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어린시절에 책은 정말 재밌는 친구였습니다. 게다가 도움되는 친구였지요. 저는 학창시절에 다행히도 크게 스트레스 받지 않고 공부했는데, 8할은 독서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엄마로서 내 아이들도 책과 친해지면 좋겠다는 욕심을 당연히 갖게 되었지요. 아이들 어릴 때부터 어떻게 하면 최적의 독서 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라, 실패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힌트는 어린 시절에서 얻었습니다. 집에 책은 많았지만 "책을 읽어라"는 잔소리를 들은 기억은 없습니다. 책을 좋아했지만 책만 파고 살지는 않았습니다. 하루 종일 동네를 뛰어다니며 놀았고 동생과 컴보이, 재믹스 같은 전자오락게임도 많이 했지요. 독서는 생활의 일부일 뿐이었습니다.
'일부'일 뿐이지만, 꾸준히 늘 함께하는 일부였습니다. 늦은 오후면 엄마, 동생과 함께 비디오 대여점에서 주성치 나오는 홍콩영화를 빌리고, 책 대여점에서 각자 책을 한두권 씩 고른 후 동네슈퍼에서 간식을 사 와서 함께 봤던 기억이 납니다. 비디오도 재밌고 게임도 재밌고 책도 재밌었지요. 여러가지 재밌는 놀이 중 하나가 독서였습니다.
빙고! 방향을 잡았습니다. 독서를 따로 챙겨야 할 '공부'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생활의 일부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야 즐겁게 푹 빠질 수 있고, 평생의 친구가 될 수 있겠지요.
저는 책욕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욕심'이라고 한 이유는 소유욕이기 때문이에요. 사실 저 자신은 책 많이 안 읽습니다. 업무상 워낙 많이 읽고 쓰고 서류뭉치에 둘러싸여 살아서인지 쉴 때는 다른 거 하고 싶어요. 하지만 아이들 책들 보면 얼마나 욕심나던지요. 아이들 대학 갈 때까지 사 줄 책들을 미리 다 리스트로 만들어 두고 인터넷 서점 미리보기로 틈틈히 봅니다. '아 사고싶다 사고싶다 사고싶다….'하면서요.
그런 사람이기에 아이 갓난아기 때부터 유명한 동화 전집들을 다 알아두고 책책책 알아봤지요. 그런데 영유아의 발달에 관한 글들을 보니 미취학 시기의 아이들에게는 글로 배우 것보다 훨씬 중요한 발달의 단계들이 있다는 겁니다. 아이들을 문자의 세계에 일찍 들여놓지 말라네요? 심지어 책이 그 시기에 필요한 두뇌 발달을 방해할 수 있다고까지 합니다.
이거시 뭔소리여 싶어 이리저리 반대의 주장들도 알아보고 고민했습니다. 생각해보니 독서는 그 행위 자체로서 무슨 절대적 가치를 지닌 것이 아닙니다. 생각하며 놀게 해주는 '도구'이지요. 과연 아이가 세상을 모르는 백지상태에서 독서를 즐길 수 있을까요. 기쁨과 슬픔을 알아야 책 속의 인물에 공감할 수 있고,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있어야 새로운 지식이 재밌는 겁니다. 책에 앞서 사람과 세상을 먼저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글과 독서는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아이들 취학 전에는 부모와 최대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에만 신경쓰고, 그냥 많이 웃고 놀고 장난치도록 놔 두었어요. 한글도 안 가르쳤는데 일곱 살 되니 어린이집에서 배워 오더군요.
유아동기에는 독서 그 자체보다는 책과 친해지는 것을 제1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책=장난감'이라고 생각하니 쉽더군요. 거실 책장 대부분을 장난감으로 채운 후 두 칸 정도 책을 섞어 넣었습니다.
책이 장난감을 압도하지 않도록 책의 총량에 제한을 두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 욕심에 온 집안을 책으로 채워버릴 위험이 있었거든요. 아기 때 60권 정도 좋은 단행본들을 엄선해서 골라 산 후, 계획대로 7살까지 그 책들로만 읽혔습니다(틈틈히 추가된 게 대략 10권 정도 됩니다).
그리고 장난감과 똑같이 취급했습니다. 따로 독서시간을 두지 않고 그냥 편한 시간에 장난감 갖고 놀다가 책도 보다가 그랬어요. 그랬더니 아이도 장난감처럼 책을 갖고 놀더군요. 책으로 성도 쌓고, 집도 만들고, 소꿉놀이 쟁반으로도 쓰고 레고놀이 깔판으로도 씁니다.
아이들이 7살에 글자를 배웠기에 두 아이 모두 7살까지는 혼자 독서한 일이 별로 없습니다. 엄마아빠, 할머니가 읽어주는 것이 당연했지요. 놀고 장난치는 시간에 비하면 책읽는 시간은 단연 적었습니다. 하루 평균내면 20분도 채 안 되었을 거예요.
책이 적다 보니 좋은 점이, 그렇게 게으름 피며 가끔 읽어줘도 맨날 그 책이 그 책인지라 자연스럽게 여러 번 반복하게 되더군요. 그러다보면 좋아하는 장난감처럼 좋아하는 책이 생기고, 사연도 생기고 그렇게 됩니다. 우리 아이들은 그렇게 책과 친해졌습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아이들은 10살, 8살인데 어릴적 독서환경은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책의 양은 늘었지만 여전히 장난감들과 한 공간에 있습니다. 독서시간은 노는 시간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하루 1시간 하는 식으로 꾸준히 독서하는 것도 아닙니다. 열 권 넘게 펼쳐놓고 이리저리 읽는가 하면, 다른 놀이에 빠지면 며칠씩 책은 손도 안 대는 날도 많습니다.
아직도 하루 평균내면 독서시간이 1시간도 안 될 겁니다. 하지만 저는 만족합니다. 제가 1순위로 둔 목표를 챙기고 있으니까요. 아이들은 장난감만큼 책을 좋아하고, 스스로 원해서 읽습니다. 그거면 됩니다.
아이들 방이 따로 있지만 평범한 집이다 보니 거실이 집에서 가장 넓고 쾌적한 공간입니다. 아이들은 낮동안 거의 거실에서 놀지요. TV를 조금씩 보여주다보니 언제부턴가 자기들 맘대로 리모콘을 들고 켜 보더군요. 하루 30분이던 것이 어느새 1시간, 2시간 되다보니 안 되겠다 싶어 TV를 작은방으로 치운 것이 3년 전입니다.
깊은 생각이나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일단 눈에 안 보이게 하자는 생각으로 치운 것인데, 생각보다 훨씬 드라마틱한 변화가 생겼습니다.
우선 아이들이 TV를 보여달라고 떼를 쓸 줄 알았는데 전혀 찾지 않더군요! 마치 처음부터 TV 없이 살던 애들처럼 깡그리 TV를 잊고 거실에 있는 것들로만 재밌게 놉니다. 어떤 분이 애들 머리는 금붕어 수준이라 눈에 안 보이면 까먹는다더니 정말 그런 것인지(ㅋㅋ)?
진작에 TV를 치울 걸 싶을 정도로 집안 전체의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거실에는 장난감과 책 뿐이지요.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 갖고 놉니다. 레고하다가 책 보고, 그러다 그림 그리고, 그러다 또 책 보고, 이불로 텐트치고 책으로 벽 쌓고, 그러다 또 책 보고, 소꿉놀이하고…….
굳이 엄마가 책 읽어라 뭐 해라 할 필요 없습니다. 엄마의 역할은 나쁜 것을 치우고 좋은 것을 옆에 놓아 주는 것, 딱 거기까지입니다. 그 다음은 아이에게 맡겨두면 됩니다. 놀아달라면 놀아주고 혼자 잘 놀면 방해하지 않습니다. 장난감이 열 개든 한 개든 애들은 있는 걸로 잘 놉니다. 저 어릴 적 생각해보면 돌멩이와 풀, 빨간 벽돌가루랑 버린 나무젓가락만 있어도 하루종일 신나게 소꿉놀이 했거든요. 아이들은 그런 엄청난 능력자들입니다.
참, TV를 아예 빼앗자니 좀 미안해져서 일요일에 각자 좋아하는 프로 하나씩 보여줍니다. 엄청 좋아라 하며 봅니다. 그럼 뭐해요 월요일 되면 또 까먹고 안 찾습니다. 금붕어 맞아요.
전 아이들이 책을 사랑하기를 너무나 바랍니다. 그래서 '책 좀 읽어라'를 금칙어로 정해놓고 아직까지는 (힘겹게) 지키고 있습니다. 하루에 몇 권처럼 목표를 정하거나 책을 읽은 것 자체를 칭찬하지도 않습니다. 책을 얼마나 읽었는지, 그 내용을 제대로 파악했는지도 전혀 확인하지 않습니다. 독후활동 안 합니다. 제가 먼저 묻는 일은 없고, 아이가 와서 이야기하면 들어주고 질문에 답해줄 뿐입니다.
영어를 가르칠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매일 2시간씩 스케쥴을 따라가도록 강제했고, 뭐든 영어 비슷한 것만 따라해도 폭풍칭찬하고 그럽니다. 그건 공부고 기술이니까요. 잘 하면 좋고 못하면 아쉽지만 사는 데 크게 지장 없는 그런 것들 중에 하나일 뿐이지요.
하지만 독서는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아이들 보면 정말 눈이 반짝반짝 머리가 빛의 속도로 돌아가는 게 보이거든요. 이런 시기에 독서를 놓친다는 것은 정말 아까운 일입니다. 독서를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하는 숙제나, 혹은 칭찬받기 위해 좋아하는 척 하는 대상으로 만들기 싫습니다. 내 스스로 찾는 즐거운 놀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게 제 원대한 목표입니다.
책을 읽으라고 하지 않으면서도 책을 읽게 만드는 것이, 말만 들어도 어려운데 실제는 얼마나 더 어렵겠습니까. 제가 그걸 해 냈다는 게 아니고 어디까지나 진행형입니다. 큰아이 곧 4학년 되는데 아직도 유치원생처럼 해맑게 놀기만 해서 책 좀 더 읽었으면 욕심이 납니다. 그치만 꾹 참습니다. 좋은 책 슬그머니 옆에 놔 두고, 가끔 앞 부분만 읽어줘서 궁금하게 만들고, 책장에 책 위치 바꿔 가며 관심 좀 끌어보려는 그런 잔머리들 쓰면서 버티고 있습니다.
어른이 보기에는 그냥 다 초딩이지만, 어릴 적을 잘 돌이켜 보면 초등 1학년과 2학년이 다르고, 3학년은 또 다릅니다. 큰아이는 글밥이 많거나 어려운 용어가 나오는 책을 무서워하지 않아서, 초딩 1학년 주제에 궁금한 내용이 있으면 딱딱한 백과사전(물론 초등용이지만)을 그냥 소설책처럼 들고 30분 1시간씩 쭉쭉 읽고 그랬어요. 자랑하는 거 아닙니다. 좋은 방향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러는지 알거든요. 정독하지 않고 속독해서 원하는 부분만 읽어대서 그런 겁니다.
제가 어른의 입장에서 초등 저학년용 도서를 다시 읽어보니 정말 감탄이 나옵니다. 8세 수준에 맞추면서도 재미와 감동을 담으려면 천재적인 작가의 역량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학년용 도서는 책을 잘 골라야 합니다. 작가에 따라 수준 차이가 커요. 필리파 피어스의 책처럼 입이 떡 벌어지며 작가가 신처럼 보이는 책이 있는가 하면, 참고 참고 읽어도 끝까지 일관되게 시시한 책도 참 많지요.
1학년이 빡빡한 백과사전을 들고 읽어봤자 그냥 '읽을' 뿐입니다. 날고 기어봤자 정신연령은 1학년이에요. 특히 남자애들은 더 어립니다. 책을 제대로 즐기고 읽으려면 제 나이에 맞는 좋은 작품들을 골라주는 것이 맞습니다.
제가 책 욕심이 많아서 좋은 작품들을 애들 클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자꾸 미리 사 버리곤 합니다. 큰애가 그걸 알고 그 책들을 호시탐탐 노리더군요. 책장 깊은 곳에 넣어두고 꺼내주지 않았는데, 몰래 꺼내보길래 비닐로 싸서 테이프로 꽁꽁 묶어두었어요.
고학년용 책은 저학년용보다 주제나 내용 자체가 자극적입니다. 그런 것에 일찍 맛들이면 저학년용 문학도서는 시시해서 못 읽습니다. 어른들도 무협지만 보다가 고전소설 보면 잠 오잖아요. 똑같습니다.
그래서 한글책이든 영어책이든, 수준을 넘는 책은 미리 읽히지 않는 것이 제 방침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고학년 때 책 많이 읽는다고 칭찬받으니 우쭐해서 자꾸 어려운 책들을 골라 읽었거든요. 지금 돌이켜보면 그건 제대로 된 즐거운 독서가 아니었습니다. 괜히 그런 책들 기웃거리다가 그 나이에 맞는 좋은 작품들을 읽을 기회만 날려버렸지요. 제 아이들은 그런 실수를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부끄럽지만 독서가 중요하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을 뿐 제대로 된 독서지도 교육은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몰랐는데, 훌륭하신 분들의 글을 보니 아이가 한글을 깨치더라도 초등시절에는 부모가 읽어주는 것을 병행하는 것이 좋다더군요. 아이가 스스로 글을 읽고 나서는 제가 읽어주는 경우가 별로 없었는데, 위와 같은 내용을 읽고 나서 큰아이 1학년때 오랜만에 책을 읽어줘 봤습니다.
아이가 정말 좋아하더군요. 이제껏 안 읽어준 것이 미안할 정도로 말입니다. 아이만 재밌는 것이 아니라 저 역시 즐거웠습니다. 아기 때 그림책 읽어주는 것과는 또 다른 재미가 있어요. 초등 저학년용 책이라도 훌륭한 고전은 어른인 제 눈높이에서 봐도 충분히 재밌거든요. 재밌는 영화를 함께 보며 웃는 것처럼, 책을 읽는 즐거움을 이렇게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새로 배웠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제가 욕심만큼 잘 실천하고 있지는 못합니다. 우선 글밥이 많다보니 단편 한두개만 읽어도 30분 이상입니다. 애들이 둘이라 한 권씩 골라오면, 조금씩만 읽어도 한시간은 우습게 넘깁니다. 한시간 반 동안 소리내어 책 읽어 보셨나요ㅠ.ㅠ 제 비루한 체력과 나약한 의지로는 자주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끈을 놓으면 안 됩니다. 제가 해 보니까요, 너무너무너무너무 좋아요. 그 자체로 즐거운 시간일 뿐만 아니라, 책과 친해지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전략적으로도 좋습니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에밀은 사고뭉치』처럼 맛깔나는 책을 읽다보면 중간중간에 엄마랑 아이가 함께 깔깔대며 웃을 수밖에 없게 되는데, 그러면서 '책은 이렇게 즐거운 것이다'를 몸소 보여주게 되거든요.
흔히 아이가 책을 읽게 만들려면 부모가 먼저 독서하는 모습을 보이라고 하는데, 제가 해 보니 그보다 더 좋은 게 바로 이렇게 함께 읽는 방법입니다. 그냥 재밌어요. 다른 말이 더 필요 없지요.
이 부분의 실천을 위해서는 욕심을 버리는 게 중요합니다. 자주 읽어줘야 한다는 부담감, 재밌게 잘 읽어줘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으면 즐겁게 못합니다. 핵심은 '잘' 하는게 아니라, '즐겁게' 하는 겁니다. 저도 일주일에 한번 하면 많이 하는 편이에요. 더 자주 읽어주면 좋겠지만 나도 살고 봐야지요. 꾸준히 하지 못하더라도, 단 한두 번만으로도 훌륭한 효과를 볼 수 있는 방법이므로 적극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