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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밥반찬 다이어리 Feb 09. 2024

37. 떨어질 걸 알면서도 보는 시험

밀가루를 뒤엎는 실수를 했기에 시험 결과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막상 불합격이라는 글자를 두 눈으로 확인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실력이 미치지 못해 떨어진게 당연한데도 마음속에 깔려있는 오만함은 불합격을 인정하려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 마음 끄트머리에는 "그래도 처음이니까" 하는 스스로의 위안이 낙하하지 않기 위해 대롱대롱 걸려있는 것 같았다.


실제로 처음이니까 그럴 수 있고 물리적인 연습 시간도 짧긴 했다.

그런데 중요한건 나는 제과제빵쪽 취업 목적으로 수업을 들으러 온게 아니었다. 

"내가 왜 목적하지도 않은 이 시험의 당락에 기분이 왔다갔다 해야하는거지?"

퇴사한 이후 나를 찾기 위한 여정의 첫 코스이며, 쉼과 배움의 연결선 상에서 호기심으로 등록한 이 과정을 어느샌가 나는 묵직한 수험생 코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학원에서 배우는 과정은 모두 시험으로 연결되어 신청을 해야했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도 나의 몫이 되었다.


첫번 째 시험 탈락의 결과를 받아든 지 오랜시간이 지나지 않아 두번 째 실기시험을 접수했다.

시험에 별로 응시하고 싶않았지만 관성적으로 이번에는 붙겠지 하는 근거없는 희망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두번 째 제빵 시험을 앞두고 알아야될 빵 만드는 순서나 반죽 방법, 발효 상태, 오븐 온도 맞추는 방법에 대한 이론을 유튜브로 몇번을 시청했다.


이론적인 내용을 머리에 넣고 실습을 하며 몸으로 익혀야 하는데, 집에서는 반죽할 공간이나 도구들이 마땅치 않았다.

아니 사실 그보다 밀가루가 날린 집을 청소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귀차니즘이 끝내 밀가루 봉지를 열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번에도 학원에서 자격증 시험 직전에 연습한 것이 실기 연습의 전부가 된 채 평가를 앞두고 있었다.

"제발 간단하고 쉬운게 나오길"

다행히 첫번째 시험 때 사둔 실습도구들이 그대로 있었기 때문에 두번째는 준비할 게 별로 없었다.

그래도 당일 시험장을 가는 길에 챙겨간 도구들은 여전히 무겁고 성가시게 느껴졌고, 그건 내 마음의 무게와도 같았다.


시험 시간보다 조금 여유있게 도착해 그 동네에 있는 스벅에 앉아 종목 레시피가 적힌 종이들을 펼쳤다.

시간이 임박해서 레시피 순서를 외우는데 초집중해야 되는 상황이었지만 주변에 앉은 여자들의 대화 소리에 귀가 더 집중되었다.

재테크가 어떠니 누가 뭘 해서 돈을 벌었다느니, 부자가 되는 거에 크게 관심이 없는 나로서는 그런 대화를 듣고 있자니 마치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들처럼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 대화가 사실이라면 그들은 나보다 어린 나이에 상당한 부를 축적한 상태였고, 나는 중년의 나이에 전혀 보장받지 못한 미래를 향해 이제 막 바닥을 딛어 새로운 인생의 길로 들어서려는 상태였다.

순간 어떤것이 더 비현실적인가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결국 집중해서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고 맘 편히 놀지도 못한 채로 시간만 멍하니 보내다 시험시간을 맞이하고 말았다. 

시험 점수에 마이너스가 되지 않기 위해 나는 조리복과 모자를 챙겨쓰고 시험실로 입실했다.

시작을 알리는 감독관의 소리와 동시에 시험 과목이 오픈되었다.


"단팥빵"

절망적이었다. 빵집에서 단팥빵을 사 먹을때는 전혀 알지 못했던 그 복잡한 레시피의 세계를 하필 시험과목으로 맞닥뜨리다니.

사실 단팥빵은 만드는 과정이 오래 걸려서 까다로운 과목에 속했고 난이도가 꽤 있는 편이었다.

"하 왜 하필 단팥빵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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