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간 회사에 출근하면서 나는 화장을 집에서 미리 다 하고 나온 적이 거의 없었다.
준비성이 철저한 사람이나 외모에 투자를 많이 하는 사람들은 집에서 메이크업을 다 마치고 출근하지만, 내 경우는 아침마다 빠듯하게 일어나서 준비하다보면 늘 시간에 쫒겨 나오기도 바빴기 때문에 그렇지 못했다.
한마디로 좀 게을렀다고 해야될까.
그러다보니 회사에 도착하기 전까지 화장을 끝내야 하는데 궁여지책으로 천상 대중교통 내에서 할 수 밖에 없었다.
회사 출근은 주로 버스를 이용했는데 그나마 좌석 구도가 맞은편으로 배치된 지하철이 아니라 덜 민망했다.그 점이 조금이나마 위안이었고 안도감을 주었다.
아무리 내가 대중교통에서 화장을 하는 낯 두꺼운 인간이라 해도 눈치를 보거나 의식은 했기에, 화장을 하기 전에 주변을 싹 둘러보는 버릇이 있었다.
그 와중에도 나의 이런 모습을 보고 혼을 낼거 같은 인상을 가진 어르신이 보인다거나, 무섭게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화장의 속도를 늦추거나 중단하기도 했다.
흔히 대중교통에서 화장을 하는 행위는 술집 여자라는 둥 교양이 없다는 둥, 예절이 없는 사람으로 불렸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런 나의 행동으로 인해 불쾌하거나 눈살을 찌푸리는 분들도 계셨을 것이다. 참으로 미안한 일이다.
그럼에도 솔직히 사람 습관이란 것이 금방 바뀌지는 않아서 나는 꽤 오래 그렇게 해왔다.
여하튼 그날도 바삐 집에서 나와 셔틀버스를 타고 출근하는 중에 평소와 같이 화장품 파우치를 가방에서 반쯤 꺼내 슬슬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피부화장은 집에서 하고 나오니 얼굴에 그리거나 색칠만 하면 되었는데, 사실 색조 화장이 만만치는 않다.
볼터치야 완전 식은 죽 먹기고, 아이 섀도우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개중에 가장 난이도가 높은 건 눈썹 그리기와 아이라인을 그리는 것이었다.
지하철은 전동으로 다니니 사실 차체의 움직임이 거의 없는 편이라 화장 하기에는 굉장히 편하다.
반대로 버스는 도로 사정이나 기사님의 운전 실력에 따라 그 편차가 상당히 크다.
버스가 심하게 요동치는 경우도 발생하기에 그 움직임의 리듬을 잘 타지 않으면 화장을 망칠 수도 있어서 상당한 테크닉이 필요했다.
버스에서의 화장 경력이 길어질수록 차가 상하로 크게 움직일때 그 리듬에 맞춰 비뚤어지지 않게 눈썹을 그리는 기술도 같이 늘어났다.
한 날은 같은 출근 버스에 탄 회사 후배가 맨 뒷좌석에 앉아서 화장을 한 나를 보았는데,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흐트러지지 않고 매끄럽게 그린 아이라인을 보고 감탄을 했었다.
그게 민폐인지도 모르고 그때는 은근히 으쓱한 기분도 들었다. 몇년 전 메이크업 강사 수료과정을 이수한 보람도 느껴지면서 왠지 기술자가 된 느낌이었다.
숱한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면서 나와 같은 대중교통 화장러들을 꽤나 마주쳤는데, 광화문으로 출근하던 어느 날 본 장면은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불행히도 그날은 좌석버스가 만석이라 자리에 앉을 수 없어서 서서 가게 되었는데, 내가 서 있던 자리보다 조금 떨어진 곳에 앉은 한 여자에게로 시선이 꽂혔다.
그녀는 무릎에 메이크업 도구를 시원하게 펼쳐놓고, 순차적으로 하나 하나 흔들림없이 화장을 하고 있었다. 딱 봐도 하루이틀 버스에서 화장을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그래도 뭐 저 정도는 나도 충분히 하는 수준이니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런데 결국 난 그녀의 마지막 메이크업 과정을 보고 놀라움을 넘어 충격을 받고 말았다.
그 여자는 화장을 거의 다 끝마쳐 갈 즈음, 얇은 플라스틱 케이스에서 무언가를 꺼내고 있었다.
그리고는 작은 핀셋으로 그 케이스에서 얇은 인조 속눈썹을 꺼내더니 풀을 붙여 실눈을 뜬 채로 붙이는 것이었다.
"세상에나."
난 두가지 면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전혀 동요없이 속눈썹을 완벽하게 붙여내는 모습에 크게 놀랐고, 주변 상황이나 시선에 전혀 신경쓰지 않고 극강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점에서도 놀람 이상의 충격을 받았다.
결국 나는 그러한 그녀를 깨끗하게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졌다. 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