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격리중의 깨달음

by 밥반찬 다이어리

목이 좀 아프고 가래가 끓는 정도 외엔 열도 안나고 컨디션도 괜찮았다.

정부의 지원 정책에 따라 집에 도착한 즉석식품들과 김 그리고 체온계, 맥박 재는 도구와 종합감기약도 몇일 뒤 도착했고 난 성실히 격리자의 생활수칙을 수행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증상이 좋아지는 반면, 조금씩 후각이 둔해지더니 예민하던 코의 냄새가 잘 안맡아지면서 코로나 라는걸 실감했다.

아로마 허브향이 강한 핸드크림을 바르는데 갑자기 고무향이 맡아졌다.

이거 비싼 제품인데 고무로 만들었나? 향이 왜이러지.

뉴스에 후각이 돌아오지 않는 사람도 있다고 하던데 설마.. 순간 겁이 났지만 지금 몸이나 잘챙기자 하고 영양제와 프로틴까지 꼬박꼬박 먹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자연스레 침대와 한몸이 되었고 격리된 방에서 세상과 완벽히 차단된 채로 오로지 "나만의" 생각을 하게됐다.

대학 졸업후 한 회사만 20년 넘게 다니면서, 회사가 강제로 쉬라고 한 기간 외에 난 단 한번도 쉬어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가 없으니 출산휴가나 육아휴직을 쓸 일도 없었고, 생계를 뿌리치고 딱히 일정기간 쉴 계기도 없었기에 난 그저 일만 했던 것이다.


그간의 쳇바퀴같은 생활에서 잠깐씩 스치던 번뇌와 고민들이 한번에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희한하게 그 시간이 괴로운게 아니라 정신을 맑고 건설적으로 만들어주는 느낌이었다.

여태 머리만 괴롭히던 공상에 가까웠던 것들이 지금은 뭔가 회사 밖의 세상으로, 내 속안의 세계로 한발 내딛을 수 있을 것 같은 현실감이 구체적으로 느껴졌다.


몇일 뒤 카톡이 울렸다.

회사동료가 갑자기 나의 부서이동에 대해 물어왔다.

아니 자가격리중에 당사자도 전혀 모르는 사이에 부서이동을?

원래 이 조직이 본인 의사를 묻지않은 채 갑작스레 인사발령을 내는 게 흔한 일이긴 하지만, 막상 코로나로 격리된 채로 쉬고 있는 사람한테 일언반구 없이 발령을 내다니 당황스럽기 그지 없었다.

물론 조직을 꾸리다보면 갑자기 결정을 내려야 되는 경우가 생기고 인력운용의 어려움이 생긴다.

그러나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령을 통보하는 바람에 트러블이 생겨 회사를 떠난 아까운 후배들도 꽤 있는 터였다.

회사의 일부에서 특히 해외발령에 대해서 "내가 너희에게 큰 은혜와 혜택을 주는 것이다" 라는 자부심을 위장한 자만감이 있었다.

분명 옛날 시대엔 그랬을 것이고 지금도 일부분에 한해서는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이 시대는 그렇지 않았다. 회사의 상태도 조건도 환경도 많이 안좋아진데다, 못 사는 시절 해외라면 침흘리며 좋아하던 그 옛날 시절이 아니었다.

게다가 사전 의견 조율이나 의사는 묻지 않고 일방적으로 발령을 낸다는 데 큰 문제가 있었다.


나의 발령 히스토리도 대충 들어보니 회사 내에 은퇴자와 젊은 이직자들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여서 급하게 구멍난 부서로 이동시키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결원이 생기니 회사로서도 인력운용에 골치가 아픈 상황이었다.

새로 맡을 보직은 신입이나 초짜가 하기엔 무리가 있어 어느정도 경력과 내공이 필요한 업무였다.

그러나 속은 모를 일이었다.

내가 계약사 업체 직원들과 만나서 코로나가 걸렸기에, 그들과의 만남을 중단시키려는 목적으로 발령을 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간 회사의 일부 행위들을 봤을 때 놀라울 만한 추리도 아니었기에 그리 충격적이지 않았고, 그 무엇이 사실이건 중요치도 않았다.


가뜩이나 회사를 떠날까 말까 고민이 많은 상황었기에, 그런 헤비한 업무로 내 몸을 태워 썩어가는 조직에 나를 제물로 바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절대 이 회사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심이 섰다.


남편에게도 갑작스럽긴 하지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나의 의지와 결심을 얘기했다.

처음엔 당황해하면서 부정적으로 만류하더니 나의 굳은 마음과 분위기를 읽었는지 결국은 동의를 해줬다.

사실 침몰하는 배처럼 회사의 사세가 기울고 있었고, 더이상의 조직생활이 내게 득이 아닌 독이 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난 대략 1년 후에 남편이 사는 지방으로 이주할 계획이었기에 영 뜬금없는 얘기는 아니었다.


한번 제대로 결심하고 나니 거칠 것이 없었다.

나는 단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이제부터 어떻게 뭘 해야하는지 하나 둘 생각하고 실행에 옮겼다.

인테리어를 좋아하는 남편이 꾸민 방. 베르판펀 오리지널 자개 조명 아래에서 칸딘스키 모작의 화려한 색채의 그림을 보며 퇴사를 결심했다.(ft.터키에서 사온 양탄자 스타일 깔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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