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삶에는 빈틈을 내주어야 한다는 것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하와이의 첫인상은 그야말로 회색지대. 나의 마음가짐이나 심리적 여유 따위를 떠나 하와이는 정말로 우중충했다. 하늘은 구름이 잔뜩 껴 파란색을 찾기가 어려웠고 공기는 기대했던 더위가 아닌 푹푹 찌는 습기로 가득했다. 어라. 하와이가 원래 이런가. 주저하는 마음으로 공항을 나섰다. 내가 생각한 하와이는 이런 게 아닌데. 눈부신 햇살과 타는 듯한 공기, 그리고 새파란 하늘이 끝없이 펼쳐져야 하는데. 호놀룰루 국제공항의 작고 초라한 외관 역시 나의 기대감을 꺾는 데에 한 몫했다. 분명 인천 공항에서 출발했는데. 나리타에서 경유도 했는데. 어디 이름 모를 동남아의 작은 도시나 일본의 소규모 공항에 도착한 기분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해 상반기에 방콕과 도쿄를 여행했던 터라 더더욱 기시감이 들었다. 하와이는 한 마디로 동남아의 습기와 일본의 단조로움이 만난 곳. 나, 제대로 여행 온 걸까.
떨떠름한 나와 달리 Y는 시종일관 행복해 보였다. “여기가 행복의 땅이야! 지상낙원!” “위키위키 셔틀이래!” “봐, 야자수야!” 흐린 하늘이나 오래된 도시, 심지어 긴 여행의 피로마저도 하와이라는 지명 앞에서 모두 사라진 것만 같은 태도였다. 즐거워 보였다. 내게도 그런 열의가 필요했다. Y 만큼 나의 텐션도 끌어올리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여력이 생기질 않았다. 나는 대신 어색하게 웃었다.
호텔로 향하는 셔틀에서 본 호놀룰루의 도시 풍경은 하와이의 첫인상을 더욱 공고히 했다. 외부 계단이 있는 낮은 복도식 아파트와 담백한 구조의 주택들은 모로 봐도 도쿄의 건물들과 매우 흡사했기 때문이다. 하와이에 일본인들이 많이 이주해왔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걸 시각적으로 경험하는 건 또 다른 충격이었다. 무언가 대단한 걸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하와이는 하와이여만 했다. 그 수많은 고생과 사기와 지출과 고통을 겪고 도착한 섬이… 일본이면 안 되는데. 나는 결국 Y에게 나의 심경을 고백하고 말았다. “여기 너무 익숙한 곳 같아. 전혀 새롭지가 않아." 하지만 Y는 좀 더 지켜보자고, 그래도 하와이는 하와이라고 했다. 바다를 보면 또 달라질 거라고 했다. 과연 이런 흐린 날에 바다가 무슨 상관일까 싶었지만 나는 심란한 마음을 애써 잠재우며 차근차근 지켜보기로 했다. 그래. 겨우 입국 심사만 해두고서 불평하면 안 되지. 아직은 하와이가 내게 보여줘야 할 게 많았다. 얼마나 대단한 곳이길래 이렇게 나를 고생시켰는지 두고 보자고.
슬프게도 공항 셔틀은 기존에 예약한 숙소인 힐튼 가든 인에 우리를 내려주었기 때문에 Y와 나는 '진짜’ 숙소인 아쿠아뱀부 호텔까지 거대한 캐리어를 끌고 가야만 했다. 하와이의 오래된 보도를 걸어가며 마음을 다잡았다. 여기는 어딜 가든 오래됐구나. 룸 컨디션이 아쉽거나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말자. 우리가 겪은 고생의 팔 할이라 해도 부족한 게 바로 숙소 문제였다. 게다가 아쿠아뱀부 호텔은 불과 나흘 전에 얼레벌레 예약한 곳이니 만족스러울 리 만무했다. 나는 숙소에 대한 기대감을 최대한 낮춘 채 호텔에 들어섰다. 불안도는 최대치를 찍은 상태로.
아쿠아뱀부 호텔의 로비는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작았다. 오래된 대나무 장식들이 건물의 연식을 여실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시설들이 단정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나는 조금은 안도한 채로 체크인을 한 뒤 방으로 향했다. 긴장 놓지 말자. 무엇보다 룸 컨디션이 제일 중요하잖아. 안 그래도 구글 리뷰에서 극과 극의 평가를 읽은 바람에 나와 Y는 호텔에서 그 무엇이 나온다 해도 당황하지 말고 곧장 룸 체인지를 요청하자고 미리 말을 나눈 상태였다. 그리고 열린 우리의 호텔 룸은.
“어?!” 나는 문을 열자마자 환호성을 질렀다. "괜찮은데?" Y의 감격도 이어졌다. 깨끗한 카펫과 단정하게 정리된 두 개의 침대, 캐리어를 완전히 펼쳐도 충분한 공간과 작은 식탁, 냉장고, 싱크대. 그리고 의자와 테이블이 있는 발코니까지. “생각보다 훨씬 좋아.” “너무 기대를 안 했나 봐.” 우리는 겨우 8평이 될까 말까 한 호텔 방을 구석구석 살피며 연신 환호했다. 마찬가지로 하나 같이 오래된 가구들이었지만 이 정도면 충분했다. 더 바랄 것도 없었다. 호캉스도 아니고, 깨끗한 침대와 따뜻한 물만 있으면 되지 뭐. 우리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간단한 짐만 챙겨 호텔을 나섰다. 나가면서 본 호텔 수영장이 너무 작고 관리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은 뒤늦게 어떤 타격도 주지 못했다. 우리에겐 와이키키 비치가 있으니까!
룸 컨디션이 우려보다 훨씬 괜찮았던 덕에, 한번 안도한 마음은 와이키키 비치로 걸어갈수록 헤실헤실 풀리기 시작했다. 짐 하나 없이 가벼운 어깨는 주변을 충분히 둘러볼 여유를 주었고, 미국 특유의 블록 없는 회색 보도가 낯선 여행지에 와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했다. 바닷바람은 더운 공기를 상쇄시켰고 빨갛게 달아오른 외국인들은 누가 봐도 휴양지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그리고 무엇보다 구름이 걷히기 시작했다. 파랗다는 단어로도 부족한 청명한 하늘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수평선을 보며 나는 Y에게 말했다. “나 이제야 진짜 하와이에 온 것 같아.” Y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내 말 맞지? 하와이는 하와이라니까.” 하와이에 도착한 지 세 시간이 지나서야 나는 비로소 끄덕였다. 변덕스러운 날씨, 경쾌한 사람들. 내가 하와이에 왔구나.
와이키키 비치는 맑고 투명하고 평화로웠다. 해변이 넓지는 않았지만 길게 이어져 있어 여유롭게 바다를 즐길 수 있었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백사장에 타월을 깔고 태닝을 즐기거나 수경도 없이 수영을 했다. 그도 아니면 서핑 보드를 들고 저 멀리서 줄지어 파도를 타고 있었다. 정말로 하와이구나. 이게 하와이구나. 갑자기 벅차오르는 감격에 당장이라도 물속으로 뛰어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수영복 사기. 숙소 문제를 해결하랴, 회사 업무를 처리하랴 한국에서 제때 수영복을 구매하지 못한 탓에 수영복을 사는 것마저 하와이에서 해결하기로 미뤄놨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첫날 일정은 수영도, 먹거리도 아닌 바로 쇼핑이었다. 나는 아쉬운 마음을 안고 쇼핑 거리로 향했다. 와이키키 비치는 어디 가지 않으니까. 앞으로의 바다 수영을 위해 준비부터 해야지.
우리는 칼라쿠아 애비뉴의 거의 모든 쇼핑몰을 탐방했다. 그럼에도 선뜻 손이 가는 수영복은 없었다. 예쁜 것은 너무 비쌌고, 저렴한 것은 살 가치가 없었다. 마음에 들면 사이즈가 없었고, 딱 맞는 것은 촌스러웠다. 다들 하와이에 와서 수영복을 산다던데. 어떻게 좋은 걸 골랐던 거지. 아니면 여행지에서 급히 사는 걸 감안했던 걸까? 나처럼 이렇게 많이 따지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던 걸까? 와이키키 비치를 보며 차올랐던 감격은 쇼핑을 이어갈수록 희미해졌다. 호놀룰루의 현지를 구경한다는 기대감도 잠시, 체력적인 한계에 부딪혀 금세 지치고 말았다. 여행지에 도착한 첫날에 쇼핑을 한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에 보이는 아무거나 대충 사기에는 내 성향이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나는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 채 오전의 쇼핑을 마무리해야만 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아무 음식점에 들어갔다. 하와이에 도착한 뒤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인 데다, 긴 비행을 마치고도 계속 걸어 다닌 탓에 피로는 피로대로 쌓여 있어 어디에든 앉고 싶은 마음이 컸다. 모든 걸 다 계획하고 어떻게든 실패하고 싶지 않아 하는 평소의 나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지만, 피곤 앞에서는 장사 없었다.
음식점은 크고 넉넉한 공간에 비어 있는 테이블이 많아 곧바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알로하! 반갑게 인사하는 직원에게 우리는 치즈 버거와 스테이크 버거, 그리고 맥주 두 잔을 주문했다. 에어컨이 선선히 나오는 그늘에 있으니 그제야 숨통이 틔였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쇼핑을 해야 하나 잠시 회의감이 들던 차였다. 맥주가 먼저 나왔고 우리는 잔을 맞부딪히기 무섭게 벌컥벌컥 들이켰다. 더위에 노곤 노곤해진 몸에 차가운 맥주가 전파를 흘리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맛있는 맥주가 또 있을까! 나와 Y는 쇼핑을 하며 꺼졌던 눈을 다시 빛내며 말했다. “이거 왜 이렇게 맛있어?”
조금 시간이 걸려 나온 버거는 일반적인 햄버거와는 조금 달랐다. 긴 직사각형의 접시에 감자튀김과 버거가 올라가 있었는데, 마치 버거를 반으로 나눈 듯 위쪽 번과 아래쪽 번을 따로따로 두고 그 위에 버서 토핑도 나누어 올라가 있었다. 버거 탑이 무너질 걸 대비해 이렇게 배치해둔 것 같았다. 나는 큰 기대를 하지 않고 한 조각을 썰어 입에 넣었다. “대박.” 오랜 비행과 또 긴 쇼핑을 감안하고서라도 이건 너무 맛있었다. 여행지 버프라고 해도 좋았다. 세상에. 그냥 지나가던 가게에 들어온 건데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나?
우린 뒤늦게 음식점 이름을 찾아 검색했다. 치즈버거 인 파라다이스Cheese Burger in Paradise. 우리가 들어온 곳은 무려 하와이 삼대 버거 맛집으로 일컬어지는 곳이었다! (참고로 나머지 두 곳은 쿠아아이나, 테디스 버거다.) 그것도 네이버 검색창에서 ‘치즈버거’만 쳐도 바로 연관검색어 첫 번째 줄에 올라오는 유명 맛집. 세상에 이런 우연이 있을까. 그냥 길 가다가 사람 없는 가게에 들어온 건데 이게 또 맛집이라니. 아무런 계획 없이도 이런 행복을 얻을 수 있구나.
그 앞에서 하와이 최고의 수영복을 찾겠다는 내 일념이 문득 부질없이 느껴졌다. 하와이에 온 이유가 수영복을 사려고 온 건 아니었다. 쉬려고, 놀려고, 행복하려고 온 거지. 그런데 하와이를 제대로 경험하기도 전에 이미 실망부터 하고 있었다. 흐린 날씨와 축축한 공기에 대한 불평으로, 숙소에 대한 불신으로, 수영복의 부재로, 내가 꿈꾸던 ‘완벽한 하와이’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수많은 이유들로.
하와이는 대체 어떤 곳인 걸까. 춥기도 하고 덥기도 한 곳. 습하기도 하고 건조하기도 한 곳. 그럴 때마다 하와이에 있고도 하와이에 없었던 나. 도착하자마자 하와이의 모습을 부인하며 ‘진짜’ 하와이를 찾기 위해 애썼고 나는 그럴수록 불행해졌다. 대체 무엇을 기대하고 이곳에 왔나. 좀처럼 알 수 없었다. 하와이도, 나 자신도.
그런 걱정과 고민을 단숨에 지워버린 건 아이러니하게도 고작 버거 접시 하나였다. 수많은 계획과 실망 속에서, 유일하게 계획되지 않은 빈틈에 찾아온 접시 하나 나로 나는 너무도 쉽게 행복해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더니, 역시 뭔갈 먹으면서 배우는 게 있긴 한 건지. 아무 생각 없이 들어선 음식점이 맛집이고, 기대하지 않았던 음식이 나를 놀라게 하는 것처럼 어떤 여행은 계획하지 않은 곳에서 뜻밖의 행복이 자라는 모양이다. 모든 것을 다 꿰뚫고 기대를 충족하며 다니는 여행이 주는 행복과, 우연히 즐거움을 얻는 여행이 주는 행복은 다르다. 후자의 행복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계획이 없어도 불안하지 않을 여유가 있어야 한다. 내게는 바로 그 여유가 없었다. 빈틈 하나도 용납하지 못하고 철저하게 관리하고 싶어 했다. 모든 경우의 수를 다 계산할 수도 없으면서. 하와이 여행 계획을 완벽하게 짠 것도 아니면서. 이미 수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고도 나는 여전히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을 거라 과신하고 있었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제야 나는 있는 그대로의 하와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정확히는 내 여행의 빈틈을 겸허히 인정하기로 했다. 내가 상상한 이데아의 여행지가 아니라, 오차없이 꽉 짜인 계획과 실천이 아니라, 우당탕탕 새롭고 낯선 모습을 보여주며 나를 실망시키고 또 기대하게 만드는 날 것의 도시로. 빈틈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과 파도가 또다른 행복을 가져올 수 있도록.
치즈버거 인 파라다이스. 그 이름에 걸맞게 나는 치즈버거를 먹으며 파라다이스를 맞이하는 여유를 배웠다.
물론 그 후로도 한참을 ‘최고의 수영복’을 찾기 위해 애를 썼지만, 당연하게도 최고를 찾지 못해 얼레벌레 세일하는 수영복을 사버렸지만. 그럼에도 하와이는 묵묵히 그 자리에 있었다. 내게 빈틈이 보이길 기다리면서.
그렇다. 이러나 저러나 하와이는 하와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