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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밥반찬 다이어리 Apr 12. 2023

벼룩시장 안열어 주면 내가 열지 뭐!

이사를 준비하면서 한층 어른으로 성장한 느낌이다.

결혼 후 2년을 제외하고는 거의 7년간 주말부부로 살다가 이제 남편이 사는 지방으로 내려가 같이 살게 되었기에 나는 거의 모든 살림을 정리해야만 했다.

요새는 당근마켓 같은 직거래 시장의 활성화로 중고가구나 가전을 한번에 매입하는 업체가 확실히 줄어들어서 거의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그런 업체가 있다면 많은 가구와 가전을 처분해야 하는 나로서는 한 업체와 일괄 협상을 하면 되는 일인데, 일일이 가구와 가전들을 하나하나 사진을 찍고 사이즈를 재어가며 당근마켓에 올려야 하니 눈 앞이 까마득 하면서 한숨이 나왔다.

그러나 방법은 없었다.

큰 맘을 먹고 사진을 차례로 올리면서 나와 함께 했던 물건들을 추억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명색이 브런치 작가인데 가구에 대한 설명을 한두줄로 성의없이 쓸 수는 없었다.

뭐든 정성을 기울여야 그만큼 울림이 있는 법이기에, 나는 물건들에 스토리를 입히기 시작했고 물건에 대한 상세설명이나 정보도 인터넷으로 찾아 정확하게 올렸다.

그 결과, 냉장고,세탁기,협탁 3개, 옷장, 붙박이장, 멀티탭, 바지걸이, 파니니 그릴, 샤오미 가습기, 드라이기 등등 왠만한 것들은 다 팔았다.

아쉽게도 식탁과 책상, 책장만이 남긴 했지만 그래도 반응이 좋아서 나름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말로 나에게 심각한 짐은 옷들이었다.

어릴 때부터 옷을 좋아하던 나는 국내, 해외 할것없이 어디 나다닐 때 마다 사모은 옷들이 옷무덤 몇개는 이룰 정도였고, 가방 소품들도 정리가 안될 정도로 많았다.

이것들은 하나 하나 올릴 수도 없고 막판에 이도저도 안되면 버리면 되긴 하지만, 그래도 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것들이 많았다.


하여 나는 궁리 끝에 당근마켓에 2000원부터 2,3만원대까지 옷, 소품, 가방 등을 파는 플리마켓, 벼룩시장을 연다고 올렸다.

이렇게 올리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나?

일단 보통 올리는 형식을 깨고 실행해 보기로 했고, 옷 사진 몇개를 등록했다.

왜냐하면 벼룩시장을 열려면 어떤 조직이나 단체에서 주최해야 내가 거기에 참여할 수 있는데, 그런 데는 찾을 수도 없고 기다릴 수도 없었다.

반응이 없어도 밑져봐야 본전이다.


반나절이 지나자 슬슬 하트가 달리기 시작했다.

와 그래도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구나. 신기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채팅이 오기 시작했다. 난 최대한 친절하게 대답했고 안사도 되니 편하게 구경오시라고 했다.

그 중 어떤 분이 4시반에 오시겠다고 하여 나는 엉망진창인 옷무덤을 조금씩 파헤쳐 식탁위에 펼쳐놨다.

드디어 4시반! 벨이 울렸다.

옷가게에 들어가면 주인을 보는 것처럼 나는 혹시나 추레해 보일까봐 자주색 베레모까지 쓰며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어서오세요!'

그간 일하면서 워낙 사람들을 많이 접하고 살아서 들어오시는 분을 보니 어떤 스타일인지 감이 왔다.

뉴트럴한 색상의 옷을 입고 젠틀하고 얌전한 이미지의 여성 분이었다.

얘기를 나누다보니 논술을 가르치며 학원을 운영하시는 분이라 편한 정장이 필요하다고 하셨고, 나는 그 분의 분위기에 맞는 옷을 몇가지 챙겨드리며 활동성이 편하면서 좋아할만한 색상 추천도 해드렸다.


그 손님은 이것저것 걸쳐보시더니 맘에 드시는지 옷 몇가지를 한 구석에 하나하나 쌓기 시작했다.

아 저것들을 사시려나보다!

그분이 한창 옷을 고르는 도중에 전화가 걸려왔다.

 "어 여기 513동 201호야 이리로 와." 라고 하시며 전화를 끊었다.

"친구분이나 동료가 오는 걸까? 와 잘됐네!"

난 혼자 기대에 부풀어 문을 열 준비를 했다.

띵동!

잠시 후 벨이 울렸고 나는 미소를 준비하고 문을 활짝 열었다.

"어머!"

꼬마 손님이 나타났다. 그 아이는 그 여자분의 아들이었다.

나는 꼬마 손님을 소파에 앉히고 남편의 책을 보라고 쥐어줬는데, 꼬마 손님은 차분히 앉아서 책을 집중하며 보았다.


여자분은 한참을 고르더니 작은 방 구석에 숨어있는 옷까지 다 보고싶어 하셨는데, 내가 미쳐 다 진열을 하지 못해서 내일 다시 오시기로 했다.

그리하여 최종 옷 10벌을 넘게 고르셨고, 내가 무료로 한 4-5벌은 더 챙겨드렸다.

그래서 총 82,000원을 벌었다.

돈을 벌어서 기분 좋은 것도 있었지만, 기존의 형식을 파괴하고 시도해본 나의 아이디어로 인해 무언가가 실제 벌어졌다는 사실이 더욱 설레고 기분 좋게 만들었다.

내일 또 오신다면 더 잘해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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