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 때문에 생긴 장점(2)
몇 년 전 일. 약속 장소에 일찍 도착했다. 시끄러운 고깃집에서 딱히 할 일도 없네. 회사 일 조금만 해 둬야지. 하다 보니 앞에 친구가 와 있다. 그러고 보니 잠깐 한다는 게 거의 다 해버렸네.
"엇, 미안. 언제 왔어?"
"방금. 불러도 모르길래 그냥 앉았다. 일 하고 있었냐?"
"응. 거의 다 했어."
"카페에서 일하는 사람은 봤어도 고깃집에서는 처음 보네. 그것도 그 조그만 폰으로."
아예 안 쓰이는 건 아니지만 남들보다는 비교적 신경을 덜 쓰는 편이다. 소란스러운 카페는 물론 지하철, 술집, 패스트푸드점 등. 나에게 직접 말을 걸지 않는 이상 별 상관없었다. 그래서 소음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학교 시험 기간에는 짬 날 때 시험공부를 했고, 스마트폰이 생기고 나서는 작은 폰을 보며 틈틈이 일을 했다.
회사에 손님이 찾아오거나 공사를 하는 등의 조용하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의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동료들은 사무실에서 태연하게 일하는 나를 신기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소음이 너무 커서 집중이 안 된다며 빈 회의실 등으로 짐을 가지고 잠시 자리를 옮겼다. 나도 가끔 다른 곳으로 옮겨 일을 했는데, 그 이유는 소음 때문이 아니라 다들 자리를 비우니 사무실 전화를 받아야 하거나, 부서에 뭔가를 물어보는 타 부서 사람들이 내게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너무 자주 말을 해야 해서 일 할 시간이 없어졌다) 물론 그렇다고 집중력이 좋은 건 아니다. 집중을 하는 데 소음이 크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일 뿐.
나는 예민하다. 냄새에도, 맛에도, 촉감에도, 눈에 거슬리는 것에도 예민하다. 어떤 일을 생각할 때도 예민하다. 사실 소리에도 예민하다. 익숙하지 않은 소리에는 조금 더 신경이 쓰이고 조금이라도 볼륨이 올라간 상태가 싫다. 하지만 익숙한 소리는 그렇지 않다.
반복적으로 같은 말을 하는 것은 자폐성 장애의 특징이다. 연필이는 어렸을 때부터 소리를 많이 냈다. 꼭 단어가 아니어도 반복적으로 어떤 소리를 냈다. 집에서 부모님은 큰 소리를 내거나 해서 남들에게 피해 주는 것만 제재했다. 작은 소리로 연필이가 반복적으로 소리를 내는 것을 못하게 하지 않았다. 소리를 내지 못하게 억압하면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고 좋지 않은 영향을 받을 거라 생각하셨겠지.
연필이는 뭔가를 원하면 계속 울기도 했다. 원하는 걸 바로 충족시켜주면 다행인데 그렇지 못한 경우 몇 시간이든 울음소리를 들어야 했다. 해결해줄 수 없는 문제의 예를 들면, 껌 통에 들어있던 방습제가 마음에 들어서 서랍장 위에 곱게 모셔놓고 놀다가 좀 낡은 것 같을 때 새로 방습제를 달라고 했다. 그 사이에 그 껌에 든 방습제 디자인이 바뀌었다. 바뀐 디자인 말고 그 전 디자인의 방습제를 달라고 하는데 그걸 살 수 없는 뭐, 그런. 연필이가 점점 자랄수록 소리도 커졌다. 울음소리 역시 커져서 방문을 닫는 정도로는 소리가 작아지지 않았다.
수시로 방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연필이가 문을 두드리거나 잠긴 문 손잡이를 돌리며 쾅쾅거릴 때도 많았다.
문을 다 열어주고서는 할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안 들리듯 내 할 일을 하자. 나는 연필이의 소리에 익숙해져야 했다. 그래야 나의 일상생활도 해 나갈 수 있었으니까. 나는 집중해서 만들기 숙제도 해야 했고, 수학 문제도 풀어야 했다. 음악도 듣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