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르르르릉”
새벽녘, 전화벨이 울렸다. 대개 이 시간에 오는 전화는 불길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누가 죽거나, 다쳤거나 하는 대형 사고와 관련된 내용 취재지시였다. 하필 전날 늦게까지 부서 회식이 있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전화를 받았다. 회사 선배였다.
“놀라지 마. 최진실이 죽었대. 팀원들 중 네가 집이 가장 가까워. 얼른 잠원동 최진실 집으로 이동해”
“네???”
화들짝 잠이 깼다. 최진실이 누군가. 당대 최고의 톱스타다. 그런 최진실이 죽다니. 최진실과 절친한 정선희의 남편 안재환이 사망한지 불과 한달밖에 안된 시점이었다. 그 사건 때문에 노원 경찰서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는데 최진실이라니!!!!!
당시 재직했던 회사의 팀장이 최진실과 절친했다. 팀장은 회식을 마친 뒤 최진실과 술자리가 있다며 부서 막내인 내게 “너도 같이 갈래?”라고 물어봤었다. 팀장과 술자리가 길어지면 과음할 게 뻔했기에 단호히 거절하고 귀가했다. 그 단호한 거절이 ‘신의 한수’였다. 전날 술자리를 함께 할 뻔한 사람의, 그것도 톱스타의 사망이라니. 나중에 알고 보니 팀장은 최진실과 술자리 뒤 연락이 계속 되지 않았다 한다. 당시 국정원 관계자까지 팀장의 안부를 물었고, 보다못해 보도국 간부가 부서 선배에게 연락해, 선배가 취재 지시를 전달한 것이었다.
부리나케 씻고 잠원동 최진실 자택으로 향했다. 이미 아파트 앞은 각 언론사에서 취재나온 기자들로 인산인해였다. 아아, 그 정신없는 와중에 구썸남을 만나기까지 했다. 유력 종합지에 다니던 그는 연예 전문 기자였던 내게 뭔가 멘트를 따고 싶어했다. 나는 행여 그가 내게 다시 말을 걸까 봐 현장 스케치만 딴 뒤 이동했다.
그 날은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일이었다.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실었던 기자들도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연예인 사망 사건은 많았지만 최진실 사망사건만큼 메가톤급 사건은 드물었다. 대다수 기자들이 이 사건에만 매달렸다.
부서 막내인 나는 장례식 첫날은 다른 기자들과 빈소 앞에서 조문객 취재를 했다.(그때는 조문객들에게 야만적으로 카메라를 들이대던 시대였다) 둘째 날에는 빈소에서 상주들과 함께 술을 마시던 팀장과 함께 (사망 당일 오전 연락이 안됐던 팀장은 이후 바로 빈소로 향했고 계속 빈소를 지켰다. 당시 회사에서 팀장과 최진실의 돈독한 관계를 알았기에 별 말 안했지만 직장인, 특히 대형 사건의 취재 지시를 내려야 했던 기자로서는 대형 직무유기였다) 안에 들어와 육개장을 먹으며 빈소 풍경을 살폈다. 누군가는 착잡해 했고, 누군가는 술잔을 들이키며 쓴 웃음을 지었다. 누군가는 이 사건과 상관없는 얘기를 하며 애써 웃음짓기도 했다. 톱스타의 빈소인터라 조문객 명단은 화려했지만 빈소 내부는 여느 평범한 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 죽음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했다.
모두가 알다시피 그 이후 최진실 가족은 겉잡을 수 없는 비극에 시달렸다. 동생 최진영과 전남편 조성민, 그리고 최진실의 로드매니저까지 극단적 선택을 했고 남겨진 두 자녀는 할머니가 양육했다. 아들 환희는 지플랫이란 예명의 가수로 데뷔했고 딸 준희는 인플루언서로 활동 중이다.
환희가 지플랫(지금은 벤 블리스라는 예명을 사용 중이다)으로 활동할 때 그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엄마, 아빠보다 삼촌을 빼닮은, 유난히 큰 귀가 인상적인 해맑은 소년이었다. 너무 어린 시절 비극을 겪었고, 부모의 유명세를 이용하려는 어른들이 주변에 넘쳤지만 그래도 비뚤어지지 않고 잘 성장한 그를 보며 내심 안도했다. 엄마의 마지막 날을 함께 할 뻔 했던 기자였기에 더욱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모른다. 그에게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고 최진실 사망 사건 이전에도, 이후에도 수많은 연예인 사망사건을 취재했다. 하지만 최진실의 죽음은 연예계, 그리고 나아가 나 개인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듬해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고 장자연 사망사건이 벌어지면서 악몽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장자연의 회사 대표와 팀장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회사 차원에서 이 사건에 매달렸다. 때마침 동료 기자가 특종까지 하며 사건은 사회 문제로 번졌다.
연예계와 유력인사 사이의 커넥션이 의심됐던 사건이었지만 올해 2월, 대법원은 해당 사건을 보도한 MBC ‘PD수첩’이 한 유력 언론사 부사장에게 3000만원을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진실은 당시 사건을 취재했던 나도 정확하게 모른다. 그저 각자가 믿고 싶고, 보고 싶어하는 방향으로 흐를 뿐이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 팀 분위기가 급격히 나빠지면서 당시 사건을 취재한 모든 이들이 그 회사를 떠났다. 그 회사에서 기자로 성장하며 회사에 깊은 애정을 가졌던 나도 자의 반, 타의 반 퇴사했다.
여러 사건을 겪으며 점점 죽음에 둔감해지는 자신을 느끼게 됐다. 분명 죽음 앞에 모두가 평등할텐데, 죽음의 값어치도 유명세에 따라 달라졌다. 종국에는 ‘연예인의 죽음’이 그저 일로 느껴졌다. 내가 죽으면 부고 기사 한줄 나가지 않을텐데. 나는 왜 만나보지도 못한 유명인들을 위해 부고 기사를 쓰고 있나라는 반발심이 생기기도 했다.
한동안 기계적으로 처리했던 연예인 사망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샤이니 종현 사망 사건을 겪으며 조금씩 회복됐다. 2017년 12월이었다. 갑작스럽게 사망한 종현의 빈소를 찾았다. 죽음의 조짐조차 보이지 않았던 28살 청춘이 떠났다.
당시 페이스북에 나는 이렇게 썼다.
"영하의 강추위 속, 아산병원 초입에 검정 패딩을 입은 학생들의 줄이 길게 늘어 서 있었다. 교복을 입고 친구와 같이 온 듯한 학생, 면세점 봉투를 든 노란머리 외국인, 여학생 무리 속 흔치않게 낀 남학생... 누군가는 눈물을 흘렸고 누군가는 스타에 대한 '조문'이라는 형식을 새로운 놀이처럼 여기는 듯 했다. 지나가는 어르신은 영 못마땅한 듯 "정신나간 것들"이라며 기어코 한마디를 던지셨다. 그럼에도 어린 학생들은 대열을 무너뜨리지도 않고 타인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행여 자신들의 잘못된 행동이 고인이 된 스타에게 누를 끼칠세라 조심하는 모양새였다. 추위 속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질서정연한 팬들과 이들에게 인상을 찌푸리고 욕하는 어르신, 누가 더 정신 나간 것일까.
빈소에서 만난 SM아티스트, 소속사 관계자들은 그야말로 '멘붕'이었다. 누구보다 열정적이었고 누구보다 반짝반짝 빛났던, 가장 SM스러웠던 모범생 아티스트의 예상치 못한 선택, 고통은 남겨진 자들의 몫이다. 이들에게 그는 또하나의 가족이었을텐데 "시스템의 잘못"이라며 누가 돌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28살, 많은 이들이 제대로 시작조차 못한 나이, 너무 많은 것을 이뤘던 그는 '샤이니'라는 팀명처럼 가장 빛나던 순간, 박제된 청춘으로 남았다. 잘 알지 못하지만 좋아했던 아티스트 종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어떤 죽음은, 산 자에게 죽음 못지 않은 고통을 안긴다. 그래서 산 사람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그 고통을 끌어안아야 한다. 그저 옆에서 지켜보고 기록하며 ‘시스템 탓’을 운운했던 기자로서 안타까움이 클 뿐이었다. 그 탓마저 나의 직업적 업무였다.
요즘 극도의 우울증을 앓고 있다.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는 내게 상담을 했던 의사는 “약 먹을 정도는 아니네요”라고 무심하게 말했다. 맞다. 그러나 나는 가끔 전 직장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상상을 한다. 그저 몸을 갈아 열심히 일했던 이를, 정치적인 이유로 해고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이들과, 그들에게 동조했던, 차마 기자라고 부르기엔 입이 부끄러운 가증스러운 그들의 얼굴이 떠오르곤 한다. 플레이리스트에는 ‘The 1975’의 ‘I always wanna die’가 늘 포함돼 있다. 그들에게 죽을 때까지 더한 고통을 안기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 속을 떠나질 않는다.
취재했던 연예인 사망 사건을 정리하며 그들이 떠난 자리를 떠올렸다. 고통과 아픔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며 희미해졌다. 그 시간을 버텨낸 이들은 또다른 생을 살아내고 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역시 최고의 복수는 죽음보다 내가 잘 사는 것이라는 명제를 다시금 되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