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위의 에세이

출장 통보는 항상 갑자기 온다 — 1주 전 확정, R1 데드라인과 충돌

by 묵직한 다람쥐

출장 통보는 항상 갑자기 온다.


M&A 딜이 그렇다. 이번에도 싱가포르 출장이 확정된 건 출발 1주 전이었다. 고객사와 상대방 사이의 site-visit 조율, 싱가포르 정부와의 미팅 세팅, 상사 일정까지 챙기는 logistics 전반. 앞에서 끌어야 하는 출장이었다.


문제는 타이밍이었다.


R1 지원 마감일이 싱가포르 도착 다음 날 아침이었다. 미팅 시작 전까지.


“이 학교는 포기해야 하나”


솔직히 말하면, 포기를 생각했다.


R1에 넣기로 한 4개 학교 중 하나였다. 컨설턴트 없이 혼자 준비하는 학교라 에세이도, 지원서도 전부 내 몫이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야근이 이어졌고, 공부도 병행하던 시기였다. 미리 해두기엔 여백이 없었다. 출발 하루 이틀 전부터 급하게 쓰기 시작했다.


‘일도 이 정도인데, 이 학교까지는 무리다.’


그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가, 곧 다른 생각이 왔다.


‘비행기에서 하면 되지 않나.’



MBA 에세이가 처음엔 다 비슷해 보인다.


Why MBA, Why this school, What can you contribute to our community 등


컨설턴트와 작업하면서 큰 틀은 이미 잡혀 있었다. 내 브랜딩, 내 스토리라인.


그 뼈대 위에 각 학교에 맞게 살을 붙이는 작업이 에세이다.


문제는 그 살을 붙이는 게 생각보다 공이 많이 든다는 거다.


Why this school. 이게 제일 손이 많이 가는 항목이다.


학교 홈페이지, 팟캐스트, 재학생 블로그까지 파고들어서 내 프로필과 이 학교의 가치가 어디서 맞닿는지를 찾아야 한다.


리서치 없이는 쓸 수가 없다.


그래서 와이파이가 필요했다.


컨설턴트가 봐주지 않는 학교는 그 작업을 전부 혼자 한다. T15 전체를 노리다 보니 그런 학교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우선순위가 낮거나, 내가 조금 더 잘 안다고 판단한 학교들.


이번 싱가포르행 비행기에 에세이를 들고 탄 학교가 그중 하나였다.


대한항공 와이파이, 3만 피트의 도박


대한항공에 유료 와이파이가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에세이 리서치를 위해 결제했다.


이코노미석. 좁은 접이식 테이블. 옆자리엔 모르는 승객.


비행기가 뜨자마자 노트북을 펼쳤다. 6시간 비행이 이렇게 빨리 지나간 적이 없었다. 원래라면 영화 두 편은 봤을 시간이었다.


문제는 와이파이가 너무 자주 끊겼다. 주위는 어둡고, 기내 공기는 답답하고, 도착 시간은 다가오는데 화면이 멈출 때마다 조급함이 목까지 차올랐다. 그래도 에세이 에디팅은 비행기 안에서 마무리했다. 남은 건 지원서 작성이었다.



넓은 방, 좁은 마감


싱가포르에 도착한 건 밤 11시쯤이었다.


이번 호텔은 전망이 좋지 않은 대신 방이 넓었다. 평소라면 짐 던져놓고 바로 잘 그런 방이었다. 그날은 짐을 풀자마자 평소엔 거들떠도 안 봤을 책상 앞에 앉았다.


지원서를 열었는데 예상 못 한 항목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학교에서 학업 외에 무엇을 기대하는지, 커뮤니티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지. 다른 학교들엔 없던 short answer들이 줄줄이 나왔다.


쓰다 보니 새벽 2시, 3시.


제출 버튼을 누른 건 새벽 4시였다.


4시간 자고 싱가포르 정부와의 미팅


4시간 뒤 알람이 울렸다.


피곤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개운했다.


원래 계획은 낮에 돌아와서 마저 끝내는 거였다. 그렇게 됐다면 아마 찜찜한 채로 미팅에 들어갔을 것이다. 머릿속 한쪽에 ‘오늘 밤엔 마무리해야 하는데’를 달고서.


싱가포르 정부와의 미팅, 상사를 모시고 앞에서 리딩하는 자리. 후련하게 비워진 머리로 들어갔다. 위기 앞에서 집중력이 극단으로 발휘된다는 걸, 그날 몸으로 배웠다.



행복하게 잠든 밤


사실 그 학교 지원을 포기하려 했었다.


일이 바빴고, 시간이 없었고, 출장까지 겹쳤다. 모든 조건이 ‘그냥 빼’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데 끊기는 와이파이와 싸우며 비행기에서 에세이를 다듬고, 낯선 호텔 방 책상에 새벽까지 앉아 지원서를 완성했다. 회사 프로젝트를 마무리할 때와는 다른 종류의 후련함이었다. 내 개인적인 일을 끝낸 기분.


피곤했지만, 행복하게 잠들었다.


그 학교가 나중에 어떤 의미가 될지는, 그때의 나는 아직 몰랐다.


R2는 미리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결국 그렇게 안 됐지만. 대신 다른 방법을 찾았다. 하루에 한 학교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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