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저녁으로 수영을 하는 삶이란
사람마다 여행 스타일이 180도로 다르다지만, 난 여기저기 쉬지 않고 돌아다니는 쪽이었던 것 같다. 물론 중간 중간 카페도 가고 밤에는 책도 읽고 하지만 리조트 안에서 수영을 하거나 룸서비스를 시켜서 호캉스를 하는 타입은 아니었던 것 같다. 가끔씩 서울에서 비싼 호텔에 가서 호캉스라도 할라치면, 그냥 푹 쉬겠다는 여유로운 마음가짐보다는 '여기서 제공하는 서비스 어떻게 하면 다 이용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앞섰다.
발리에서 아빠가 함께 했던 여행 기간에 우리는 쉴새없이 새로운 경험들을 즐겼다. '뭐하지? 뭐 해야 되지?'라는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게끔 딱딱 적절한 일정을 거의 완벽하게(?) 짜왔기 때문에 우린 일정대로 발리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숙소 밖에의 발리를 만끽했다. 아빠가 먼저 서울로 출발하고 엄마랑 둘이 남았을 때 우리는 평소에 잘 하지 않는 여유로운 나날 보내기에 집중했다. 일부러 목표를 잡은 건 아니지만 그냥 특별히 뭘 하지 않아도 맛있는 거 먹고 1일 1마사지 받고 나머지 시간에는 여유롭게 수영도 하고 책도 읽고 수다도 떨면서 몇일을 보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따지고보면, 그런 여유로운 시간도 가지고 싶어서 여행을 오는 건데 너무 바지런 떨면서만 시간을 보냈나 싶기도 했다.
엄마랑 매일 수영을 했다. 눈 뜨자마자 수영복만 챙겨 입고 손에는 각자 챙겨온 책을 들고 아침 수영을 했다.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저녁 먹고 밤 수영을 했다. 지금까지 다닌 여행 중에 가장 많이 물에 몸을 담그고 수영을 했다. 일정 중 꽤 오래 머물렀던 리조트 안에 큰 수영장이 있고 직원분이 매일 수영장을 바닥까지 청소하는 걸 보고 엄마가 저기 수영장은 여러 번 가야겠다고 했다. 수영장에 가면 그늘이 드리운 선베드 하나씩을 맡고 그 위에 타월을 깔았다. 타월 위에 기대 누우면 기분 좋은 따뜻함이 온 몸을 감쌌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아름답고 쩅해서 그런가 내가 들고 있는 '수레바퀴 아래서'의 현학적인 문장들에 잘 집중이 되지는 않았지만 책장은 술술 넘어갔다. 책 몇장을 읽다가 책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발 바로 앞에 있는 풀장에 첨벙 뛰어든다.
물 온도를 일부러 맞춘 건지, 태양이 강렬해서 그런지 첨벙 한 순간에 들어갔는데도 물이 차가워서 동동거리지 않아도 된다. 날씨가 더운데도 물이 기분 좋게 따뜻하다는 게 신기했다. 어릴 때 빡세게 배운 수영을 안 한지 오래된 내 몸이 기억한다. 물안경이 하나 밖에 없어서 엄마랑 돌려 쓰는데, 물안경이 없으면 없는대로 개헤엄을 친다. 자유형도 했다가 제일 만만한 평영으로 왔다 갔다 한다. 몇 바퀴 안 돌았는데도 내 몸이 저질체력인건지 수영이 특히 힘든 스포츠인지 몸에 힘이 빠진다. 이럴 때 나는 배영을 한다. 제대로 된 배영도 아니고 그냥 하늘을 향해 물에 몸을 맡기고 둥둥 떠 있는다. 내 머리위로 높게 심겨진 나무의 울창한 나뭇잎들 사이로 햇빛이 비쳤다 안 비쳤다 한다. '지금 기분은 좋지만 내 몸뚱이는 엄청 새까맣게 타겠지' 하는 생각을 한다. 가끔씩 엄마랑 경주 아닌 경주를 한다. 우리 평영으로 갈까? 하면 둘 다 평영으로 열심히 반대편을 향해 달리는 거다. 엄마가 머리를 물 밖으로 내미는 개헤엄을 하고 싶다고 해서 열심히 둘이 개헤엄도 쳐 본다.
수영 전후로 우리는 리조트 안의 음식들을 먹었다. 어떨 땐 조식, 어떨 땐 룸서비스, 어떨 땐 에프터눈티를 먹었다. 가성비가 좋은 저렴한 축에 속하는 리조트였지만 서비스나 퀄리티는 고급 호텔에 뒤지지 않았다. 조식은 일주일 내내 하나 겹치는 메뉴 없이 매일 매일이 달라졌다. 룸서비스는 비싸지 않았지만 정성 가득한 디스플레이와 함께 방으로 배달됐다. 에프터눈티는 몇 개 없는 메뉴로도 우리에게 충분히 대접받는 기분이 들게 했다. 리조트 안에서 먹는 음식은 왜 이렇게 정성이 느껴졌던지 함부로 남길 수 없었다. 나온 메뉴들을 꼭 맛은 보려고 했고 가져온 음식은 되도록이면 남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매 식사가 끝나면 조금씩 더 나온 내 배를 만져보면 한숨과 함께 만족감도 느꼈다.
몇일 동안 리조트에 머물면서 휴식하는 유형의 사람들이 하는 여행의 맛을 조금 본 것 같다. 왜 여행을 와서 숙소에만 있느냐고 뭐라 할 수도 있겠지만, 숙소 안에도 발리가 있었다. 발리의 자연환경을 축소 시켜 놓은 경관에 발리의 맛있는 음식들과 친절한 사람들, 그리고 내 자유가 있었다. 정해진 일정에 따르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할 때 물에 뛰어들고 내가 원할 때 책을 읽고, 내가 원할 때 먹을 수 있는 그런 자유. 다이나믹하게 액티비티를 하거나 역동적인 사진을 남기는 건 아니었지만 이 작은 발리에서 나는 또 다른 여행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