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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영 Mar 16. 2021

어느 겨울

3년 만에 인화한 일본 겨울 여행 필름 사진


입춘이 지나 봄의 문이 열렸다. 경칩이 지나 개구리도 겨울잠에서 깨어난 시기. 낮에는 완연한 봄의 풍경만이 감도는 요즘이다.


미지근한 바람이 부는 봄의 시작에서, 찬 바람을 타고 눈발이 날리던 3년 전 어느 겨울을 추억했다.


3년 전 나는 연인과 ‘눈의 고장’이라 불리는 일본의 시골 마을로 떠났다.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이라 폭설을 대비해 지푸라기를 쌓아 만든 세모 모양의 지붕을 올린 ‘갓쇼즈쿠리’라는 전통 가옥들이 마을을 이루는 곳이었다.


오래된 펜탁스 DSLR과 필름 카메라를 목과 어깨에 걸치고 마을길을 유유자적 걸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풍경을 찰칵 찰칵, 팅 팅 찍어댔다. 필름 카메라는 일반 카메라와 달리 셔터를 누를 때 ‘팅’ 하고 튕기는 소리가 난다. 소리도, 느낌도 정말 재밌다. 모든 풍경을 담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찍어온 사진을 3년이 지난 시점에서야 인화한 것이다.




옆 동네에 있는 작은 현상소에 필름 두 롤을 맡겼다. 사장님은 필름을 현상하는 데에 40분 정도가 걸린다고 했다. 가게 안에서 기다려도 좋다고 했다.


“아, 그럼 볼 일 좀 보고 올게요~!”


딱히 볼일은 없었다. 현상소에서 필름을 인화하는 것이 유일한 내 볼일이었다. 현상소에 가만히 앉아 인스타그램이나 보면서 시간을 때우고 싶었지만, 그 좁은 현상소에 손님이 40분이나 앉아 기다리고 있다면, 왠지 사장님의 마음이 급해질 것만 같았다.


현상소에서 나와 발이 닿는 대로 걸었다. 산책을 하면서 ‘근데 저 필름에 어떤 사진이 들어있을까? 내가 뭘 찍었었지? 뭐 이따가 가 보면 알겠지~’ 하고 생각했다. 어떤 것이 담겨 있는지도 모를 필름 두 롤이 책장 구석에서 뒹굴고 있는 게 보여, ‘지금 아니면 얘네는 영영 인화되지 못하겠구나’싶어 냉큼 집어 들고 현상소로 향한 것이었다.




50분 정도의 산책을 마치고 현상소로 돌아갔다. 사장님이 말한 시간인 딱 40분 만에 찾으러 가면, 너무 딱딱한, 매정한 사람 같아서.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혹시 갑자기 사장님에게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 제시간에 일을 해결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기에, 나름 여유 시간을 더한 것이었다.


현상소 문을 열자, 뒤통수가 튀어나온 오래된 회색 컴퓨터 앞에 사장님이 서 있었다. 그는 내게 말했다.


“자, 여기로 와서 출력하고 싶은 사진에 마우스로 딸깍 표시해요.”


모니터 속 사진들을 보자마자 ‘내 필름 카메라가 흑백 전용이었나?’ 싶었다. 진지한 얼굴로 모니터를 노려보는 내게 사장님이 말했다.


“허,, 사진은 참 열심히 찍었는데, 제대로 나온 건 딱 한 장이어요.”


그는 마른 웃음을 짓고 있었다.


프린터에서 대략 30장의 사진이 출력되고, 내가 계산을 마칠 때까지 그는 그 말을 정확히 네 번이나 했다. 난 거기에 대고 “아, 그래요? 다음엔 더 잘 찍어볼게요. 근데 전 이 느낌도 좋은걸요.”하고 말했다. 그는 흘러내린 안경 틈으로 내게 요상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가 인화한 사진을 담아 건넨 봉투에는 ‘   이라 크게 적혀 있었다. 글씨체마저 너무나 확고하고 투박하여, 그걸  나는 마치 낙제점을 받은 수험생이  느낌이었다. 나도 모르게  하고 웃었다.


낙제점을 받은 사진들. 그 중에서도 그나마 잘 나온 것이다.

대략 4년 전, 연인에게 필름 카메라를 선물 받고, 필름을 제대로 끼우는 것도 모른 채로 사진을 열심히 찍어서 인화하러 온 적이 있다. 필름에 빛이 다 들어가 한 롤은 버렸고, 한 롤은 모든 사진에 빨간색 빛 번짐이 고대로 인화되었다. 그때 사장님은 필름을 끼우는 방법을 내가 이해할 때까지 몇 번이고 알려줬었다. 난 그가 그날을 기억 못 할 거라 생각했는데, 기억하고 계셨나 보다.


4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사진을 잘 찍지는 못해도 결과물이 어떻든 나름 만족을 느끼는 나를, 그는 ‘낙제점을 받아도, 그게 뭔지 몰라 마냥 해맑은 아이’ 쯤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계산을 마친 내게 그는 또 말했다.


“하이고 찍기는 열심히 했는 데에— 다음엔 더 잘 찍어봐요-!”


“네! 다음에 또 올게요~!”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봉투를 열어 사진을 확인했다. 초점과, 색감, 분위기를 모두 빼앗겨버린 사진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사진을 보면서도 그날의 추억이 생생히 떠올랐다. 신발 앞 코가 젖어 시려웠던 발, 카메라를 든 빨간 손의 저린 느낌, 연인과 콧물을 훌쩍이며 들이켜던 엄청 짜고 뜨거운 우동의 맛 같은 것이.


사진을 찍는다는 건 어쩌면, 셔터를 누르는 순간 내가 뷰파인더로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 머릿속에 ‘찰칵’ 하고 낙인 되는 과정이 아닐까?




너무도 아름다운 시라카와고의 풍경을 온전히 보여드리고자, DSLR로 촬영한 사진도 함께 올린다.
지붕에 눈이 쌓인 갓쇼즈쿠리
엄청 크다. 세모 지붕 안엔 2~4단으로 나뉜 커다란 창고가 있다



| 100일 글쓰기 프로젝트 16일 차 _ 어느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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