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배우고 갑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드라마 '졸업'을 보며 내 스승이 됐던 고마운 부서원이 떠올랐다

by mulgae

“많이 배우고 갑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드라마 ‘졸업’은 대치동 스타강사 서혜진과 혜진의 제자 출신으로 대치동 사교육계에 입성한 이준호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10여 년 나이 차이를 뛰어넘은 연상연하 커플의 사랑이야기도 기대됐지만 사교육 1번지 대치동 학원강사의 삶을 엿본다는 점에서 상당히 솔깃한 작품이었다.


특히 극중 공교육의 표상으로 불리는 표상섭 선생의 변화가 흥미로웠다. 극초반만 해도 ‘철밥통 교육공무원’의 표상같았던 그가 어떤 계기로 각성한 뒤 혜진의 라이벌 학원 부원장으로 스카우트 되는 과정은 웬만한 사랑이야기보다 드라마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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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는 늘 지루한 강의를 일삼았을 법한 표상섭도 학원 강단에 서자 혼신의 힘을 다해 강의에 전념했다. 족집게처럼 점수내는 방법만 가르쳐주는 타 강사 강의와 달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문학의 기원을 알려줬다. 그의 강의를 청강한 서혜진은 “많이 배우고 갑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넸다.


배움에는 아군도, 적군도 없다. 좋은 스승은 홀로 될 수도 없다. 사회생활에서 만난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스승이 되곤 한다.




스승의 날이던 15일, 오랜만에 후배 A에게 전화가 왔다.


"어, A야, 잘 지내고 있니?“

"네, 선배. 스승의 날이라 전화드렸어요. 잘 지내고 계시죠?"


3년차 기자였던 A는 지난해 2월부터 5월까지 약 3개월 가량 내 부서원이었다. 그는 장단점이 명확했다. 빨리빨리 속도전이 기본인 언론사에서 거북이처럼 느긋했다. 하지만 한눈 팔지 않는 성실함이 강점이었다. 융통성은 다소 없지만 투명할 정도로 정직했다. 나는 그의 장점을 높이 샀다. 지금은 떡잎일지어도 한번 포텐이 터지면 뻥튀기 기계에서 강냉이 터지듯 결실을 맺을 친구라 생각했다.


온라인부에서 연예부로 인사 발령을 받은 그는 낯선 취재환경에 발을 붙이며 무척 즐거워했다. 학창시절 PD가 꿈이었다길래, 지금은 스타PD가 된 취재원들과 만남을 주선했다. 유난히 작은 그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저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주다니...감사합니다"라고 90도로 인사를 한 기억이 선명하다.


회사는 어느 순간부터 경영상황이 악화됐다며 급여를 절반만 지급했다. 모두가 쪼들리기 시작했고 모두가 불만의 소리를 높였다. 화창했던 5월의 어느 날, 과묵한 성격이라 별 내색을 안하던 A가 “곧 어버이날인데 부모님께 선물을 드릴 수 없어 큰일이다” 라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사실, 그나 나나 주머니 사정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다른 건 그는 3년차, 나는 18년차, 그는 부서원, 나는 부서장이라는 것 뿐이었다. 부서원이 어버이날 빈손으로 집에 가게 하는 건 부서장된 도리로 아니다 싶었다.


“부모님께 갖다드려.” 사비를 털어 홍삼 선물세트를 보냈다. 어차피 모두가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니 모든 부서원에게 보냈다. 반응은 천차만별이었다. 누군가는 자신의 가정형편을 넌지시 고백했고 누군가는 자신을 돌아봤다는 답을 하기도 했다. A도 “정말 감사합니다”라며 눈물 이모티콘을 보냈다.


며칠 후 스승의 날, A가 키위 선물을 보냈다. 이런 답례를 바란 건 아니었다. 괜찮다고 고사하자 A는 “부모님께서 선물을 받았는데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고 하셨다”고 했다. 정직한 성품의 A가 배달사고(?)없이 부모님께 홍삼을 전달한 모양이었다. 부모님의 마음이니 감사히 받기로 했다.


안타깝게도 A와 인연은 여기까지였다. 그는 경영진의 농간으로 고연차 선배들이 주로 모인 식물부서로 발령났고 결국 타의로 회사를 떠났다. 지금은 타사에서 기자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나 역시 10월 이후 회사를 나왔으니 그와 만날 일이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명절이 되면 꼬박꼬박 내게 안부를 전해왔다.


나는 누군가에게 좋은 선배, 좋은 부서장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준 건 결국 좋은 후배들이었다. 짧은 데스크 기간, 그들이 나의 스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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