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가구로 보는 신혼생활 - 3

청소기

by 클라우드나인

본가에 살 때는 항상 유선 청소기를 썼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쓴 적은 없고 엄마가 쓰는 걸 봤다. 거실과 방을 돌아다니면서 청소기로 내가 영역 표시하듯 남긴 머리카락과 과자 부스러기들을 깨끗이 치워주던 엄마의 모습이 기억난다.


결혼하면서 이제 집 청소기를 주도적으로 쓰게 될 나와 남편은 무선 청소기를 구매했다. 당시에 나온 것 중에 가장 좋은 모델이었는데, 엄청 가볍진 않아도 선 없이 여기 저기 쉽게 다닐 수 있어 좋았다. 한 해가 지나가고 두 해가 지나가고 결혼 4년차쯤 되니까 청소기도 좀 성능이 떨어졌는지 가끔 못 빨아들이는 머리카락도 생긴다.


청소기는 물걸레 청소를 하기 전 단계다. 청소기는 물걸레 청소보다 한결 간편하고 쉽다. 내가 청소기를 들고 여기 저기 다니기만 하면 알아서 먼지를 빨아들여준다. 물걸레 청소는 힘을 줘서 빡빡 닥아야 되고, 좀 하다보면 금방 물티슈가 더러워져서 갈아줘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다. 그래서 맨날 남편한테 '청소기 할래, 물걸레 할래?' 하면 100이면 100, 청소기 돌리겠다고 한다.


머리카락이 내 머리에 달려 있을 때는 세상 깨끗한 것처럼 빗고 오일도 발라주고 매일 닦는데, 머리카락이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세상 더러운 것처럼 발을 까치발을 해서 안 밟으려고 노력한다. 실제로는 깨끗한 바닥에도 머리카락 몇 가닥만 떨어져 있으면 왠지 모르게 지저분하게 느껴진다. 이런 머리카락이 모여 있을 때 청소기로 한 번에 빨아들일 때 그 쾌감은 남다르다. 청소기를 제 자리에 걸어두고 버튼 하나만 누르면 위이잉 소리가 나면서 그 동안 빨아들인 먼지들과 머리카락들을 시원하게 배출한다.


내 길고 꼬불대는 머리카락에 남편의 직선의 짧은 머리카락까지 섞이면서 우리의 바닥은 빠르게 어수선해진다. 주말에 남편이 쉬고 있을 때, 내가 청소기를 돌리기 시작하면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헤이, 정리 정돈에 동참해주겠니?'라는 무언의 압박일 때가 있다. 눈치 빠른 남편은 내 잔소리 폭탄이 시작되기 전에 널브러져 있는 옷가지를 정리하거나 쌓여 있는 설거지 앞으로 향한다. 우리는 각자의 도구를 가지고 눈 앞에 있는 '더럼이(더럽다는 우리 집의 말)'들을 치운다. 그 중에서도 청소기는 청소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부주의하고 뭘 많이 흘리면서 사는지 보여주기도 한다. 남편은 쇼파에 앉아서 뭘 먹는 걸 좋아하는데, 난 그걸 싫어한다. 그래서 맨날 남편이 음식을 가지고 슬쩍 쇼파로 향할 때면 '대고 먹어!! 흘리지마!!'가 바로 튀어나온다. 남편은 과장된 제스처를 취하며 흘리지 않으려고 매우 노력 중이라는 사실을 어필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이따 남편이 있던 자리를 청소기로 밀어야 한다.


청소기는 나의 청소에 대한 관점도 바꿔줬다. 내가 직접 하지 않고 엄마가 하는 모습만을 봤던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청소기를 돌리겠거니 생각했다. 내가 직접 해보니, 엄마는 매일 청소기를 돌렸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이게 일주일에 한 번 돌리면 머리카락 투성이 집안이 되어 버린다. 청소기는 가끔씩 하는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적으로 돌보는 관리에 가깝다. 신혼생활이 길어질수록 서로에게 항상 세심하게 신경쓰고 상대방의 반응에 온 관심을 기울이는 순간들이 적어진다. 그러다가 다시금 상대방의 존재를 인지하고 초심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내가 머리카락을 방치했다가 일주일에 한 번씩 청소기로 빨아들이는 것 보다 매일 매일 짧은 시간 청소기를 돌리면 일상이 훨씬 산뜻해지고 기분이 좋은 상태로 유지된다. 남편을 가끔씩 빅 이벤트로 놀래켜주는 것도 좋겠지만 매일 집을 산뜻하게 유지하는 것처럼 하루 하루 남편의 기분을 세심하게 보살피고 싶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플래너 도움1도 없이 결혼하기-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