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종사자가 중학교 수학 책을 다시 펼친 이유
저녁 7시, 사무실 불이 하나둘 꺼진다.
동료들은 회식을 하러 가거나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라며 퇴근한다.
나는 조용히 가방을 챙겨 빈 회의실로 향한다.
손에는 샐러드와 GMAT 공부를 위한 아이패드가 들려 있다.
낮에는 클라이언트 앞에서 수천억 원 규모의 M&A 딜 구조를 브리핑했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2x + y의 해를 구해야 하는 수험생일 뿐이다.
화려한 서울 도시 야경을 뒤로하고, 차가운 회의실 구석에서 샐러드를 씹으며 생각했다.
도대체 나는 왜 이 고생을 사서 하고 있는가.
GMAT 준비를 시작하며 가장 만만하게 봤던 건 '수학(Quant)'이었다.
학원에서나 주변 MBA를 다녀온 사람들도 그랬다.
"한국인은 수학 먹고 들어가는 거 알지?
Quant는 만점 받고 시작해야지."
나도 그렇게 믿었다.
나는 매일 숫자를 다루는 직업을 가졌으니까
하지만 모의고사 문제를 풀면서 깨달았다.
내 머리는 이미 '생각하는 기능'을 외주줬다는 사실을.
회사에서 나는 효율적인 관리자였다.
복잡한 엑셀 수식이 꼬이면? ChatGPT에게 물어본다.
리서치가 필요하면? Gemini와 함께 한다.
최근에는 그저 AI가 뱉어낸 결과물을 검토하고 '승인'하는 역할에 익숙해져 있었다.
내 뇌는 복잡한 논리 연산을 직접 수행하는 '플레이어'가 아니라, 남이 해준 걸 평가하는 '감독관'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GMAT 시험장은?
AI는커녕 계산기조차 없다.
오로지 종이 한 장과 펜, 그리고 굳어버린 내 뇌뿐이다.
문제당 2분.
그 짧은 시간 안에 직관적으로 답을 찍어내야 하는데, AI 비서 없이는 간단한 연산조차 버벅거리는 내 자신이 처량했다.
"분명 쉬운 문제인데, 손이 안 움직인다."
결국 나는 서점으로 달려가야 했다. 그리고 내 손에 들린 책은...
<중학교 1~3학년 수학 총정리>
충격적이었다.
미적분이나 복잡한 재무 모델링은 할 줄 알면서, 정작 "소금물의 농도 구하기"나 "두 기차가 만나는 시간" 같은 기초적인 문제에서 막혔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퇴근 후 회의실에 숨어 중학교 수학 공식을 달달 외우는 굴욕.
이것이 나의 MBA 준비 첫 달의 적나라한 모습이었다.
준비 3개월 차, 호기롭게 첫 시험을 신청했다.
오전 반차를 내고 시험장으로 향했다.
"한국인은 Quant가 효자 과목이니 먼저 푸세요."라는 조언을 따랐다.
(GMAT Focus는 시험 순서 선택이 가능하다)
그런데 시작하자마자 식은땀이 흘렀다.
타이머는 째깍째깍 돌아가는데, 답이 안 보였다.
긴장해서 손이 벌벌 떨렸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결과는 처참했다. GMAT Focus 기준 600점 초반.
(Top 15 학교의 심리적 커트라인은 645~655점 정도이다.)
믿었던 수학이 내 발등을 찍었다.
시험장을 나오는데 다리가 풀렸다.
"내가 고작 이거 하려고 지난 3개월 동안 샐러드 씹으며 버텼나?"
멘탈이 바사삭 부서졌다.
자괴감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응원해준 가족들과 여자친구 볼 낯도 없었다.
하지만 슬퍼할 겨를도 없이, 오후에는 다시 회사로 복귀해서 아무렇지 않은 척 엑셀을 돌려야 했다.
이것이 직장인 수험생의 비애다.
절대적인 공부 시간이 부족했다.
자문사 특성상 야근은 일상이고, 툭하면 긴급 프로젝트가 떨어진다.
예전의 나였다면? "뭐, 야근해서 끝내지."라며 느긋하게 일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내 1순위는 'GMAT 점수 확보'였다. 야근은 곧 불합격이나 마찬가지였다.
살기 위해 일하는 방식을 바꿨다.
아침 1시간: 무조건 일찍 출근해서 전과목 문제 풀기.
점심시간: 클라이언트 약속 없으면 10분 만에 먹고 공부.
업무 시간: "이건 내가 다 안고 갈 필요가 없다."
역설적이게도, 공부 시간을 확보하려고 발버둥 치다 보니 '중간관리자의 역량(Delegation)'이 늘었다.
팀원들에게 업무를 적절히 배분하고, 불필요한 회의를 줄이고, 데드라인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오직 '저녁 8시부터 12시까지 공부하기 위해' 낮 시간에 미친 듯이 몰입했다.
상사는 "요즘 일 처리가 빨라졌네?"라고 칭찬했지만, 속으론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팀장님, 저 빨리 집에 가서 이차방정식 풀어야 해요...'
물론 위기는 있었다.
갑작스러운 해외 출장이나, "3일 안에 밸류에이션 끝내" 같은 긴급 프로젝트가 떨어질 때.
며칠 동안 책을 못 펴면 불안감이 엄습했다.
"흐름 끊기면 끝인데..."
GMAT은 감각을 유지하는 게 생명인 시험이라고 생각한다.
3일만 쉬어도 뇌가 다시 굳어버리는 느낌.
그럴 때마다 포기하고 싶은 유혹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나를 다시 책상 앞에 앉힌 건 '오기'였다.
현재 "GMAT은 1년에 5번 볼 수 있다."
학교 지원 전까지 내게 주어진 기회는 총 5번.
"이 5번을 다 써보고도 점수가 안 나오면, 그때 가서 깨끗하게 포기하자. 내가 MBA 갈 그릇이 아닌 거니까."
가족들의 응원, 그리고 주말 데이트 대신 학원 앞까지 데려다주는 여자친구(현 아내)의 희생을 헛되이 할 수 없었다.
나는 다시 샐러드를 씹으며 펜을 잡았다.
지금 내 앞의 수학 문제 하나를 맞히는 게 내 인생에 제일 중요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