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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멀리 Oct 30. 2022

산이 좋느냐 바다가 좋느냐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9 적도의 바다를 내려다보는 다이아몬드 헤드


인자요산 지자요수仁者樂山 知者樂水.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 했다. 공자께서 말하셨고, 영화  탕웨이가 말했고,  영화에  빠진 사람들이 말했다.  역시 그중 하나였다.

영화를  사람들과 이야기를  때면 산과 바다에 대한 감상을 나누는 것도 당연했다. “산이 좋아요? 바다가 좋아요?” 장난스레 질문을 곤 했지만, 정작  질문을 되받으면 명쾌히 대답하지 못했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산도 좋고  트인 수평선을 가진 바다도 좋고. 호흡을 조절하며 조용히 오르다 보면 고요 속에서 들리는 새소리가 좋고, 피부를 까맣게 태워도 입가에 웃음이 흐를 수밖에 없는 경쾌한 물놀이가 좋고. 서로 다른 매력을 저울 위에 하나씩 올려다 보고 한참을 비교하다가 (명제의 역이 참이 아님을 알면서도) 끝내 내가 어진 사람인지 지혜로운 사람인지까지 고민하는  성찰을 떠나길  번이었다. 묵묵한 수평선이나 경쾌한 고요 같은  없는 걸까. 그럴  없지. 그건 산도 바다도 아니지. 그런 생각을 하다 문득 떠올랐다. 있었다. 산도 바다도 가진  오묘한 곳이.


하와이 오아후 섬의 남쪽, 와이키키의 동쪽에는 작은 산이 있다. 높이가 이백 미터 남짓되는 이 사화산은 분화구의 모양이 참치의 지느러미를 닮았다고 해 ‘레아히’Lē‘ahi라고 부른다. 현지 언어로 참치의 이마라는 뜻이다. 물론 더 유명한 이름은 따로 있다. 화산에 박힌 암석이 반짝이는 모습을 보고 다이아몬드로 착각한 외국인 선원이 붙인 이름. 바로 ‘다이아몬드 헤드’ 다.

한국에서 한창 하와이 여행 계획을 세울 즈음이었다. Y가 공책에 하와이의 섬들을 정성스레 그려왔다. 커다랗게 그려진 오아후 섬 위에는 그가 가고 싶은 관광지의 위치가 검은 점으로 표시되어 있었고 그 아래에 관광지의 이름과 특징들이 꼼꼼히 적혀 있었다. 진주만, 모나나루아 가든, 와이키키 아쿠아리움, 노스쇼어…… 한 두 개가 아닌 후보들 중에서 우리는 정말로 가고 싶으면서도 갈 수 있는 곳에 빨간색 동그라미를 쳤다. 와이키키 비치와 다이아몬드 헤드가 그렇게 살아남았다.

‘다이아몬드 헤드’ 후보명 아래 쓰인 특징은 ‘분화구+전망대’였다. Y의 말로는 다이아몬드 헤드에서는 하와이의 바다도, 산도, 도시도 모두 볼 수 있다고 했다. 겨우 이백 미터 높이의 동산에 기대하기에는 너무 많은 게 아닐까 싶었지만, 어차피 등산을 좋아하기도 해 별생각 없이 수긍했다. 이참에 하와이 산은 어떤가 확인하지, 뭐. 아침에 와이키키 비치에서 수영을 하고, 오후에는 다이아몬드 헤드에 가는 거야.


와이키키 비치에서 아침 수영을 하면서 나는 몇 번이고 다이아몬드 헤드를 바라보았다. 태평양을 마주 보고 수영을 하다 보면 완만한 경사를 지닌 산 하나가 왼쪽 시야에 자연스레 들어온다. 도시 경관 너머로 보이는 야트막한 형태는 화산답게 울룩불룩한 능선이 특징이다. 하와이를 만들던 신이 흙놀이를 하다가 바닷가에 둥근 모래성을 쌓은 후 손가락으로 굵게 한 움큼 긁은 것만 같은 모양이다. 자꾸만 그곳에 시선이 간 이유는 저 위에 반짝이는 무언가를 찾으려 했던 선원의 마음은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양에, 또 앞으로 가야 할 목적지에 묘하게 이끌렸던 것 같다. 나는 언제나 바다에 있으면 산이 좋았고 산에 있으면 바다를 가고 싶어 하는 청개구리였으니까.


튜브에 의지해 떠다니기만 했을 뿐인데도 아침 수영은 생각보다 힘이 들었다. 샤워를 하고 한참을 침대 위에 늘어져 있다가 억지로 몸을 일으킨 것은 다이아몬드 헤드를 향한 강한 의지라기보다는 우리의 일정 중에 산에 갈 여유가 되는 날은 오늘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산에 가기로 했으면 가야지. 안 가면 누워있기 밖에 더해? (우리의 숙소가 호캉스를 할 만한 곳도 아니니까!) 대신 트롤리를 타고 낭만적인 여행을 가려던 초심은 완전히 사라져 우리는 우버를 타고 약간의 의무감을 가진 채 다이아몬드 헤드로 향했다.

다이아몬드 헤드 주차장 어귀에 내렸을 때엔 오후 2시가 되기 조금 전이었다. 오전의 흐린 날씨는 말끔하게 사라져 청명한 하늘이 우리의 머리 위에 펼쳐져 있었다. 고작 1달러의 입장권을 내고 들어간 다이아몬드 헤드는 주차장에서 보는 뷰마저 놀라웠다. 그림을 잘라 붙여 넣은 듯한 야트막한 산과 그 앞의 넓은 초원, 그리고 몇 개의 낯선 나무들까지. 빼곡하게 나무가 자라고 산맥의 줄기가 또 산이 되는 태맥산맥의 땅에서 자란 나에게 이런 풍경은 그 자체로도 그림 같아 보였다. 나는 트래킹을 시작하기 전부터, 고작 주차장에서부터 이 산과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벅찬 숨을 깊이 들이켜야만 했다. 오길 잘했어.


오길 잘했긴 잘했는데. 산을 오르면서 차오르는 호흡에 그 벅찬 감동은 서서히 흐려져갔다. 한국과 달리 키가 작고 얇은 나무들이 있다는 건 내 머리 위를 가려줄 그림자가 없다는 뜻이고, 평야가 넓다는 것은 가는 길이 구만리라는 뜻이다. 물론 매 순간이 본 적 없는 풍경이고 상상도 못 했던 산책로인 건 맞지만, 경사가 높지 않은 포장길을 끊임없이 걸어가는 건 마냥 즐겁다고는 할 수 없었다. 결국 들장미 소녀 캔디나 알프스 소녀 하이디 즈음으로 상상하며 발걸음을 옮기는 게 상책이었다. 아무렴, 그런 환상적인 공간은 맞으니까. 대체 얼마나 더 걸어가야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멈추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저 산이기 때문이었다. 산은 천천히 오르다 보면 느리든 빠르든 언젠가 정상에 도달하기 마련이다. 그 절대불변의 진리는 서울의 북한산에서든 오아후 섬 남쪽의 다이아몬드 헤드에서든 마찬가지였다.


뜨거운 햇살을 그대로 받으며 낮은 경사의 길을 쉴 새 없이 오르다 보니 협곡 사이로 높고 좁은 계단이 나왔다. 헐떡이며 계단을 오르다 어느 순간 뒤를 돌아보니 오아후 섬의 내륙이 계단 너머로 넓게 펼쳐져 있었다. 광활한 연두색 초원과 그 너머의 미니어처 같은 도심이 마치 채도를 높인 게임 속 일러스트 같았다. 실제라는 게 믿기지 않는 색감이었다. 아니지, 게임 일러스트가 이런 모습을 차용한 거겠지? 이런 걸 보면서 자란 사람들의 미감과 센스가 부러워 사뭇 억울하다가도, 남의 떡이 커 보이는 법이라는 옛말로 스스로를 달랬다. 하와이의 풍경은 매번 시샘과 위로의 반복이었다.

계단의 끝에는 터널이 있었다. 다이아몬드 헤드의 트래킹 코스에서 거의 유일하게 그늘이 있는 곳이었다. 서늘하게 식은 공기에 안도하며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겼다. 저만치 앞서가던 Y가 먼저 터널 밖으로 나서더니 나를 향해 뒤돌았다. 무언가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자, 어떤 길을 선택할래?”

마치 햄릿의 한 장면처럼 의기양양한 Y의 뒤에는 두 갈래길이 있었다. 정상으로 향하는 높은 철제 계단, 그리고 완만히 돌아가는 산책길. 나는 가쁜 호흡을 다듬으며 겨우 대답했다. “우리 천천히 가자.” 아직 봐야 할 게 많잖아. 절대 저 끝없는 계단을 오르지 못해서가 아니라고.

이제부터는 꽤 높이가 있기도 하고 바람을 막아줄 큰 나무가 없기 때문에 세찬 바람도 덤이었다. 모자가 날아가지 않도록 잘 잡으며 다시 한번 발걸음을 옮겼다. 돌아가는 길도 계단이 없지는 않아 난간을 부여잡으며 겨우 몸을 올려야만 했다. 어느 순간 바닥만 보며 오르길 몇 번. 더는 오를 계단이 없었다. 전망대가 코앞이었다.


삶에서 가장 가까이 적도에 닿은 순간이었다. 그때 보았던 풍경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사방 어디를 봐도 오아후의 초원과 평야와 산등성이가 내려다보였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전망대의 가장자리를 잡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천천히 돌았다. 한걸음 한걸음 걸을수록 시야에 들어오는 게 달라졌다. 이끼 색과 연두색이 이리저리 섞인 자연 외곽에 작은 건물들이 옹기종기 늘어붙어 있던 게 점점 빼곡해지더니 높이를 키운 고층 빌딩들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호놀룰루의 도심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옆에 긴 파도가 몰려오는 와이키키 비치가 있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헤엄치며 놀았던 바로 그곳. 불과 몇 시간 전 나를 감동하게 한 영롱한 바다 빛은 산 위에서 봐도 여전히 다채로운 색을 자랑했다. 그 물결은 완만한 굴곡의 해변가에서 시작해 연두색에서, 청록색에서, 푸른색에서, 긴 파도와 너울을 만들어내며 광활하게 이어졌다. 끝도 없이, 태평양으로. 그리고 그 위에는 오후 두 시의 태양이 이마 바로 위에 커다랗게 떠 있었다. 강렬한 햇살과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무한한 바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이제 막 꼭대기에 올라서가 아니었다. 숨을 들이쉬는 것마저 아쉬울 정도로 벅찬 모습에 나는 한참을 헐떡였다.


기원전의 사람들은 달에 비친 지구의 그림자를 보며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다이아몬드 헤드에서 태평양을 내려다보며 그때 유럽의 학자들이 여기에 서 있었더라면 그 사실을 증명할 필요도 없이 눈으로 확인했을 거란 생각을 했다. 두 눈으로 담기엔 넘쳐흐르고 마는 이 태평양이 어떻게 평평할 수 있을까. 겨우 이백 미터 남짓한 높이였지만 나는 분명 보았다. 둥글게 말려있는 대양의 끝자락을.


내려오는 길을 생각하면 잘 떠오르지 않는다. 가파르지 않은 산길 덕에 무난히 내려온 덕도 있고, 하루 종일 바다와 산을 오가느라 지친 탓도 있겠지. 하지만 다이아몬드 헤드에서 바라본 태평양이 내 머릿속에 가득 차 다른 건 도저히 생각하지 못한 이유가 가장 크다. 산을 오르고도 바다에 감격하는 날 생각하면 역시 나는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인가 싶다가도, 묵묵히 오를 수 있었던 산이 있었기에 가능한 감동이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뒤집히기도 한다. 여전히 나는 산도 좋고 바다도 좋다. 어느 것 하나를 턱 하니 고를 수 없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굳이 고를 필요가 있을까. 산도 사랑하고 바다도 사랑하는 내게는 산 위의 바다가 있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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