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양각색 연말 시상식 취재 단상
“올해 연말 시상식 3파전, XXX VS ooo VS △△△”
해마다 연말이 되면 포털사이트를 장식하는 기사 제목이다. 지금은 지상파 3사 드라마가 영 맥을 못 추다 보니 연말 시상식이 긴장감 제로 행사가 됐지만 ‘라떼만’ 해도 연말 시상식은 각 방송사의 연중 최대 행사였다.
특히 인기 드라마가 많은 방송사들은 “대상을 누구에게 줘야 하나”라는 지상최대의 난제를 놓고 고민에 빠지곤 했다. 후보 배우들에게 일정 그레이드 이상의 상을 개런티해야 시상식 참석이 순조로운데 대상급 후보에게 “올해는 배우 XXX가 더 성적이 좋으니 대신 최우수상을 드리겠다”고 하는 순간 해당 배우는 ‘개인 일정으로 불참’ 공지와 함께 시상식을 보이콧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수상 뒤 상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 감격에 차 눈물 흘리는 배우들은 ‘천생’ 배우라고밖에 할 수 없다) 이러저러한 저간의 사정 때문에 연말 시상식 섭외는 총성 없는 전쟁이 됐다.
2007년 연말 어느 날이었다. 그 해 MBC는 한류스타 배용준이 출연한 대작 ‘태왕사신기’와 인기 사극 ‘이산’, 그리고 의학드라마 ‘하얀거탑’의 인기에 힘입어 배용준, 최민수(태왕사신기), 이서진(이산), 김명민(하얀거탑) 등 총 4명의 후보가 대상 자리를 놓고 각축전을 벌였다. 네사람 모두 흠잡을 데 없는 배우들이지만 특히 ‘하얀거탑’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 김명민의 인기가 압도적이었다. 그는 이미 2005년 KBS 연기대상에서 ‘불멸의 이순신’의 이순신 역으로 최수종, 최진실 등 당대 최고의 톱스타들을 제치고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긴장감이 한창 고조되던 12월 초, 난데없이 포털사이트에 기사가 게재됐다. 배용준이 MBC 연기대상 수상자로 사실상 확정됐다는 내용이었다. 지금은 MBC에 근무하는 한 선배가 쓴 기사였다. ( 상도의도 없이 시상식 최대 스포일러를 공개한 선배는 취재능력을 인정받아 이듬해 MBC 경력직 사원에 합격했다)
난리가 났다. 출입기자들이 우루루 여의도 MBC에 몰려갔다. (그때는 MBC 사옥이 여의도에 있었다) ‘태왕사신기’의 책임 프로듀서인 조중현CP는 매우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결정되지 않은 사실”이라며 “후보들이 치열한 경합을 벌이고 있다”고 에둘러 답했다. 해당 기사는 삭제됐지만 여파는 상당했다. 당시 배용준은 일본에서 나는 새도 떨어뜨릴 위용을 자랑하는 한류스타였다. 그가 대상을 받을 수도 있다는 소식에 일본의 배용준 팬들이 대거 여의도로 몰려왔다.
대부분 온라인 매체들은 집에서 시상식을 분초단위로 중계하는 기사를 작성하곤 했다. 하지만 그해는 배용준도 참석하고, 이래저래 빅이벤트가 많았던만큼 시상식 현장을 직접 취재했다. MBC의 경우 29일 방송연예대상, 30일 연기대상. 31일 가요대제전을 여는 게 오랜 관행이었다. 요즘은 방송사에서 시상식 포토타임만 사진기자들에게 오픈하고 시상식 취재를 허락하지 않지만 당시엔 일부 고연차 기자들이 시상식 현장을 직접 찾았다.
덕분에 나도 선배들이 현장을 취재한다는 핑계로 현장을 찾을 수 있었다. 시상식에서는 평소에 만나기 힘든 연예인들과 덕담을 나누고, 연예인 매니저들과 정보를 교환하기도 했다. TV 생중계에서 느끼기 어려운 현장의 분위기를 지면에 전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2007년에는 정말 배용준이 대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유력후보였던 김명민은 시상식 당일 불참을 통보했다. 촬영 중 무릎부상을 당했다는 그는 목발을 짚은 채 현장에 나타나는 ‘투혼’으로 팬들을 감동시켰다. 하지만 그 대상 자리를 놓고 수많은 사람들이 천국과 지옥을 오간 과정을 생각하면 살짝 얄밉기도 했다. 대상 준다 그럴 때 군소리 없이 오면 안되는 것인가. 꼭 그렇게 사람 속을 태워야 하나, 시상식 최대 스포일러를 깐 그 선배는 대체 뭔가...그런 마음들이 충돌했다.
나는 그 이후로 몇 년간 여의도 MBC에서 진행한 시상식 현장을 찾았다. 시청자들이 집에서 보는 시상식은 대략 8시 30분~9시 무렵 시작하지만 식전행사로 포토타임이 진행하니 실제 행사는 5~6시부터 시작된다고 보는 게 맞다. 그때부터 방송사 곳곳을 오가며 연예인들과 매니저들을 만나며 그날의 분위기를 살피곤 했다. 현장에서 마지막 대상 수상 기사까지 쓰다보면 시간이 늦어지곤 했다. 여의도 MBC 앞 포장마차에서 먹는 우동 국물은 긴 노동으로 허기진 배를 달래줬다.
방송사들은 화제성 높은 드라마와 광고 수주가 높은 드라마 출연자를 대상 수상자로 놓고 고민에 빠지곤 했다. 한번은 미니시리즈에 출연한 중년 여배우와 사극에 출연한 젊은 여배우에게 공동 대상을 안겨 욕을 옴팡지게 먹었다. 문제는 중년 여배우가 단독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시상식을 보이콧하겠다며 식장에 안 들어오고 차를 탄 채 MBC 주변을 뱅뱅 배회했다 한다. 드라마국 고위 임원들이 사색이 돼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간신히 우아한 공동대상으로 마무리하긴 했지만 논란을 자초한 셈이다.
개인적으로 시상식 기사를 쓰다 아찔한 사고를 친 적도 있었다. 2012년이었다. 그해는 현장에 안가고 집에서 시상식을 보고 있었다. 그해 MBC 연기대상은 ‘마의’의 조승우와 ‘빛과 그림자’의 안재욱이 대상 자리를 놓고 경쟁했다. 시상식을 보던 중 조승우가 최우수 연기자상을 받았다. 감이 왔다. 이쯤되면 안재욱이 대상을 받겠구나 했다. 스트레이트 기사를 미리 써놓았다. 시상자가 “2012년 MBC연기대상, 영예의 대상은...”이라고 할 때 뒷말을 듣지 않고 미리 기사를 송고했다. 아뿔싸! 대상도 ‘마의’의 조승우였다. 안재욱은 무관으로 돌아갔다. 정말 대형 사고를 쳤다.
황급히 기사를 수정했지만 몇분동안 ‘대상 안재욱’이라는 미다시(표제)의 기사가 포털에 노출됐다. 다음 날 미디어오늘에서 취재에 나섰다. 미디어오늘 기자는 “혹시 대상 수상자가 안재욱인데 갑자기 바뀐 것 아닌가”라고 물었다. 내가 MBC를 오래 출입한 사실을 알기에 사전에 미리 취재한 것 아니냐는 뉘앙스였다. 그럴 리가...쪽팔렸지만 솔직히 답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제가 성격이 급해서 기사를 미리 송고해 그런 사고가 났습니다.;;;”
연말 방송사 시상식을 취재하는 근 10년 동안 직장인이라면 한번쯤 한다는 연말 휴가 몰아쓰기는 단 한번도 해본적이 없었다. 그만큼 연말은 연예부 기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이슈였다.
힘들지만 많은 추억을 안겼던 연말 방송사 시상식은 2014년 경제지로 이직한 뒤 더 이상 취재하지 않게 됐다. 연차가 어느 정도 찬 뒤 스포츠지로 옮겼을 때는 후배들이 시상식을 취재해 특별히 취재를 할 이유가 없게 됐다.
하지만 난 가끔 여의도 시절, 신입기자로 돌아가는 상상을 하곤 한다. 호기심에 가득 차 방송사 내부를 빨빨대며 돌아다니던 시절, 정보 하나라도 더 얻고, 눈도장 한번이라도 더 찍기 위해 여기저기 기웃대던 모습, 다음날 포털 사이트 메인에 걸릴만한 기삿감을 찾아 자판이 부숴져라 키보드를 치던 나, 그리고 이 모든 걸 마친 뒤 택시를 탈 때 느꼈던 여의도의 차가운 밤공기를 떠올리곤 한다. 그렇게 청춘을 불살라 취재를 한 덕분에 인생의 삼분의 일을 기자라는 이름으로 살 수 있었다. 내 기자 인생에 상을 준다면 아마 그 무렵이 대상감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