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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첩 Aug 02. 2019

부모님은 왜 아이스박스를 가득 채우셨을까

가족여행(1)

몇 주 전 마트에 갔다가 아이스박스 코너에서 꽤 오래 서 있었다. 내가 남편에게 작은 아이스박스 하나 사자고 해서 갔는데, 생각보다 많은 종류의 아이스박스에 그만 구경 삼매경에 빠져버렸다.

당장 쓸 일이 없다고 판단해 결국 사지 않고 돌아왔다. 놀러 갈 때 뭔가를 싸가지고 다니지 않으니  필요할 것 같지도 않고, 당장 시원하게 옮겨야 하는 뭔가도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집도 넓지 않아 둘 곳도 마땅치 않다는 것도 이유였다. (하지만 결국 그다음 주 주말에 샀다)


그 옆에는 안에 생긴 물을 뺄 수 있는 배수구까지 달린 큰 아이스박스가 있었는데, 그걸 보고 있자니 어렸을 적 부모님과 연필이와 함께 놀러 다니던 게 생각났다. 저렇게 큰 아이스박스에 음료수, 과일부터, 다듬은 파, 양파, 마늘, 버섯, 당근 같은 야채들, 절인 깻잎, 마늘장아찌, 김치 같은 것들을 가득 넣었다. 큰 배낭과 바구니 여러 개에 과자와 쌀, 참치, 라면 같은 것부터 옷가지와 세면도구 같은 걸 가득 싸서 차에 싣고 놀러 다녔다. 자주 아프다고 하는 예민한 아이와 말을 해도 잘 듣지 않고 어디론 가 뛰어 도망가길 잘하는 아이를 차에 태우고 봄이면 날이 따뜻해져서, 여름이면 시원한 데로 간다고, 가을에는 단풍 구경하러, 겨울에는 눈 구경할 겸 집을 나섰다. 산, 계곡, 바다, 동굴, 유적지 같은 데도 갔고, 아주 먼 곳의 그냥 주택가의 시장 같은데도 갔다. 정처 없이 아빠가 운전하는 대로 길에서 보내는 시간도 길었다.


그때의 부모님 나이가 된 나는 그렇게 할 자신이 없다. 챙길 아이나 반려동물도 없이 남편과 나 둘 뿐인데도 뭔가를 챙겨서 어딘가로 놀러 가는 것은 귀찮고 힘들다. 결혼한 첫 해에 간단히 준비해 간 적이 있지만(그래 봤자 간단한 아침거리와 간식 정도였다) ‘아, 이제 그냥 웬만하면 사 먹든지, 사서 만들어 먹어야지’라고 생각한 경험이었다. 어딘가 여행을 가면 근처 마트나 시장에서 간단히 해 먹을 것을 사긴 하지만 그렇게 엄청난 양을 다 싸 가서 해 먹진 않는다.


비슷한 과자 말고 바로 그 과자여야


부모님이 이렇게 일정 내내 먹을 걸 다 싸 갔던 이유는 이런 게 아니었을까.

먼저 시대적인 이유. 내가 어렸을 때는 마트가 전국적으로 있는 건 아니라 대도시가 아닌 곳에 가면 손쉽게 장을 볼 수가 없었을 거다. 인터넷도 잘 없거나 초창기 시절이라 바로바로 그 위치에서 가까운 상점 등을 검색하기도 힘들었다. 시장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시장에서 채소를 사서 손질하려면 시간도 많이 걸릴 테니 아예 손질해 싸가지고 가는 방법을 택하셨을 거다. 물론 마트가 흔하지 않을 시절이니 반(半) 조리 제품이나 손질 재료 같은 건 찾기 힘든 게 당연했다. 사 먹는 방법도 여의치 않았는데, 인터넷 보급 시기에는 검색을 해도 많은 양의 자료가 나오지 않았고 인터넷이 보급되기 전에는 그마저 찾아볼 수 없었다. 미리 검색을 해서 가도 식당이 없어져 버린 경우도 있었다. 외식 메뉴도 다양하지 않았고, 눈앞에 보이는 식당도 맛있는지 아닌지 들어가기 전에 알기 힘들었다.

둘째 이유는 연필이의 식사다. 이것이 사실 더 큰 이유였을 거다. 연필이가 잘 먹지 않을까 봐, 연필이가 먹을 만한 식당을 제 때 찾지 못할까 봐 부모님은 걱정을 많이 하셨을 거다. 연필이가 좋아하는 과자를 찾을 때, 그걸 못 사주면 한바탕 난리가 나기도 할 거고. 예를 들어 연필이가 A회사에서 나오는 감자칩을 좋아해서 그것만 먹는다면, 아무리 비슷한 B회사, C회사에서 나오는 감자칩이 있어도 A회사 감자칩만을 원한다. 시골 가게에 A회사의 감자칩이 없다면… 가족 모두 아주 슬픈 상황이 되겠지.


아이스박스 안은 생각보다 오랫동안 시원하게 유지됐다. 얼음을 얼리고, 큰 물통에 물을 얼려서 다니다가 녹으면 물도 먹고, 먹지 못하는 얼음이 녹은 물은 물이 빠지는 꼭지를 열어 한 번씩 빼 주곤 했다. 그러다 ‘어름’이라고 주로 쓰여 있는 얼음 파는 집에서 얼음을 한 덩이씩 사서 넣었다. 물론 나와 연필이가 조금 더 자라고 나서는 냉장고가 잘 갖춰진 숙소를 이용해 얼음을 중간에 한 번씩 살 일도 없어졌고, 사 먹을 곳도 더 늘었고, 바로 장 봐서 해 먹을 수 있는 것들도 늘어서 빨갛고 큰 아이스박스는 추억 속으로 잊혔다.


먹을 수 있는 게 늘수록 하기 싫은 것도 늘었다


연필이는 그럭저럭 잘 다녔다. 나보다 산을 더 잘 올라갔고, 물놀이도 잘했다. 스키도 신겨 놓으니 알아서 눈을 제치며 탔다. 유람선에서 바람맞으며 사진도 잘 찍고, 놀이동산 공중에 떠 있는 레일을 따라 자전거처럼 페달을 밟아 앞으로 나가는 것도 겁내지 않았다. 미끄러운 동굴 바닥도 잘 다녔다. (나는 몇 번 미끄러져 넘어졌다). 몸을 움직여 어딘가를 다니는 것은 나보다 더 잘했다.


그런데 연필이가 좋아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차 타고 창 밖 보기,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이불 펼쳐 눕기(또는 침대에 눕기), 숙소 소파 등받이 위로 올라가 좁은 등받이 위로 묘기하듯 길게 눕기, 가끔 마른 욕조에 옷 다 입고 들어가 눕기(가끔 그러다 잠듦).

 그런데 연필이가 자랄수록 하기 싫어하는 게 점점 늘었다. 위에 말한 것들은 계속 좋아했지만, 스키나 인라인스케이트를 신지 않으려 하고, 배 타는 걸 무서워하고, 높은 곳에서도 잘 밟던 페달을 레일바이크에서는 밟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레일바이크는 중간에 내리기 힘들어 더 괴로워했다) 먹을 줄 아는 것의 종류는 늘었고, 산만한 것도 덜해졌지만 겁이 많아진 걸까.


연필이는 여전히 어딘가 놀러 가고 싶을 때는 "아이스박스!"라고 주문처럼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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