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부장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빛을 보지 못한 듯한 물건들을 욱여넣은 상자를 들고 주춤주춤 자리에서 나와 하얗게 질린 낯빛으로 직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간 여러분들과 함께여서 좋..았스읍니다. 건강하게 자.잘 지내길 바랍니다.”
미리는 멍하니 고부장의 손에 들려진 상자를 보며 생각했다.
‘드라마에서도 회사를 떠나는 사람한테 저런 박스가 들려 있었는데 저 박스는 언제 구했을까?’
고부장은 중력방향으로 축 늘어져 힘이 빠진 어깨를 억지로 곧추세운 채 사무실 문 밖으로 향했다.
“부장님.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건강하십쇼.”
“고부장님. 아휴. 그. 저 잘 지내세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던 직원들의 말소리가 고부장의 등 뒤에 연속적으로 울렸다.
몇 년을 같이 일하며 얼굴을 찌푸리던 고부장이 불과 2시간도 안되서 사라졌고, 사람들은 그 쌀쌀한 눈초리를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약간의 안도감을 느끼는 듯 했다.
회사원에게 이런 사건은 엄청나게 큰 일이지만 결국 홍대리도 미리도, 그 외 회사 사람들도 자리에 하나 둘 앉아서 다시 평상시와 다를 바 없이 모니터를 바라봤다.
“위잉”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에서 요란하게 진동이 울려댔다.
“여보세요? 아 금형님. 무슨 일 있어요?”
“미리님. 네. 저 금형이에요. 오늘 저녁에 잠깐 볼 수 있어요?”
순간 미리는 오늘 입은 옷과 머리를 떠올리며 갸웃했지만 대답이 앞서 튀어나왔다.
“네. 지난 번 거기서 봐요.”
제법 차가운 바람이 이제 겨울이라는 걸 실감하게 하는 저녁의 퇴근 길이었다.
늘 고부장에게 퇴근 인사를 하고 나오던 미리는 빈 자리를 쳐다보며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실감했다.
미리는 왜인지 오늘따라 금형이 더욱 보고싶은 마음에 빠른 걸음으로 주점을 향해 달려갔다.
금형은 멀리서 달려오는 미리의 모습에 웃음 지으며 가게 문 앞에서 그녀의 어깨를 에워감싸며 안으로 이끌었다.
“사장님. 여기 나마비루에 가라아게, 그리고 명란구이 부탁드립니다.”
“아. 금형님. 나 정말 이렇게 먹고 싶었는데 내 속에 들어갔다 나온 줄 알았어요.”
“미리님. 저 오늘 무슨 일 있었는지 알아요?”
“아뇨. 얼른 말해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