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으로 몸의 감각을 느끼기
늦은 아침 깨어나 창밖을 봤다. 뜨거운 햇살이 일었다. 간밤에 여러 걱정을 안고 잠에 든 탓에, 잠에서 깬 직후인데도 몸이 개운하지 못하고 무거웠다. 저 뜨거운 볕에다 마음을 툭툭 털어내야겠다 싶었다.
하늘색 티셔츠와 중청 바지를 입고 신발장 윗 칸에 있는 끈 샌들을 꺼내신었다. 산책 길에 좋은 그늘을 만나면 책을 읽고 싶어 질 것 같았다. 조그만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맨몸으로 집을 나섰다.
수원화성 성곽길을 걸었다. 수원 시내 일부를 감싸는 성곽은 총길이 6km, 걸어서 1시간 30분이 넘게 걸리는 길이다. 방화수류정(호수)과 4개의 대문, 수문, 그 외에 복원되지 않은 문을 포함해 작은 문이 6개 더 있다. 게다가 곳곳에 아름다운 샛길이 나 있는 덕분에 모두 분위기가 조금씩 다른 산책 코스가 여럿 있다.
내가 좋아하는 코스는 여느 길에 비해 인적이 드문 좁은 오르막길에서 시작된다. 오늘은 오르막길을 지나 작은 샛길로 올랐다. 높은 정자가 보였다. 정자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에 흰색 운동화 두 켤레가 있었다. 이 정도면 조용히 쉬다 갈 수 있겠다 싶었다. 샌들을 벗어 들고 계단을 올랐다. 정자에는 외국인 커플 한 쌍이 있었다. ‘아 좋다.’ 싶었다. 난 그들의 대화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가 잔잔히 울릴 때면 왠지 마음이 편해진다. 사람들 틈에 있지만 혼자 있는 느낌이랄까. 사람의 온기는 느껴지지만 그들과 같은 공간에 있을 뿐 철저히 타인으로 존재하는 느낌.
성인 20명은 충분히 다리를 뻗고 앉을 수 있을 정도의 너른 정자. 그 앞으론 화서문 주변 일대가 펼쳐져있다. 바람결이 막힘 없이 정자를 드나들었다. 4면의 정자를 둘러싸고 모서리에 하나씩 세워진 깃발에서 펄럭 펄럭 큰 소리가 났다. 센 바람에 깃발이 제 몸을 찰싹 때려가며 마구 흔들거렸다. 낯선 언어로 대화하는 그들의 말소리는 깃발 소리 뒤로 숨었다.
난 그 틈에서 풍경을 등을 지고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일본 작가의 소설 ‘비용의 아내’를 읽었다. 묵직하고 불규칙한 바람은 책 페이지를 마구 넘겼다. 난 두 손으로 책을 꽉 잡았다. 바람은 고무줄 두 개로 팽팽히 묶어 둔 내 머리칼 마저 헝클었다. 그렇다고 바람에 동요할 필요는 없었다. 기온 29도에 살을 태우는 센 햇빛 속에서 부는 바람엔 온도가 없었다. 바람결이 몸에 닿을 때마다 푹신하기까지 했다. 햇빛은 발가락 사이사이를 데웠다.
그렇게 내 몸의 감각을 느끼니 잠이 왔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좀처럼 비워지지 않고 복작복작하던 머릿속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역시 마음이 번잡할 땐 산책이구나, 독서구나 싶었다.
어젯밤 어라운드 매거진에서 어느 명상가와의 인터뷰를 읽었다. 그는 명상의 종류엔 차 명상, 오감 명상, 걷기 명상, 자비 명상 심지어는 먹기 명상도 있다고 했다. 꼭 가부좌 자세로 가만히 있어야만 명상이 아니고 현재의 내 감각을 알고 느끼면 된다고. 내 몸의 모든 감각을 인지하면서 나에게 집중하는 것이 바로 명상이라고 한다.
난 마음이 복잡할 때면 늘 산책을 한다. 나무와 풀이 우거진 곳을 걷다가 풍광이 좋은 곳에 앉아 풀들의 움직임을 가만히 바라보곤 한다. 그렇다고 어느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지만, 오늘처럼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마음이 가벼워지면 내가 지닌 문제에 대해 감정을 덜고 냉정하게 바라볼 수가 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산책 명상을 즐기고 있었나 보다.
| 100일 글쓰기 프로젝트 62일 차 _ 산책 명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