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밥반찬 다이어리 Jan 26. 2024

36. 이러면 점수 깎입니다

시험 시작과 함께 받아든 A4용지에는 비상스트레이트 식빵의 계량 레시피와 유의사항이 빼곡히 적혀있었지만 내 눈엔 뿌옇게만 보였다. 하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시험점수에 포함되는 복장 조건 때문에 하얀색 조리복과 위생모자를 갖춰 쓴 수험생 15명 정도가 일사불란하게 밀가루, 설탕, 이스트 등의 재료가 놓여진 쪽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뒤쳐지면 불합격에 가까워지는 것이므로 나도 뒤이어 용기들을 들고 허겁지겁 그쪽으로 달려나갔다.



그 때의 나를 더듬어 기억해 보건대 필시 영락없이 어설픈 초짜의 모습이었다. 20여년의 오랜 회사생활에서 비교적 익숙한 일을 오래하다보니 어설펐던 시절의 나는 기억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렇다. 모든게 그렇게 다 유연할 수는 없었다. 

익숙함에서 오는 착각 속에 나는 더 자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정해진 시간 안에 재료들을 담아와서 저울에 올리고 계량을 마치면, 시험감독이 적혀진대로 계량을 했는지 검사를 하고는 1차 점수를 매긴다.

계량을 하면서 혹시나 조리대 위에 재료들을 흘리면 안된다. 그렇게 떨어진 밀가루나 부재료의 손실은 반죽과 완성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저울에 밀가루 올려보세요. 그다음 이스트, 설탕도 올려주세요."

소음 하나 없는 밀실에서 감독관의 목소리만 울려댔다.

밀가루가 담긴 통을 올렸는데 그램 수가 조금 모자랐고, 긴장감은 그 숫자의 몇곱절로 느껴졌다.

첫 관문부터 실격의 가능성을 획득한 채로 시작하니 더욱 머리가 굳는 느낌이었다.


재료 계량 테스트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빵 만드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밀가루가 담긴 통을 조리대 끝에 위치한 반죽기에 털어 넣는데 주체없이 손이 떨리기 시작했고, 진정하려고 해도 수전증이 멈출 줄 몰랐다. 그러다 그만 밀가루가 반죽기 옆으로 새어 흘러 바닥이 순식간에 군데군데 하얗게 뒤덮혔다.

검은 바닥에 사방으로 뿌려진 밀가루는 더없이 순백의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얼굴에 열이 화끈 올라왔다.

감독관이 볼까봐 노심초사 하는 마음으로 준비해온 행주를 쥐고 바닥을 닦으려는 순간 등 뒤로 무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 밀가루를 바닥에 그렇게 떨어뜨리면 안됩니다. 그렇게 하면 위생점수에서 깎여요."


그렇게 시작부터 겹겹이 마이너스 점수를 깔고 만들어진 식빵은 우여곡절로 완성은 되었지만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시험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인생에서 한번도 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을 통해 낯선 좌절을 맛봤고, 처음 겪어본 강도 높은 수전증에 당황함을 느끼며 쓸쓸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매거진의 이전글 35. 난생 처음 실기시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