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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멀리 Oct 10. 2022

이렇게 가는 건가요 하와이를

#6 우리의 출발은 이렇게 시작됐다


2019년 10월 3일 목요일. 무려 6개월 전부터 정해둔 하와이 여행의 출국일이었다. 그날은 유급휴가를 최소화하기 위해 나름대로 머리를 써서 정한 날이었다. 목요일인 개천절부터 그 다음주 수요일인 한글날까지, 일주일 간격으로 붙어있는 공휴일 덕에 오직 3일의 휴가만 쓰고도 7일을 연이어 쉴 수 있는 몇 안 되는 시기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여행을 떠나기에 여러모로 마땅치 않았다.


9월 말, 괌 부근에서 발생한 태풍 ‘미탁’이 며칠간 몸집을 불려 10월 초 대한민국에 상륙했다. 엄청난 폭우가 연이어 쏟아졌고 출국 전날까지도 마찬가지였다. 몇몇 비행기는 결항이 될 정도였다. 내가 탈 비행기마저 영향을 받을까 걱정할 겨를은 없었다. 그 전날까지 회사의 대형 프로젝트를 마무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연이은 야근과 밤샘으로 날씨에 대한 걱정은커녕 숙소 문제를 제외하면 여행에 대한 생각 자체를 할 수 조차 없었다. 환전이나 유심은 고사하고 짐조차 싸지 못했고, 심지어 캐리어는 공항 면세점에서 수령할 예정이었다. 유일하게 미리 준비했다고 할 만한 것은 고프로를 대여한 것 정도였다. 출국 전날 집으로 도착할 예정이었데, 그마저 태풍 때문에 택배 업무가 지연되면서 출국 당일 공항에서 퀵으로 받는 것으로 급히 변경되었다. 그야말로 그 어느 것도 준비되지 않은 시작이었다.


10월 3일 아침. 나는 피곤에 찌든 몸을 겨우 일으켜 바스락 소리가 나는 일회용 비닐백에 옷가지를 대충 쑤셔 넣고는 캔버스 백에 여권과 휴대폰을 챙겨 집을 나섰다. 좀처럼 잠을 자지 못해 피로가 잔뜩 쌓여 있던 데다가 캐리어 하나 없는 행태가 여행 분위기를 전혀 내주지 못하고 있었다. 부랴부랴 짐을 챙긴 탓에 어설픈 준비는 덤이었다. 11시간의 비행이 기다리고 있음에도 목베개 하나 챙기지 못했고, 노트북도 휴대폰도 가져가면서 정작 멀티탭은 빼놓는 실수까지 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급하게 떠나는 여행에서 비일비재하게 생기는 사소한 실수였다. 이후에 일어날 일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 누구보다도 출국하지 않을 것 같은, 떠나더라도 하와이는 아닐 것만 같은 지친 모습으로 나는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만난 Y는 나와 사뭇 달랐다. 그에겐 캐리어가 있었고, 유심 대신 로밍을 미리 해왔고, 그 무엇보다 여행자 특유의 들뜸이 있었다. 그 기분이 나에게 옮겨져서인지 Y를 만난 후 조금씩 여행 기분이 나는 것만 같았다. 그래, 설레어야지. 하와이에 가는 건데. 나는 내 앞에 기다리고 있는 일들을 차근차근 해치웠다. 마치 퀘스트를 하는 기분으로. 퀵으로 도착한 고프로를 수령하고, 불과 3일 전 주문한 (그래서 당연히 공항에서 수령할 수밖에 없었던) 유심칩도 받고, 환전도 하고.


탑승 시각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아있었고 우린 공항 내의 여러 가게들을 구경하다가 적당히 출국심사장에 들어갔다. 보안검색대를 통과하며 생각했다. 이제 면세점에 들러 미리 구입해둔 캐리어만 수령하면 미션 클리어다. 그렇게만 하면 진정한 하와이 여행자로서의 아이템이 모두 준비될 것 같았다. 면세품 인도장이 어디더라. 면세점 앱에서 지도를 봤던 것 같은데. 휴대폰을 확인하기 위해 컨테이너를 타고 나온 바구니에서 가방을 들어 올렸다. 어라. 나는 몇 번이고 가방을 뒤졌다. 휴대폰이 없었다.


나는 거의 가방을 뒤집어엎다시피 탈탈 털었다.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캔버스 백에서 별의 별게 쏟아졌지만 휴대폰만큼은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비닐백의 지퍼도 열어봤다. 그 안에 들어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아연실색이 된 채 검색대를 통과하는 Y를 향해 거의 비명을 질렀다. “나, 휴대폰이 없어.”

일순간 보안검색대 주변에 정적이 감돌았던 것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크기를 가진 공항에서 휴대폰을 잃어버리다니. 대체 언제 마지막으로 휴대폰을 꺼내 들었더라. 어디에 넣어두었지? 기억을 되짚으려 애썼지만 실마리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공항에 오자마자 너무 많은 것들을 처리한 탓이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비행기를 타기 전에 휴대폰을 찾을 수 있을까? 탑승 시간까지 얼마나 남았지? 그보다 다시 카운터로 돌아갈 수 있긴 한 건가? 나는 보안검색대에 있는 공항직원에게 휴대폰을 잃어버렸다고 말했고, 운이 좋게도 (내가 너무 경악해서인지는 몰라도) 그들은 곧바로 내가 공항 카운터로 돌아갈 수 있도록 길을 안내해주었다. 적지 않게 출국심사를 받아봤지만 출국 심사장 역주행은 인생 최초였다. 카운터로 돌아가는 내 항공권에는 커다란 도장이 하나 찍혔다. 재 심 확 인 필.


카운터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지나온 길을 거꾸로 돌아갔다. 인천공항이 어마무시하게 컸기 때문에 숨이 찰 정도로 달려야만 했다. 잠시 앉아 다리를 풀었던 자리를 확인하고, 눈으로 구경만 하던 가게들을 둘러보고, 혹시 주인 없는 휴대폰을 본 적 있느냐고 물었다. 공항은 구석구석 실시간으로 청소라도 하는 것 마냥 먼지 한 톨 없었고 언제나 새것마냥 깨끗한 공항이 그토록 야속한 적이 없었다. 지나간 발자국이 흔적으로 남아 확인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거의 울상이 된 채로 환전소에 도착했다. 여기가 마지막이었다. 더 이상 갈 곳이라고는 없었다. 하지만 환전소의 아일랜드 바 역시 방금 전에 닦은 것 마냥 아무 것도 없이 깨끗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창구 너머로 작게 보이는 직원에게 반복했던 질문을 한번 더 물었다. “혹시 여기 휴대폰 하나 두고 간 것 있었나요?” 그 질문에 직원은 잠시 사라졌다가 동그란 창구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익숙한 것이 들려있었다. 내 휴대폰이었다. 세상에. 머릿속에서 폭죽이 터지는 기분으로 받아 들었다. 여기 있었구나. 누군가가 환전소 바 위에 있는 휴대폰을 발견하곤 직원에게 맡겨둔 모양이었다. 그렇다. 카페에서 자리를 맡아 두기 위해 지갑도 휴대폰도 안심하고 던져두는 나라가 아닌가. 대한민국의 사회정서에 감탄하는 순간이었다. 감격에 겨운 감사 인사를 한 뒤 출국심사장으로 날아갈 듯 달렸다. 기분이 좋아서? 아니, 탑승시각까지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아서.


아무런 짐도 없이 휴대폰과 여권, 그리고 항공권만 달랑 들고 있었기 때문에 두 번째 출국심사는 조금 더 빨랐다. 하지만 휴대폰으로 한바탕 소동을 일으킨 탓에 탑승까지의 시간은 오히려 빠듯했다. Y는 고맙게도 출국심사장 바로 뒷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곧장 면세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면세품을 구경하거나 쇼핑을 즐길 여유는 없었다. 즉시 면세품 인도장으로 향해 준비된 캐리어를 받았다. 26인치 캐리어를 받고, 포장을 풀어 짐을 쑤셔 넣고, 키링처럼 달랑달랑 들고 뛰며 탑승 게이트까지 달리기까지. 출국심사 이후 단 한 숨의 여유조차 부릴 틈은 없었다.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가는 한국 땅을 벗어나지 못할 판이었다.


수많은 게이트들을 지나쳐 지정된 탑승구에 도착했을 때엔 탑승수속이 한창이었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줄지어 선 사람들 옆에서 나는 끙끙 대며 캐리어에 기본으로 장착된 리튬전지를 어렵게 빼내곤 곧바로 공항직원에게 맡겼다. 탑승수속을 하면서 동시에 위탁수하물을 맡길 수 있는 게이트백 서비스였다. 상황에 따라 어려울 수도 있는 방식이라고 해 조금 불안했지만 (사실 이쯤 되니 불안함이고 뭐고 가져갈 수만 있다면 26인치 캐리어를 기내에 들고 탈 결심마저 하고 있었다) 다행히 캐리어는 무사히 통과됐다.

그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든 일들을 어떻게든 끝냈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탓에 몰아치듯이 일을 해낸 나를 묵묵히 따라온 Y도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약간의 미안함과, 어느 정도의 동질감이 뒤섞인 채로 우리는 나란히 탑승수속을 마쳤다. 기나긴 출국이 마침내 마무리되고 있었다. 이제 정말로 하와이로 가는구나.


정말…… 가는 건가?


이상하게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결코 작지 않은 사건사고와 문제가 있었지만 최선을 다해 해결했고, 준비했다. 한 치의 여유도 없이 달린 모든 과정이 오로지 하와이라는 대의를 위한 과정이었다. 그런데 해방감이나 만족감은커녕 마치 숙제를 해나가는 것처럼 미미한 해소감만 들었다. 왜 이럴까. 어리둥절했다. 분명 그토록 고대한 하와이인데. 오래도록 준비한 여행인데. 이런 기분인 게 맞는 걸까. 어쩌면 내가 너무 지쳐있는 걸 지도 몰라. 한껏 하와이에서 행복할 준비가 된 Y와 달리 나는 여전히 떨떠름했다. 아무래도 너무 높은 피로도 탓에 하와이 여행 자체가 피곤하게 느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애써 회사 탓으로 돌렸다. 이게 다 잠을 못 자서 그래. 한숨 푹 자고 하와이에 도착하면 좀 나아지겠지.


이제는 안다. 여행을 충분히 즐기기 위해서는 많은 돈도, 충분한 시간도 중요하지만 그 무엇보다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여행지에서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든 순수하게 기대할 수 있는 정신. 지치지 않고 즐거워할 수 있는 체력. 그리고 그 모든 걸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까지. 모든 여행의 시작은 바로 그 들뜬 마음에서 비롯된다. 날씨가 아무리 흐리든, 어떤 물건을 잃어버리고 어떤 불상사가 벌어지든 그 마음 하나만 있다면 여행은 어디서든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 중 어떤 것도 준비되지 못한 채였다. 낯선 곳에 대한 기대보다는 그곳에서 해야만 하는 것들, 마땅히 해결해야 하는 임무에 대한 부담감이 내 머릿속에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얼레벌레 정신없이 짐을 싸고, 바닥을 친 체력으로, 성급하고 불안한 마음을 안은 채로 나는 하와이를 향해 출발했다. 전혀 행복하지 않은 상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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