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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영 Feb 10. 2021

비를 좋아한 아이는 말없이 투명 우산을 들었다

아빠와 비

흐리게 보이는 풍경, 습기가 섞여 평소보다 무거운 공기, 그로 인한 농도 짙은 바람, 빗방울이 이리저리 경고도 없이 튀다가 살결에 불시착할 때의 느낌, 우산에 비가 닿을 때 나는 토독 토독 소리와 도로 위에 깔린 물살을 가르며 힘차게 달리는 자동차 소리. 비가 내릴 때면 난, 비가 만들어낸 이 요란하면서도 차분하고, 감각적인 세상에 온몸을 던지고만 싶다.




생애 첫 교복을 입게 된 해. 그 해에 만난 단짝 친구도 나처럼 비를 좋아했다. 우리는 학교에서 걸어서 십 분 거리의 아파트에 살았고, 늘 등하교도 함께했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이면 우린 맨몸으로 빗 속을 달렸다. 아침에 챙겨 나온 장우산은 집에 돌아갈 때까지 제 쓰임을 다 하지 못했고, 비가 오니 조심히 다녀오라던 부모님의 당부도 우린 잊었다. 단발의 짧은 머리칼이 금세 젖고 교복 안의 속옷까지 완전히 젖어 몸에서 눅눅한 냄새가 나도 개의치 않았다. 되려 학교에서 집까지 뜀박질로는 5분이 채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임이 아쉬웠다. 구태여 옆 동네를 거쳐 빙 돌아오기까지 했다.


그리고 내가 세 뼘 더 자라 두 번째 교복을 입게 된 해. 그 해에 만난 나의 새로운 단짝 역시 비를 좋아했다. 친구가 사는 아파트에는 10m는 족히 넘는 나무들로 숲을 이루는 곳이 있었다. 친구가 사는 단지로 가려면 이 길을 지나야 했다. 태풍이 오던 어느 날 저녁, 친구 집에 놀러 가기 위해 역시 이 길을 지날 때였다. 가로등 하나 없는 길, 어둠과 함께 비까지 세차게 내리니 조금 무서웠다. 그때 친구는 갑자기 이상한 표정을 짓더니 귀신처럼 머리를 풀어헤치고 앞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그리곤 맨몸으로 어느 나무를 잡고 방방 뛰었다. 겁 많은 나를 놀라게 해주려 한 친구의 장난이었다. 우리 둘은, 아니 나는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가, 친구와 깔깔거리며 웃다가를 반복했다. 그 날의 비는 위협적일 정도로 무서웠지만, 친구의 장난 덕분에 그조차 추억으로 남았다. 사실 지금 생각해도 걘 도대체 왜 저랬나, 싶을 정도로 기괴하고 어이없고도, 웃기다.




‘학창 시절과 비’를 생각하면 늘 이 두 기억만이 추억이 되어 머릿속을 방방 떠다닌다. 밖에선 비를 마음껏 즐기는 나였지만, 집 안에서만큼은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빠는 내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어른이 된 현재까지 운전대와 함께 한다. 필름을 싣고 다니는 대형 탑차를 10년쯤, 지금은 개인택시를 10n년째 몰고 있다. 아빠에겐 운전대가 삶을 살아가기 위한 도구이며, 철로 만들어진 대략 1평짜리 차 안이 일터이며, 도로 위가 일거리인 셈이다.


하루에 족히 16시간을 도로 위에 서 있는 아빠에겐 몇 번의 위험이 찾아왔다. 아무래도 가장 자주 만나는 위험은 하늘에서 무언가가 내리는 순간이었다. 일기 예보에 먹구름과 비, 눈 모양이 등장할 때면 엄마와 할머니는 창밖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밥을 먹다가도, 좋아하는 연속극을 보다가도, 도로 위에 서 있을 애비(아들) 걱정, 남편 걱정을 했다. 일찍부터 철이 든 언니는 얌전하게 아빠의 안전을 빌었고, 철부지였던 나는 비, 눈 소식에 마음이 설렜다. 하지만 난 명실공히 눈치로 큰 둘째이기에 비를 좋아하는 것을 티 내면 엄마와 할머니의 마음이 더 불편해진다는 것쯤은 알았다. 그래서 비가 내릴 때면 그저 조용히 마당으로 나갔다. 눈을 크게 뜨고선 비 내리는 모양을 구경하며, 비에 젖은 흙냄새를 맡으려 콧구멍도 벌렁거렸다.


교복을 입기 전, 아주 어릴 땐 나가서 비를 맞으면 엄마가 걱정하니 그 좋아하는 비도 이리 조용히만 감상했다. 그리곤 행복한 감상에 젖어 보조개를 띄며 웃다가도, ‘아 참! 지금 아빠는 힘들게 일하고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따라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다가 비를 즐기면서 동시에 비를 좋아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덜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투명 우산 쓰기’. 딱 언젠가 갑자기 내린 소나기에 역 앞이나 문구점에서 어쩔 수 없이 샀을 3000원짜리 투명 우산. 급하게 산 싸구려라 역시 제 값 하듯 잘 찢어지고 고장 난다는 이유로 보통은 부끄럽게 여겨지는, 그런 우산일지라도 내겐 쓰임이 충분했다.


투명 우산 안에선 고개를 위로 바짝 꺾어 들면 빗 속에 온전히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우산에 빗방울이 닿았다가 흘러내리는 모습도 볼 수 있고, 우산 자체가 얇은 pvc 재질로 만들어진 덕분에 우산에 빗방울이 닿을 때 나는 토독 토독 소리도 더 크게 들렸다. 소극적이지만 그 안에서 만큼은 적극적으로 비를 즐길 수 있는 나름의 방법이었다. 어린 시절 찾은 이 방법은, 지금까지도 비, 눈 소식에 가족들이 수심에 찰 때면 종종 꺼내어졌다.


이제는 세 자식 모두 장성(기운이 좋고 힘찬)했다기엔 그저 밥 잘 먹는 어른으로는 자란 지금, 아빠는 비나 눈이 내릴 때면 일을 일찍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여유를 찾았다. 덕분에 내가 투명 우산을 들게 될 일은 예전에 비해 줄었다.




한 달 전, 함박눈이 무섭게 휘몰아쳤다. 올 겨울 첫 함박눈이었다. 아빠는 거실 가운데에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아 창밖을 봤다. 창문 난간에 눈이 켜켜이 내려앉는 게 육안으로 바로 확인될 만큼 많은 양의 눈이 빠르게 쌓였다. 난 “이야~ 하참, 어휴~ 정말 많이 오네~!” 라며 감탄을 쏟는 아빠의 목소리를 bgm 삼아 창문을 활짝 열었다. 난간에 쌓인 눈을 긁어 모아 내 손가락 마디만 한 미니 눈사람을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난간에 세워두었다. 무뚝뚝한 남동생도 내 손가락 눈사람을 보고선 귀엽다며 웃었다.


그런데 뭔가 아쉬웠다. 저 눈보라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잠옷 위에 대충 걸친 겉옷을 단단하게 여미며 가족들에게 가 말했다. “나 눈 맞으러 나갈 건데 같이 갈 사람!!” 자정이 다 된 시간, 이미 잠 기운이 가득한 엄마는 잠시 고민하다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털장갑 위에 고무장갑을 꼈다. 연륜은 무시 못한다. 엄마가 내게 고무장갑을 양보하지 않았다면, 난 고작 작은 눈덩이 하나를 만들고선 젖은 장갑을 낀 채 손이 얼어 아프다며 호들갑만 떨었을 거다. 남동생도 누빔 바지에 롱 패딩을 걸쳐 입고 조용히 따라 나왔다. 아빠는 보고 있던 티브이 프로그램(미스트롯)에 눈을 고정한 채 “미끄러우니까 얼른 들어와” 하고 말했다.


아파트 야외 농구장에 나가 열심히 눈을 밟고 만졌다. 동생은 쇠똥구리처럼 열심히 눈을 굴려 본인의 상체만 한 눈덩이를 만들었다. 엄마는 나무를 툭 건드려선,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눈 무더기를 맞으며 아이처럼 좋아했다. 동생이 만든 큰 눈덩이 위에 내가 만든 눈덩이를 올리고, 그 위엔 엄마가 만든 더 작은 눈덩이를 올렸다. 내 키의 2/3나 되는 커다란 눈사람을 농구대 옆에 세워두었다.


신발과 양말이 젖어 발가락이 언 듯 시렸다. 집에 돌아와 발을 주무르면서 아주 오래전까지 돌이켜봤다. 가족들과 눈사람을 만들거나, 비를 구경한 기억은 없는 것 같았다. 단순히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걸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추억으로 남은 기억은 없다. 내겐 혼자 혹은 친구와의 추억뿐이었던 ‘비와 눈의 추억’에 이젠 가족과의 추억이 추가되었다.


그날 눈을 맞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어쩌면 엄마도, 원래는 눈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을까?’하고 생각했다.

아빠가 운전대로부터 은퇴하게 되면, 그땐 ‘어쩌면 아빠도, 원래는 비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을까?’하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비가 내릴 때, 또 창문을 열고 비 냄새 맡으려 코를 벌렁이다가 ‘나는 왜 비를 좋아할까? ’하고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어린 시절과 아빠가 떠올랐습니다.

영화 속에서 비와 관련된 장면이 줄곧 명장면으로 회자되는 것처럼, 누구에게나 비와 관련된 기억이 있을 것 같아요. 이 글을 읽는 분들도 언제가 비가 내려준 추억을 한번 꺼내볼 수 있는 시간이 되면 좋겠어요. 여러분은 ‘비’하면 어떤 기억이 떠오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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