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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너 도움1도 없이 결혼하기-1

웨딩드레스 투어

by 클라우드나인

나는 사람들이 다 끼는 웨딩 플래너는 애초에 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기획이라는 업무를 사랑하는 나인데, 그리고 내 인생 최고의 기획이 눈 앞에 있는데 다른 사람 손을 탄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웨딩 플래너를 끼고 결혼을 준비해도 결정할 게 꽤 많은데, 혼자 준비하다 보면 결혼식을 올리기 전, 후로 거의 오조오억개의 결정을 해야 한다. 특히 결혼식에 대한 로망으로 가득했던 내게는 결정을 해야 하는 선택지 자체가 거의 무궁무진했다. 몇 개의 추천 아이템 중에 고르는 건 내게 말도 안됐다. 내가 지금 시점에서 알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선택지를 전부 다 내 눈으로 보고 결정해야 직성이 풀렸다. 그리고 그런 내 기질은 드레스를 고를 때 절정으로 치달았다.


일단 드레스 샵을 보기 보다는 내 상상 속 드레스를 스케치하고 원하는 소재, 디테일 등을 정한 후에 국내에 있는, 그리고 해외에 있는 드레스 샵도 쫙 훑어 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숨어 있는 범인을 수색하는 경찰처럼 놓치는 부분 없이 현존하는 모든 드레스 샵들을 조사했다. 뭔가 드레스 형태가 예쁘면 소재가 마음에 안 들었고, 디테일이 마음에 들면 전체 모양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차선책에 만족하고 싶지 않아 계속 나만의 드레스를 찾아 나서던 나는 드디어 내 워너비에 가까운 드레스 사진을 발견하고 마음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다음 날 드레스 가격을 알고서 바로 환호성은 절망으로 바뀌었지만 말이다. 알아보니 해당 드레스는 내 예산을 초과해도 한참 초과하는 드레스였고, 기획을 할 때는 주어진 예산 내에서 내 머릿속 상상을 최대한 구현해내는 게 잘 한 기획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몇일을 그 드레스 생각으로 힘들어하다가 과감하게 내려놨다.


‘드투’라는 줄임말로 불리는 드레스 투어를 해야 할 시기가 다가왔고, 드레스를 입어볼 샵들을 추리는 과정을 거쳤다. 드레스 투어를 할 때는 원하는 특정 드레스를 꼽아두기 보다 전체적인 샵의 분위기를 보는 게 훨씬 중요하다. 보통 웨딩샵에서 운영하는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사진이나 카탈로그를 보고 드레스를 고르게 되는데, 드레스 투어 당일날 해당 드레스가 없을 확률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보면 내 마음에 안들거나 혹은 마음에는 들어도 나에게 안 어울릴 확률도 꽤 있다. 그래서 특정 드레스를 보고 샵을 고르기보다는 ‘이 샵은 여성스럽고 라인이 아름다운 드레스가 많구나’, ‘저 샵은 비즈를 활용하고 벨 라인 드레스가 많은 샵이구나’ 이런 기준으로 샵을 정하는 것이 훨씬 나중에 후회할 일을 덜어줄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촬영드레스까지 포함해 5군데 정도의 드레스 샵을 둘러보았고, 처음 3군데를 방문하는 날은 남편과 엄마랑 함께 투어 원정을 떠났다.


드레스 투어할 때 걱정되는 점 한 가지가 있다면 남편의 반응이었다. 남편이 내 맘에 들 정도로 환호성하고 야단법석 떨면서 예쁘다고 해주지 않으면 내 기분이 급격히 안 좋아질 게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이런 부분에서는 애 같은 면이 많아서 남편한테 적당히가 아니라 과하게 우쭈쭈 받고 싶다. 남편도 나의 이런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가기 전부터 마음 준비를 단단히 했을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드레스를 입고 커텐이 걷혔을 때 남편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최선을 다해 온갖 수식어를 끌어와 찬양했다. 마지막 샵에 들어갈 때까지는 입어본 드레스들이 나에게 착붙으로 어울린다는 느낌이 안 들어서 살짝 조바심이 났다. 마지막 드레스 샵에 들어가자마자 로비에 걸어둔 드레스 한 벌이 내 마음을 뺏어갔고, 바로 저 드레스를 입어보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이 드레스를 고른 신부들이 없어서 내가 처음 입는 거라는 드레스는 내가 이전에 워너비라고 했던 드레스와도 비슷한 결의 잔뜩 화려하고 사랑스러운 드레스였다. 남편이 너무나 묻히면 어떻하지 걱정이 될 정도로 화려한 드레스였고, 나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드레스라는 확신이 들었고 바로 계약을 진행했다.


나중에 결혼식이 끝나고 꽤 시간이 흐른 뒤에 남편이 군대 동기들을 만난 자리에서 한 동기가 내 드레스가 너무 아름다워서 인상에 깊이 남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고 한다. 신부 드레스에 신경 1도 안 쓸 것 같은 남자들이 내 드레스를 기억하고 게다가 칭찬까지 했다니 다시 한 번 내 선택이 만족스러워졌다.


드레스 투어를 할 때 신부는 안에서 도와주시는 분들과 함께 드레스를 입고 남편은 커텐 밖에 앉아서 반응할 준비를 하고 있다. 커텐이 걷혀지는 그 순간에는 왜인지 매 순간 당당한 나도 조금은 더 남편에게 잘 보이고 싶고 수줍은 듯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남편은 커텐이 열리는 순간들을 짧은 영상으로 나 몰래 남겼고, 나중에 이 부분을 쭉 이어 붙여서 프로포즈 영상에 사용했다. 내가 너무 사랑하는 <시네마 천국>의 마지막 부분에 키스 하는 장면들만 줄지어 나오던 그 감동적인 순간이 떠올랐다. 몇 년이 흐른 지금 보면 조금 더 다른 드레스 샵을 시도해봤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연노란색이었던 머리도 미리 염색하고 갈걸 하는 생각도 들 때가 있다. 그럼에도 그 순간의 내 행복하면서도 복잡한 감정이 표정에 드러나는 남편의 영상을 보면 내가 토할 때까지 정보를 모으고 골라내던 그 시간이 충분히 가치 있었구나 하는 마음이 들어서 잠시 올라오려던 후회를 눌러버린다.


언젠가 리마인드 웨딩을 할 수도 있을 거고 엄청난 파티에 참석할 예정이라 다시 드레스 투어를 갈 일이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20대 때 큰 설렘을 안고 남편, 엄마와 함께 갔던 드레스 투어같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걸을 수 있고 취향이 생기던 그 3,4살부터 나는 온갖 드레스를 입고 유치원에 갔고 집에 와서도 보자기를 허리에 묶고 드레스 입은 공주 놀이를 했다. 꽤 나이가 먹은 다음에도 보자기를 두르진 않았지만, 드레스를 입고 공주 놀이를 하는 상상은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런 내 상상들이 잠시나마 ‘놀이’가 아니라 ‘진짜’ 셋팅에서 실현되었던 시간은 자꾸만 꺼내보고 싶은 그런 기억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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