록 지지하고 응원해 줬다오. 아버지가 그렇게 세상을 떠나고 나는 의무감으로 한동안 상점에서 일을 했네. 적성에 맞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아버지 뜻을 거역하기 쉽지 않았거든. 그런데 어머니는 그런 나를 꿰뚫어봤지. 한번은 어머니가 편지에 이런 말을 남겼어. ‘눈물 흘리며 네게 당부한다. 스스로를 속이지 말고 진지하고 정직하게 너 자신을 다뤄야 한다. 네 삶의 행복이 달린 문제야’. 본격적으로 철학가가 되기로 한 건 내 나이 23세야. 삶은 추악한 것이니 그 삶을 숙고하는 것에 인생을 바치기로 했지.”


어머니 편지글대로 철학자의 길을 걸으면서 행복을 찾았는지요.

“행복을 찾았냐고? 이 세상 자체가 고통과 권태 덩어리인데 행복 타령이라니. 다만 불행에 대처하는 작은 팁을 하나 줄까? 바로 자신보다 비참한 사람을 바라보는 거라네.”


그렇다면 반대로 자신보다 행복한 사람을 바라보면 불행해지겠군요. SNS에 전시된 타인의 행복한 찰나를 자주 접하는 건 불행을 자초하는 일이라는 걸 알겠습니다.

“인간은 혼자 있으면 외로움에 떨면서 끊임없이 타인과 연결되길 원하지. 정작 함께 있으면 서로를 찔러대는 고슴도치 같은 존재이면서 말이야. 타인과 현명한 관계를 위해서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오. 사회는 불과 같다네. 영리한 자는 적당한 거리에서 몸을 녹이지만, 어리석은 자는 불을 거머쥐려고 하지. 그런 사람들은 불에 덴 후 외로운 곳으로 도망가서 불이 뜨겁다고 징징댄다오.”


1860년 9월 21일. 선생님이 세상을 떠난 날이에요. 그 며칠 전 빌헬름 그빈너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지요. 그때 이런 말씀도 하셨다죠. “나의 육체를 벌레들이 갉아먹을 거란 생각을 하면 아무렇지도 않은데, 철학교수들이 나의 정신을 난도질할 거란 생각을 하면 섬뜩해진다”라고. 결국 선생님도 끝까지 타인의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로 답을 대신하지. (모든 욕망에서 벗어나) 절대적인 무에 이른다는 것은 내겐 감사한 일이라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죽는다고 해서 그런 전망이 열리지는 않아.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나는 ‘적어도 순수한 지적 양심’을 갖고 있다고 말하고 싶네.”

참고서적

《쇼펜하우어 철학에세이》(김욱 옮김, 지훈), 《머리맡에 쇼펜하우어》(함현규 옮김, 다른상상), 《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박찬국 지음, 21세기북스), 《쇼펜하우어 전기 : 쇼펜하우어와 철학의 격동시대》(뤼디거 자프란스키 지음, 꿈결)


톱클래스 김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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